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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남 구원
"하지만 구원씨, 오늘은 바넷사씨와 쭉 같이 계셨던 것 아닌가요?"
그리고 그런 디아나의 질문에, 레이아가 이상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어, 어라? 천사님. 이상하게 말에 가시가 돋쳐있지 않나요?
아니. 우리 천사님이 그럴 리가 없지만 말이야. 애초에 목소리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천사의 목소리 그 자체였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님의 말을 그렇게 들었다는 건, 역시 내가 내심 찔리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 오늘은 딱히 바넷사랑 이러쿵저러쿵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저 마차를 이용하기 위해 데리고 다닌 것에 불과하다.
단지 그뿐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요즘 바넷사랑 너무 붙어 다닌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바넷사가 아직 사도임명도 못한, 공략중인 상대라고는 하지만 말이다.
잡은 물고기에 먹이를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바넷사 공략에 전념하기 위해서 우리 애들한테 소홀해진다는 건 있을 수 없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해서 우리 애들에 대한 내 마음은 약해지거나 하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날이 갈수록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갈뿐이다.
우리 애들도 그런 날 믿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허락해 준 거고.
아, 지금 건 조금 닭살 돋는 발언이었나.
아무튼 그래.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하자.
"그러고 보니 올 때 구원보다 바넷사씨가 먼저 들어왔었지. 구원, 혹시 또 뭔가 저질렀어?"
천사님의 말 한 마디로 내가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있었을 때, 옆에서 사라가 그런 얘기를 중얼거렸다.
너 말이야. 내가 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척 한 주제에. 역시 다 보고 있었잖아.
그리고 또는 또 뭐야. 또는. 내가 그렇게 맨날 사고나 치고 다니는 이미지냐?
"뭐야?"
내가 그런 의미로 사라를 바라보자, 사라가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난 딱히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결국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했다.
아니. 어차피 말해봤자 ‘응. 그런 이미지야.’라고 대답할 게 뻔하다든가,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고. 내가 그렇게까지 사고뭉치는 아니잖아?
그냥 방금 전에도 사라랑 한바탕 하고난 다음이니, 또 투닥투닥 거리기 싫었을 뿐이야.
내 가슴엔 아직도 사라의 붉은 손바닥 자국이…벌써 없어졌구나. 훗. 이 몸의 생명력이란.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아무튼 나는 뭔가 저질렀냐는 사라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뭐, 실제로는 뭔가 저지르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방금 전에 그런 결심을 한 직후이고 말이야.
괜히 우리 애들한테 바넷사와의 연애사를 털어놓으며 고민상담을 할 필요는 없겠지.
바넷사와의 일은 나 스스로 처리하기로 하고, 이렇게 얘들과 같이 있는 이 시간은 얘들에게 신경을 쓰자.
"후훗. 정말로요오?"
"그럼. 그냥 정원에서 키스만 한 게 전부야."
모처럼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한 나였지만, 어째선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실여부를 추궁하는 레이아에게 그만 반사적으로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아니. 레이아는 딱히 추궁을 할 생각 같은 건 없었겠지만 말이야.
젠장.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이라지만, 천사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거짓말을 하는 건 너무 난이도가 높아.
"전혀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마틸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응? 그런가? 난 그렇게까지 과민반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키스잖아? 그냥 헤어지는 인사겸 한 것뿐이라고.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만한 일은 아니지 않아?"
나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래도 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디아나는 살짝 화가 난 듯 쀼루퉁한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야.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거냐?"
"왜 굳이 이 몸을 보면서 말하는 겐가?"
그런 디아나에게 시선을 맞추며 질문을 던지자, 디아나가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건 화가 났다기 보다는, 왠지 삐진 것 같은 반응인데.
"아니. 네가 제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흥! 이건 그냥 바넷사가 부러워서 그런 거네!"
아. 그러냐. 너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아니. 뭐, 디아나는 종족특성 때문에 특히 키스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헤어지는 인사겸하는 키스는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디아나랑은 헤어지는 인사를 할 상황자체가 없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런 걸로 삐지지 마라. 자."
"우으음…. 후후흥. 삐진 정도는 아닐세. 삐진 정도는."
내가 그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자, 디아나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 얼굴 표정이나 어떻게 하고 그런 말을 해라.
뭐, 네 기분이 좋아졌다면 나도 그걸로 만족이지만 말이야.
"……."
대신이라고 할까. 디아나의 기분을 풀어주는 대신, 이번엔 다른 애들이 살짝 삐지는 상태가 발생해버렸지만 말이다.
"다, 다들 한 번씩 해줄까?"
"흥. 됐네요."
"후훗. 네. 꼭이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식사 전에…예의에 어긋나니 금방 끝내세요."
위기감을 느낀 내가 재빨리 그렇게 말하자, 각자에게서 각양각색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라는 새침한 표정으로 반대를.
레이아는 당연히 해달라는 표정으로 찬성을.
그리고 마틸다는 표정과 말투는 반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찬성을.
아, 참고로 실비아는 저기 구석에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오늘은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 이 이상은 절대 무리라는 표정이었다.
"잠깐만요! 다, 다들 치사해요!"
그리고 혼자서 부정적인 대답을 한 사라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실비아까지 포함해서 2대2지만, 실비아의 저 반응은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되니까 말이야. 싫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다는 뜻인 만큼, 어떤 의미로는 찬성이라고 봐도 된다.
"그럼 사라만 빼고 하는 걸로…."
"씨잉!"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나는 결국 한명 한명에게 전부 다 가볍게 키스를 해줬다.
입술 끝이 살짝 닿는 정도의 가벼운 키스였지만, 다들 그걸로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뭐, 마틸다의 말처럼, 아직 음식에 입을 댄 건 아니지만 식사 직전이고 말이다.
아, 참고로 실비아는 구석에서 도망가려는 걸 붙잡고 강제로 했다. 그도 그럴 게, 혼자 따돌리면 불쌍하잖아?
응? 강제로 하는게 더 불쌍하다고? 하핫. 그럴 리가. 쟤도 좋아서 저러는 거라니까.
아무튼 이걸로 바넷사 관련 얘기는 어느 샌가 쏙 들어가고, 다들 나하고 알콩달콩한 분위기가 됐다.
훗. 나란 남자. 왜 이렇게 분위기를 바꾸는 능력이 뛰어난 거냐.
자신의 이 뛰어난 머리가 원망….
"그래서, 결국 바넷사는 어쩔 겐가."
디아나 이 녀석. 아직도 그 얘길 기억하고 있는 거냐. 하여간 머리는 좋아서.
애초에 바넷사를 받아들이도록 허락한 것도 디아나니까,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하겠지만 말이야.
모처럼 내가 너희랑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 꼭 다른 여자 이름을 꺼내서 분위기를 망쳐야겠냐.
"어쩐다니. 내가 뭘 어쩔 필요 있어?"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당연하잖아요."
일단 대충 대답하고 넘어가려고 했던 나였지만, 그런 내 대답을 듣고 이번엔 마틸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그렇게 말했다.
방금 전에 나랑 키스할 때만 하더라도 핑크빛 모드였던 주제에. 그 사이에 풀린 거냐.
실비아를 붙잡고 키스하기까지 시간을 조금 많이 잡아먹었나.
"무슨 말이야?"
"정말 모르는 건가요? 생각해 보세요. 정원에서 키스를 하셨다고 했죠?"
"응. 그런데."
"당연히 주위에 다른 메이드분들도 계셨겠죠?"
"그야…뭐, 없지는 않았지."
우리가 키스하는 걸 보고 환성까지 지를 정도로 제대로 목격당하긴 했었지.
아, 잠깐만. 그럼 바넷사는 그게 부끄러워서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건가?
나는 그제야 바넷사의 행동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후우. 역시 화난 건 아니잖아.
"드디어 알아챈 모양이군요. 그래요. 바넷사씨 입장에선, 근무 중에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한 거라고요. 저도 만약 교황청에서 다른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에게…아아…그, 그런…."
마틸다는 내 표정을 보고 이제 알겠냐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다가, 결국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아니. 야. 바넷사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려준 건 고마운데 말이야. 망상으로 핑크빛 모드가 되는 건 그만두는 게 어떠냐?
분명 저주는 날이 갈수록 풀리고 있는데 어째 저 핑크빛 모드만큼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냐.
뭐어, 보고 있으면 재미있으니까 저건 저것대로 별로 상관없지만 말이야.
"아무튼 알았어. 바넷사한테는 내가 알아서 사과할게. 그보다 지금은 내일 얘기를 하는 게 어때?"
"내일?"
"그래. 슬슬 던전에 다시 가야지."
"네에에?!"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레이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레이아가 그런 식으로 나오자, 나는 그런 레이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기 힘들어졌다.
그치만…눈앞에 가슴이…가슴이…젠장. 이건 남자의 본능이라고.
"구원씨. 안 돼요. 조금만 더 쉬어요. 네?"
아차. 그러고 보니 나 여전히 요양 중인 몸이었지.
이 며칠간은 밖에도 맘껏 싸돌아다녔으니 또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아무튼 내 걱정이 가득 느껴지는 천사의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졌다.
오늘 밤은 레이아 차례. 즉, 내가 조금 더 쉬어봤자 레이아에게 득 될 건 별로 없다. 그저 순수하게 내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레이아가 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서 시선을 가슴골이 아닌 레이아의 눈동자에 맞추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레이아 걱정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또 별 일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내가 부드럽게 말하자, 레이아는 살짝 삐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반응은 또 신선하네. 그리고 귀엽다. 날 걱정해서 이러는 거니 더더욱.
"그것도 그렇지만…만약에, 만약에 정말로 내가 던전에 트라우마같은 거라도 생겼다고 치자. 그러면 오히려 최대한 빨리 다시 던전에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나도 주워들은 얘기라 잘은 모르지만 말이야. 이런 건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극복하기 힘들어진다고 하더라고."
"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디아나도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뭐, 용인족들의 트라우마가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심각해져갔는지 실시간으로 지켜본 디아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최대한 일찍 다시 던전과 마주해서, 트라우마를 극복해내려는 거야."
"하, 하지만…."
내 말에 일단 납득은 했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아가 눈동자를 불안하게 떨었다.
나는 그런 레이아의 두손을 이번에는 내가 감싸 안듯 잡고 안심시키듯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걱정할 거 없어. 만약 내가 트라우마가 생겼다면, 그건 던전 안에서 홀로 남겨진 고독함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은 너희 모두와 같이 있는 거잖아? 너희랑 있으면 걱정 없어. 너희만 곁에 있으면 난 뭐든 이겨낼 수 있어. 애초에 트라우마 같은 건 너희랑 있으면서 생길 잡념에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쿠허억…."
진지한 목소리로 레이아를 안심시키고, 마지막엔 약간의 농담까지 곁들여 마무리를 한다.
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완벽한 화술이었지만, 그 완벽한 화술을 중간에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다.
"하여간 이 바보는 꼭 마지막에 이런다니까. 중간까지는 감동적이었는데."
"후훗. 그래도 그게 구원씨의 좋은 점이잖아요."
다행히도 거기까지만 듣고도 레이아는 불안감이 조금 옅어진 건지, 드디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사라에게 그렇게 말해줬다.
"레이아는 너무 구원의 어리광을 잘 받아줘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역시 레이아! 잘 알고 있다니…끄아악! 야! 꼬집은 데를 또 꼬집는 건 반칙 아니냐?!"
"이런다니까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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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