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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26화 (61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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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시아의 감정

    그러니까 자신은 그때 구원에게 안기는 걸 거부했던 거다.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의 그런 태도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는 말은, 역시나 자신을 구원을….

    으읏.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펠리시아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 이후에 느꼈던 감정들도 생각해보면, 자신의 감정의 정체는 점점 더 확실해질 뿐이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거부한 뒤에도, 구원이 계속해서 자신과의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을 때.

    물론 필요에 의해서 한다는 구원의 태도에 상처를 받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자신과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구원의 모습을 보고 내심 기쁜 마음이 드는 자신이 거기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약속을 지키겠다는 책임감에서 오는 건지, 아니면 나중에 왔을 때 또 저번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귀찮으니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속셈이었던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구원이 자신을 돕기 위해서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예 날 안고 싶다고 그런 거라는 말까지….

    물론 그게 구원의 진심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 건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구원의 진심에 상처를 받은 건 여전했기 때문에 관계는 계속 거절했지만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이라도 더 구원이 자신과 하고 싶다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이유도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자신의 그런 태도는 결국 구원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만들었고,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구원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결과를 낳게 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내 기분은….

    한 마디로는 도저히 정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분명 상처를 받아서 오늘은 관계를 가지고 싶지 않았는데, 한편으론 구원에게 안긴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내가 있었다.

    이번만이라도 제대로 섹스를 거절해서, 자신도 항상 머릿속에 섹스 생각만 들어있는, 구원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런 때마저 구원의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흥분해버리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구원이 분명 미웠을 텐데, 그리고 계속 미워했어야 정상일 텐데, 삽입 후에는 상냥하게 대해주는 구원을 보고 있자니 그런 마음은 어느 샌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행복에 겨워하고 있을 정도였다.

    구원이, 방금 전 실비아를 안던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안아줬던 거다.

    삽입 전에는 어조는 달랐을지언정 실비아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다리를 벌리게 하고, 자신의 가장 은밀한 곳마저 스스로 벌려서 드러내게 만들었다.

    게다가 삽입 후에는 어땠는가.

    마치 지금까지의 거친 말투는 날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듯, 180도 뒤바뀐 태도를 보이며 날 향해 상냥하게 미소지어줬다.

    물론 그 직후에도 내 기분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말을 했다가, 이번에는 또 띄워주는 말을 했다가 하면서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지만, 그마저도 나는 행복해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아까 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걸 해줬으니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섹스 말이다.

    물론 구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목이나 귓불에는 그렇게 정열적으로 키스를 해주면서도, 입술은커녕 볼에도 제대로 키스를 해주지 않을 때는 역시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실비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두 손을 마주잡는 게 아니라 가슴을 움켜잡을 때는, 역시 나와의 행위에서는 쾌락이 우선인가 하는 생각에 슬퍼지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말이다.

    쾌락마저 없으면 섹스는 그저 이 귀찮은 왕가 사람들 특유의 성욕 다스리기 위한 귀찮은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래서 섹스에서 그렇게 쾌락을 추구했던 건데.

    그런 내가 섹스에서 쾌락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려 하다니.

    …역시, 역시 난 그 남자를…구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 사실은 굳이 이렇게 돌이켜보지 않더라도, 마음 한구석에선 이미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방금 전에, 왜 굳이 실비아를 불러 세워서 그런 질문을 했겠어?

    "실비아. 하나만 물을게. 실비아는 내가…. 실비아가 내 눈 앞에서 저 남자에게 안긴 이유는, 역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인 거야?"

    직접적으로 묻는 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붙어 다녔던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다.

    분명 그런 표현만으로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바가 뭔지 알아들었겠지.

    "…으, 응…."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난 이후로 날이 갈수록 표정이 풍부해지고 있는 단짝 친구는, 내 질문에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실비아의 대답을 듣고, 나는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상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실비아가 그 상황에서 갑자기 내게 섹스를 보여줄 결심을 하다니.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내 단짝 친구는 나보다도 더 먼저 나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있었던 거다.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감정에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둔감한 친구를 위해서, 일부러 눈앞에서 섹스를 보여줬다는 거다.

    나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서.

    누가 기사님 아니랄까봐, 방식이 조금 과격하잖아. 그냥 말로 알려줬어도 됐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를 원망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다.

    애초에 말을 들어보면 실비아 자신도 구원의 본처라는 셋에게 눈치를 보는 상황일 거다.

    그런데도 친구인 날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본처 셋에게서 미움 받을 각오까지 했다는 거다.

    구원의 곁에서 지내려면 앞으로 평생이 피곤해질 수 있는 각오를 한 거다.

    그런 실비아를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어.

    그리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만약 실비아가 말로 자신의 감정을 알려줬다면, 난 절대 그 말에 수긍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내가 실비아를 잘 알고 있듯, 실비아도 날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비아는 굳이 그런 방식을 택한 거겠지.

    실제로 이런 기분을 맛보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선 구원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있지 않은가.

    뭐,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되새기고 나니, 이제는 눈을 돌리고 싶어도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확실히 자신의 감정을 알게 됐지만 말이다.

    아아! 그래! 사랑이야! 사랑한다고! 사랑에 빠진 거라고!

    하지만 말이야. 어쩔 수 없잖아. 그야 부정하고 싶어진다고.

    그렇지만 이런 감정, 나한테는 평생 연이 없을 줄 알았단 말이야.

    자신은 공주다. 차기 여왕이다.

    이 나라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높은 신분이고, 그에 따른 특권을 엄청나게 누리며 자라왔다.

    하지만 특권이 있으면 그에 따른 책임도 있는 법.

    자신은 평생 연애 같은 건 해보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가 정해주는 정치적으로 가장 이익이 되는 상대와 결혼을 하게 될 거다.

    펠리시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도 못생기고 밤일도 제대로 못하는 남자를, 단지 용사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으로 맞이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펠리시아는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도 사람이다 보니, 그런 현실을 부당하게 느낀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남자들과 대놓고 문란한 관계를 가진 것도, 어쩌면 그런 현실에의 반항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왕가 사람들은 성욕을 꾸준히 채워줘야 한다고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문란하게 놀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펠리시아의 뛰어난 머리를 생각해본다면, 요령 좋게 몰래몰래 남자들을 구슬리며 성욕을 해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굳이 그걸 신경쓸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연애결혼 같은 건 불가능한 거다. 그러니 자신이 문란하다는 소문이 나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언젠가 정해질 자신의 결혼 상대도, 그런 소문 때문에 자신을 거절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상대했던 모든 남자들은 어떻게든 내 마음이 자신을 향하도록 만들려고 안달을 했으니까.

    굳이 매혹을 쓰지 않더라도, 남자들의 마음을 주무르는 일 따위는 펠리시아에게 있어서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단 한 명. 구원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무튼 약간의 반항심. 그리고 어차피 어찌 되든 상관없을 거라는 자포자기한 심정이 뒤섞여, 펠리시아는 지금까지 대놓고 문란한 생활을 하며 쾌락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그런 생활을 했던 자신이 이제 와서 사랑이라니.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런 생활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적어도 구원과의 만남만이라도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결국 생각은 돌고 돌아서, 다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앞으로 구원의 얼굴을 어떻게 보면 좋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자신이 구원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펠리시아는 새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화끈 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눈앞에 구원이 나타난다면,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을 자신마저 있었다.

    아아! 정말로오! 이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고!

    내가 사랑이라니! 이런 건 내 캐릭터에 안 맞잖아!

    게다가 그런 부끄러움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자신이 연애결혼이 불가능한 신분이라는 문제는…솔직히 말해서 이 상황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대는 여신님의 사자. 그것도 교황의 인정까지 받은 진짜다.

    게다가 그 곁에 있는 사람의 면면 또한 화려하다.

    만약 남편으로 맞이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상대는 없을 정도였다.

    전에 어머니께 영상보급과 성욕해결 문제 같은 걸 보고하며 구원의 얘기를 꺼냈을 때, 어머니가 넌지시 구원의 아이를 가지는 건 어떠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들은, 전부 자신이 구원의 정실이 된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여신의 사자라고는 하지만, 자신도 차기 여왕.

    실비아나 마틸다 추기경처럼 첩으로 들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아니. 사실 실비아나 마틸다 추기경을 첩으로 맞이한다는 것 자체부터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만약 자신이 구원의 여자가 되려면, 정실이 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 구원의 태도로 봤을 때 정실은커녕 첩으로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거지만.

    이제 와서 자신이 사랑을 고백해봤자, 분명 구원에게 차이고 그걸로 끝이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구원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말하는 걸로 봐선, 구원은 이 세계보다도 훨씬 성적으로 개방이 덜 된 세계에서 온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니까 말이다.

    그런 구원이 자신을 내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라도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구원의 마음을 돌릴 수단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매혹을 쓰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겠지만…그런 식으로 구원의 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구원의 여자가 돼도,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하면….

    펠리시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를 유혹할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아아아! 정마아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머리를 움켜쥐고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핑크 블론드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어보지만, 그런다고 해서 지금의 이 답답한 기분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머리가 복잡할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남자에게 안기며 쾌락만을 탐하는 게 제일이지만…구원에의 사랑을 깨달은 지금, 다른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비록 구원은 넌 내 여자가 아니니 성욕이 생기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도 된다는 식으로 말을 했었지만 말이다.

    비록 구원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다른 남자에게 안길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자신의 문란했던 과거가 깨끗해지는 건 아니지만, 이건 내 기분의 문제다.

    하지만 섹스가 불가능하면, 대체 이 답답한 기분은 어떻게 해소하면….

    …그런 취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남자가 안 된다면 여자 시중이라도 불러서 봉사를 시켜볼까?

    구원도 그건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으니…아니.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괜히 더 문란하다는 소문이 날 뿐이야.

    이 이상 소문을 악화시킬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면 이 답답한 기분은 대체 어쩌라는 거야?

    아아아! 정마아알! 난 왜 사랑 같은 걸 해버려서어!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했던 연참입니다.

    그제 윈도우 업데이트 전에 썼을 때는 한 편만에 펠리시아 시점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한 번 썼던 내용을 다시 다시 쓰는 거라 그런지 왠지 더 길어졌네요.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전자도 그냥 오타 맞습니다. 절묘하게 말이 되는 오타가 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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