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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25화 (60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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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시아의 감정

    "하아…."

    방문이 닫히며 실비아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 펠리시아는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왠지 머리가 무거운 느낌이었다.

    스스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정리되지 않는 느낌.

    타고난 머리가 좋아서 어렸을 때부터 대부분의 일은 별 고민도 없이 간단하게 처리해온 펠리시아로서는 익숙지 않은 감각이었다.

    "하아…."

    입에서는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펠리시아는 방금 전 실비아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새겨봤다.

    "내가 구원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 라…."

    방금 전 실비아와의 대화에서도 굳이 자신의 입으로는 내뱉지 않고 돌려 말했던 그 말.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아무것도 숨기는 일 없이 모든 걸 털어놓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실비아의 앞에서도 왠지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그 말을, 펠리시아는 이렇게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어서야 겨우 자신의 입에 담을 수 있게 됐다.

    "우으으으읏!"

    물론 자신이 내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 펠리시아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다리를 바동바동 거렸지만 말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마저, 펠리시아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생소한 경험이었다.

    이래 봬도 공주니까 말이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라도 공주라는 자리에 걸맞은 우아함을 유지하도록, 아예 몸에 각인될 정도로 예법을 익혀왔다.

    구원은 그런 자신을 마냥 천박한 행동만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물론 첫 만남이 그랬던 만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런 식으로 첫 만남을 가지는 게 아니었는데.

    어차피 구원은 여신의 사자이고, 이 도시에서 활동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과 만날 기회도 있었을 것이 틀림 없…핫!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라니. 아직 난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인정한 게 아니잖아!

    아니. 인정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애초에 그 남자하고는 필요에 의해 몸을 섞는 관계에 지나지 않잖아.

    지금까지 왕가 특유의 성욕을 달래기 위해 안아왔던, 수많은 남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원래대로라면 남자가 나간 지금 이렇게 의식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펠리시아는 두 손으로 부여잡은 머리를 붕붕 흔들며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머릿속에서 구원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아! 정말!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실비아가 이상한 말을 했기 때문이야!

    침대에 누워서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펠리시아는 괜히 이 자리에 없는 절친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 디아나가 인정해주셨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펠리시아다. 자신의 그런 생각이 애먼 사람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란 걸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펠리시아 스스로가 실비아를 불러 세웠던 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때 실비아를 불러 세워서 그런 질문을 했던 건, 분명 스스로도 내심 짐작 가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펠리시아로서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석연치 않은 감정을 언제까지나 가슴에 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펠리시아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두 손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천장을 바라보며 방금 전에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기로 했다.

    분명 처음 구원에게서 생소한 감정을 맛봤던 건…오늘이 아니라 한참 전.

    그래. 지난번 구원이 찾아왔을 때다.

    그 때 차오르는 성욕을 해소하지 못한 내가 뿜어댄 기운에 당한 구원은, 날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명백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 시선. 그 목소리. 그 표정.

    그래. 그건 인정해. 그때는 솔직히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오싹했었어.

    머리도 마치 마약을 한 것처럼 몽롱해져서, 성욕에 굶주려있던 몸에 드디어 구원이 쾌감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쾌감과는 별개의 무언가가 느껴졌던 건 확실해.

    솔직히 말하자면, 구원이 키스를 하기 위해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고 싶었을 정도였다.

    나 자신은 아직 키스를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구원과 키스를 했다가 괜히 사이가 서먹해지면, 앞으로의 관계에 영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펠리시아는 이성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구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뭐, 솔직히 말해서 첫 키스를 제정신도 아닌 상태의 구원과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는, 나답지 않은 감정도 살짝은…아, 아무튼!

    어쩌면 그 감각이, 다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충족됐을 때 느껴지는 행복일지도 모르지.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도, 펠리시아는 아직 자신이 구원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걸 인정해버리면 나는….

    아무튼 그 오싹오싹하면서 몽롱한 감각이 꼭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다.

    그 이외의 감정으로 인해 그런 기분을 맛보게 됐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구원이 지적해줬던 대로, 난 쾌락주의자니까 말이야.

    게다가 고압적인 명령을 들으면서 흥분할 정도로, 새로운 경험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러니 그때 처음 느껴보는 구원의 그런 사랑에, 그냥 새로워했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무, 물론 그 이전에도 남자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당연하잖아. 나는 세계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절세미인에, 머리도 좋고, 장래 여왕이 될 몸이라고. 그 누가 봐도 완벽한 여자라고.

    나와 관계를 맺었던 남자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구원이라는 예외만 제외하면 모조리 다 내게 푹 빠져서 사랑을 속삭여댔을 정도라고.

    오히려 나하고 그렇게 관계를 맺고도 빠지지 않은 구원이 이상한 거야.

    난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잠깐만. 어쩌다 이런 얘기가 됐지?

    자, 잠깐 기다려. 내가 사랑받는데 익숙하다고 하면, 그때 구원의 그런 태도에 새로워했다는 가설이 깨져버리게 되잖아.

    그, 그럼 난 정말로 구원을…?

    아, 아니! 그럴 리 없어!

    침착해. 침착하는 거야. 펠리시아.

    분명 내가 발견하지 못한 뭔가가…그, 그래! 상대가 구원이니까! 구원이니까 새롭게 느낀…!

    아, 아니! 구원이 특별한 사람이라서 새롭게 느꼈다는 게 아니라고?!

    그저 구원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처음부터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구원이 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처럼 대하니 신선하게 느낀 거야!

    드디어 정복했다는 느낌? 나도 차기 여왕으로서 그 정도 정복욕은 있으니까. 응! 분명 그런 게 틀림없어!

    왠지 평소보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가며 어떻게든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성공한 펠리시아였지만, 그런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말로 이렇게 결론 내려서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분명 자신은 이런 대답을 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직.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는 조금 부족한가?

    아직 오늘 느꼈던 감정에 대한 해석은 하지도 않았잖아.

    그래.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자.

    결국 스스로 내린 결론에 만족하지 못한 펠리시아는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 날은 그런 감각을 맛본 건 그냥 정복감에 취해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은? 오늘 느낀 그 감정들은?

    성에 구원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자신은 분명히 들떠서 방 분위기를 세팅하고 있었다.

    옷도 일부러 반쯤 벗고, 자세도 아슬아슬하게 중요한 부위만 가려지도록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선물로 받고 나서 뚜껑도 열어본 적 없는, 은은한 향기의 향수까지 뿌렸다.

    자신의 그런 행동들을, 구원은 전혀 눈치를 못 챈 것 같았지만 말이다.

    뭐, 구원의 시점에서 본 나는, 언제나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을 테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그 남자는 내가 평소에는 향수 같은 걸 쓰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왕가의 사람들은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날 때부터 남을 편안하게 만드는 기분 좋은 체향을 타고난단 말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구원의 무덤덤했던 반응이 분해진 펠리시아였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여하튼 자신이 남자를 맞이할 때 그렇게까지 열심이었던 적이, 그렇게 들떴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구원이 그 집사가 나보다 예쁘다고 했을 때의 기분은 또 어땠는가.

    그 집사가 구원의 여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난생 처음 느껴보는 무거운 감정은?

    그때 느꼈던 집사에 대한 그 감정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명백한 질투였다.

    그래서 자신은 그런 행동을 하며 구원을 유혹했던 거다.

    아무리 그렇게 그 집사씨가 예쁘다고 떠들어대도, 결국 섹스는 내가 더 좋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굳이 전에 했던 약속을 언급하며 자신과도 사랑이 듬뿍 담긴 섹스를 하도록 말을 꺼내기까지 했다.

    물론 그 행동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설마 구원이 내 눈 앞에서 다른 사람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를 보여준다고 말 할 줄이야.

    아니. 원래부터 도발당하면 욱하면서 반대로 행동하는 기질이 있는 구원이다.

    평소의 펠리시아였다면, 그렇게 말해서는 구원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 거라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때의 펠리시아는 평소의 펠리시아가 아니었다.

    집사에 대한 질투에 눈이 멀어서 자신도 구원과 사랑이 담긴 섹스가 하고 싶어 안달 난, 전혀 냉정하지 못한 펠리시아였다.

    일단 겉모습은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태도로 보였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튼 그때 자신도 구원과 사랑하는 사람처럼 섹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분명 단순히 쾌락이나 정복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런 설명으론 자신이 그 집사씨에게 느꼈던 감정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게다가 눈앞에서 실비아와 구원이 섹스를 시작했을 때의 기분은 또 어땠는가.

    그것도 자신과 할 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행위.

    심지어 저번에 내 기운의 영향에서 벗어난 구원이 진정한 사랑을 알려준다면서 거짓으로 사랑을 속삭이며 했을 때와도 차원이 다른 행위를 눈앞에서 보게 된 거다.

    실비아와 사랑을 나눌 때의 구원은, 마치 나의 기운에 영향을 받고 내게 달려들던 그때의 구원과 흡사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실비아의 반응 역시도 구원에게 완전히 푹 빠진 사람의 그것이라, 둘이 관계를 맺는 모습은 내가 낄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천생연분처럼 보여서….

    지금 이렇게 그때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펠리시아의 마음 한 구석이 욱신욱신하고 아파올 정도였다.

    솔직히 그때는 눈앞에 보이는 충격적인 광경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려셔, 일련의 행위들이 전부 기억에 남아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은 여전히 펠리시아의 뇌리에 각인되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펠리시아가 그렇게 충격을 받았다는 것도 모르고, 실비아와의 행위가 끝난 구원은 정말 섬세하지 못하게도 곧장 자신을 안겠다고 선언해왔다.

    그리고 펠리시아는, 그런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안겠다는 구원의 말에 내심 기뻐했다.

    그래. 기뻐해버렸던 거다. 바보같이.

    물론 구원의 물건에는 여전히 실비아와의 사랑의 흔적이 잔뜩 묻어있었기 때문에, 그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 살짝 우울해져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보 같게도, 그 우울한 감정보다도 구원이 안아준다는 사실에 기쁨을 더 느끼는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펠리시아는 그런 행동을 했던 거다.

    이까짓 것, 내가 처리해버리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실비아와의 사랑의 흔적이 묻어있는 물건을 온힘을 다해 정성껏 빨았던 거다.

    장담할 수 있는데, 남자의 물건을 그렇게 열심히 빤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적어도 날 안을 때는, 실비아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날 안는 건 그저 필요에 의해서 그럴 뿐이라는 구원의 발언에 상처를 받고 식어버렸지만.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했던 연참을 지금 쓰고는 있는데,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 늦어도 정오에는 올리겠습니다.

    kelslity // 작중에서 보이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나이에 비해 성격이 살짝 애 같은 면이 있죠.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에는 마치 게임이나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고양감, 야겜의 세계에 떨어졌다는 흥분, 남자라면 가지고 있을 모험심 같은 것에 마음을 사로잡혀서 부모님에 관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지내면서 아직까지 부모님에 관한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 않고 지내고 있는 겁니다.

    그 흔한 향수병 같은 것도 안 걸리는 튼튼한 멘탈의 소유자인데다가, 이 세계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이 터지고 있다 보니, 제대로 그런 생각을 할 기회가 없는 것도 한 몫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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