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24화 (60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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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시아의 감정

    "그런데 실비아. 꽤나 빨리 왔네?"

    자신의 몸에서 내 팔을 풀어낸 바넷사가 마부석으로 올라가버리자, 나와 실비아도 곧장 마차에 올라타게 됐다.

    그리고 날 바라보고 정면에 앉은 실비아에게, 내가 처음 건넨 말이 바로 이거였다.

    아니. 나도 알아.

    ‘난 멋진 남자니까 어떤 대화를 하려는 건지 이 자리에선 묻지 않겠어.’

    ‘내가 알아야 할 얘기라면 실비아가 스스로 얘기해주겠지.’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똥폼을 잡았던 주제에,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젠 또 대화 내용을 추궁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그런 거 아니라고. 진짜로 대화 내용을 캐물을 생각은 없어.

    다만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야.

    내가 마차 앞에서 바넷사와 대화를 나눈 건 정말로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실비아가 돌아온 거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만약 실비아가 펠리시아의 방에서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가정하더라도, 펠리시아와의 대화시간이 채 5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 문 앞에서 기다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아예 먼저 가 있어달라고 부탁을 한 거다.

    대화가 오래 걸리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고. 그러니까 문밖에서 기다리던 내 귀에 대화소리가 흘러들어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 거라고 봐야겠지.

    그렇게 중요하고 비밀을 요하는 대화면서, 대화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는다.

    살짝 궁금해질 만도 하잖아? 그러니까 간단한 질문을 던져봤을 뿐이라고.

    아, 그래도 실비아가 말하기 싫은 것 같으면 대화 내용은 캐묻지 않을 거니까 말이야! 난 멋진 남자니까!

    "별 얘기 아니었나봐?"

    "그, 그게…. 그냥…대화가 빨리 끝났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실비아는 내 질문에 애매모호한 답변만을 남기며 살짝 내게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별 일 아니었다고 얼버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비아의 올곧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펠리시아와 나눴던 대화는 실비아에게 있어서 별 일이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 내게 있어서도.

    실비아의 반응을 보고 나니 나는 더더욱 실비아와 펠리시아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졌다.

    "그래? 빨리 끝나서 다행이네. 오늘도 저녁식사 시간에 늦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혼날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이상 캐묻지는 않고, 그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대화를 마쳤다.

    왜냐하면 실비아의 표정이 말이야. 제발 그 이상 묻지 말아줬으면 한다는 듯 간절해보였거든.

    게다가 마치 해선 안 될 짓을 한 사람처럼 죄악감에 잔뜩 물들어있기까지 해서, 오히려 질문을 한 내가 더 미안해질 정도였다.

    실비아의 표정을 그렇게 해석했으면서, 불안해하지는 않는 거냐고?

    전혀. 실비아가 내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장담할 수 있는데, 실비아의 저 죄악감은 자기 혼자 멋대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뭣하면 내기를 해도 좋다.

    아마 실비아가 펠리시아와 무슨 대화를 한 건지 나중에 내가 알게 되더라도, 분명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겠지.

    그런 실비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굳이 대화내용을 추궁하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펠리시아 그것이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한 건 아닌지는 조금 불안하지만 말이야.

    애초에 먼저 할 말이 있다며 실비아를 불러 세운 것도 펠리시아고.

    하지만 뭐, 펠리시아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했다 하더라도, 상대는 펠리시아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실비아다.

    정말로 펠리시아가 내게 해가 될 수작을 부리고 있다면, 실비아가 알아서 잘 대처를 하겠지.

    "당연합니다. 만약 저녁 식사 시간에 늦더라도, 명백히 구원님의 잘못이니까요. 실비아님의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던 바넷사에게도 우리의 대화 내용이 들렸던 건지, 마부석 쪽으로 뚫린 창문을 통해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게 왜 내 잘…못도 뭐 없다곤 못하겠지만 말이야! 너 너무 냉정한 거 아니냐?! 만약 내가 혼날 상황이 오면 조금쯤은 감싸주라고!"

    "싫습니다."

    "진짜냐. 너 정말 그러기냐.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기냐."

    "집사로서 사실만을 보고할 의무가 있으므로."

    거짓말 하지 마라, 이것아!

    아니. 집사로서 그래야 되는 건 맞겠지만 말이야!

    넌 그냥 나한테 삐져서 내가 혼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뿐이잖아!

    애초에 정말 그런 이유로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싫습니다.’ 라고 말할 게 아니라 ‘안 됩니다.’ 라고 말해야지 이것아.

    아까 출발하기 전에 나눴던 대화로 화 다 풀린 거 아니었냐고.

    아니. 그야 화 풀렸다는 소리를 한 적은 없지만 말이야.

    하여간 은근히 속이 좁은 녀석이라니까.

    아무튼 그렇게 나와 바넷사가 투닥투닥 거리는 와중에도, 실비아의 표정은 풀어지는 일 없이 죄악감을 채 지우지 못 한 채로 내 모습을 살짝 엿보고 있었다.

    진짜냐. 이런 분위기에서도 표정이 안 펴지는 거냐.

    이래 봬도 실비아의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일부러 바넷사랑 장난친 건데 말이야. …정말이라고?

    하지만 이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조금 억지스런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으로 실비아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할까.

    "실비아."

    "네, 네엣…?"

    내가 그 머리에 손을 턱 올리고 이름을 부르자, 실비아가 살짝 몸을 움찔하더니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그런 실비아를 보면서, 일부러 굳은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펠리시아가…나 몰래 다른 남자랑 같이 잠자리라도 가지자고 꼬드기던?"

    "……?"

    내 말을 들은 실비아는, 처음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뇌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 눈을 크게 뜨고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네, 네헤에에엣?! 아, 아니,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아닙니다! 절대! 절대 그런 얘기 아니였습니다아! 저, 저흰! 저흰 단지! 그러니까!"

    "괜찮아. 무슨 얘기를 했는지까지는 말 안 해도. 그냥 그게 아니라는 것만 알면 충분해."

    깜짝 놀라서 소리치는 실비아를 진정시키듯 그 머리에 얹은 손으로 토닥여주며, 나는 표정에 힘을 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실비아. 나는 말이야. 이래 봬도 내 여자한테는 따뜻한 남자란 말이야."

    "네, 네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실비아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난 널 전적으로 신뢰해. 네가 나한테 뭔가 해가 될 일을 할 애가 절대 아니라고 말이야. 아니. 설령 그런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내게 뭔가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난 반드시 용서할 수 있어. 방금 말했던 그런 식의 잘못만 아니라면 말이야."

    "구, 구원니이이임…."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 실비아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감동에 의한 것이다.

    아까 전까지 느끼고 있던 죄악감은 드디어 조금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런 실비아를 바라보며,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줬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부끄럽다. 나도 오글거리는 멘트를 날렸다는 자각은 있다고.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 실비아가 그렇게 풀죽은 표정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계속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잖아.

    "혹시 ‘지금 네가 나한테 다른 사람이랑 자는 건 용서 못한다고 말하는 거냐?!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양심은 있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만약 그런 생각하고 있으면 속으로만 해줘. 양심 엄청 찔리니까. 직접 들으면 내 연약한 마음이 버텨내질 못할 거야."

    때문에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 곧장 가벼운 말투로 농담을 던졌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런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찌 그런…!"

    물론 우리 귀여운 실비아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붕붕 흔들며 필사적으로 내 농담을 부정해줬다.

    "그럼 그냥 내 관대함에 감동만 했다는 걸로 오케이?"

    "오, 오케이입니다!"

    "좋아! 그럼 내 품에 안겨! 자!"

    "히이익! 지, 지금은 무리입니다아!"

    내가 팔을 벌려서 정면에 있는 실비아를 껴안으려 하자, 실비아는 재빨리 몸을 날려 내 팔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

    "아, 아닙니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지, 지금은 그게! 너무 감동해서! 버, 버틸 자신이…. 우, 우으으…에잇! 히우으으응…."

    그런 실비아의 행동을 보면서 내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짓자, 실비아는 필사적인 표정으로 그렇게 변명을 했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고는 결심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더니, 내 소매를 붙잡고 그대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아니. 실비아야. 그런 오글거리는 멘트에 그렇게까지 감동해준 건 고마운데 말이야. 너 거기서 더 내성이 약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부탁인데 적어도 내가 실비아테라피를 만끽할 수 있는 수준의 내성은 유지해줘.

    이미 실비아테라피에 중독된 나로서는, 더 이상 그게 없으면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아무튼 아무래도 지금은 실비아를 껴안고 있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실비아테라피는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아까부터 뒤통수에 느껴지던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역시나 바넷사가 마부석 쪽에 난 창 너머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엄청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아니. 너 운전 중이잖냐. 앞을 보라고.

    그야 대로고, 일자로 쭉 뻗은 외길이고, 주변에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말이야.

    "뭔가 할 말이라도?"

    "그래 보입니까?"

    ……. 이게 말이야 방구야.

    어. 응. 엄청 할 말 있어 보여.

    아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대충 예상은 되지만 말이야.

    "참고로 말해두는 데 말이야."

    "네."

    "아까 내가 실비아한테 말했던, 양심 찔리니까 그런 생각하면 속으로만 해달라던 말 말이야. 그거 실비아한테만 적용되는 말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바넷사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드디어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물론 표정도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표정에서 희미한 감정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냐?! 진짜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고?! 아오! 이걸 콱 진짜!

    이래 봬도 나도 양심의 가책은 느끼고 있다니까?! 뭐냐?! 그 알면 됐다는 표정은?!

    가슴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래도 내가 우리 애들이 그런 짓을 하는 건 절대 용납 못하면서 난 다른 여자들을 안고 다닌 건 사실이다.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말들을 전부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

    "야. 바넷사 너 말이야."

    "네."

    내가 말을 걸자, 바넷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똑바로 정면만을 바라본 채 대꾸했다.

    "내가 이런 성격 아니었으면 너도 내 여자는 못 됐다는 건 알고 있는 거지?"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방금 전까지 대답을 잘 하던 바넷사가 갑자기 침묵했다.

    아니. 이것아. 자기가 불리할 때만 침묵하는 거, 진짜 안 좋은 버릇이라니까 그러네.

    항상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이번에야 말로 그 사실을 똑똑히 알려주겠어.

    "바넷사? 바넷사양? 들려? 들리십니까? 내가 이런 성격 아니었으면 바넷사양도 저랑 사귀지 못했을 거라니까요? 그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듣고 계시면 뭔가 한 말씀 해주시죠? 네? 바넷사씨?"

    "…구원님."

    내가 창 너머로 끈질기게 말을 걸자,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던 바넷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반응했다.

    "응. 뭔데?"

    나는 그런 바넷사에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답변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 예상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운전하는데 방해됩니다."

    "아니! 너! 무슨! 지금 대로를! 아오! 왜 이 타이밍에 좁은 길로 들어서는데?!"

    설마 이 타이밍에 또 저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억울함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이대로 또 얼버무려질 순 없어!

    "야! 너 아무리 그래도…!"

    "죄송합니다. 좁은 길에서 사고가 나면 위험하므로."

    하지만 내가 뭔가 말할 새도 없이, 바넷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 뒤로 손을 뻗어서 창문을 탁 닫아버렸다.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내 이 마음은 갈 곳을 잃고 헤매게 되어버렸다.

    결심했어. 다음번에 쟤를 안을 때는 무조건 능욕으로 간다.

    속으로 그렇게 단단히 다짐하는 나였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 갈 곳 없는 분노가 진정되는 건 아니었다.

    "저, 저기 구원님…. 우, 우으…에잇!"

    그리고 그런 날 보고는, 실비아가 두 팔을 벌려 안기고는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후우. 진정된다. 응. 그래. 내가 너무 쓸데없이 열을 냈어.

    바넷사 쟤도 부끄러워서 그런 거니까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응. 그럴 수도 있어.

    게다가 아직 사도 임명도 안 했는데 능욕같이 강한 플레이는 너무 심하지? 어쩔 수 없군. 봐주도록 할까.

    오늘도 실비아테라피의 효과는 발군이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이틀을 쉬게 되어 죄송합니다.

    as센터에서 노트북의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홧김에 오늘 연차내고 용산에 가서 컴퓨터나 한 대 맞춰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번 달 생활비가….

    아무튼 컴퓨터 장만하고 세팅 끝나자마자 바로 한 편 써서 올립니다.

    원래 컴퓨터 한 대 맞추면 고사양 게임이라도 하면서 성능 테스트를 해봐야 하는데 요즘은 게임할 시간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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