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10화 (594/1,205)
  • 610====================

    아라크네 클랜의 함정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침묵을 유지한 채 마차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딱히 바넷사가 화내는 게 무서운 건 아니라고.

    하지만 바넷사의 기분도 좀 헤아려줘야 되지 않겠어?

    내 여자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바넷사 앞에서 또 새로운 여자를 꼬드기려고 시시덕대는 장면을 보이는 건, 확실히 내가 좀 경솔했다.

    뭐, 엄밀히 따지면 레이첼 누님을 꼬드기려고 한 건 바넷사가 고백하기 전부터의 일이기도 했고, 이번에는 오해를 풀기 위해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바넷사의 기분이 나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니, 나는 바넷사의 기분을 헤아려서 가만히 있어주기로 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마차는 디아나의 마차.

    바넷사 말대로 괜히 사고라도 났다가는 괜히 디아나의 명성에 흠이 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음. 안전운전 중요하지.

    그런 고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고급 주택가에 접어들게 되었을 때, 거대한 저택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저택을 본 순간, 나는 할 일이 하나 생각났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이왕 온 김에 인사도 할 겸 들러서 처리하고 가는 게 좋겠지. 어차피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고.

    "바넷사. 여기서 멈춰줘."

    "…방해된다고. 말했습니다만?"

    하지만 내가 멈춰달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바네사가 목소리에 힘을 잔뜩 주면서 내 쪽을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여기서 내려달라고."

    "…여기서 말입니까?"

    내가 제대로 말을 하자, 그제야 바넷사는 마차의 속도를 서서히 줄이면서 내 쪽을 돌아봤다.

    마부석 쪽으로 뚫린 조그만 창가에 너머로 보이는 바넷사의 얼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해 보였지만, 한편으론 어딘가 쓸쓸하게 보였다.

    "아니. 너랑 같이 마차타고 가는 게 심심하다든가, 그런 게 아니야. 오히려 엄청 즐거워. 할 수 있으면 계속 이렇게 둘이서 같이…."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습니다만."

    어, 어라? 아니야? 그럼 방금 그 약간 쓸쓸해보였던 무표정은? 그냥 내 기분 탓?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런 말을 내뱉는 바넷사의 표정은 살짝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이번엔 내 기분 탓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니래도. 진짜로 볼 일이 있어."

    "여기에 말입니까?"

    "그래! 여기…."

    그렇게 말하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목적지를 손가락질한 나는, 창 너머에 비친 광경을 보고 말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바로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 하우스.

    그리고 거기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노출도가 있는 털털한 복장의 섹시한 경비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그 수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았다. 그리고 다들 한결 같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

    야. 적어도 왜 존댓말이냐고 딴죽이라도 걸어주지 않으련?

    침묵이 제일 무섭다고.

    "말해두는데, 그냥 저기 클랜장에게 볼 일이…그러니까 그런 볼 일 말고! 제대로 된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아직 안 했단 건 지금부터 할 거란 얘기잖아!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 너 나 못 믿어?!"

    "아뇨. 그냥 장난이었습니다."

    "거짓말 마라! 완전 진심이었던 주제에!"

    무지막지하게 진심으로 의심하는 눈이었어! 이번에도 절대 내 착각이 아니야!

    "아무튼 난 여기서 내린다. 먼저 가."

    "오래 걸리는 용무인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이게 진짜 아직도 의심을 못 거두고 유도신문을 하려고 하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말할 뻔 했잖아!

    "고작 여기서 저택까지 마차 타고 가려고 널 기다리게 만들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냥 그뿐이야."

    "그렇습니까. 전 별로…."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바넷사는 살짝 눈에 힘이 풀리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뒤에 이어질 말이 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던 나는, 드디어 전세역전의 찬스가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별로 뭐? 날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볼 일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내리시죠."

    물론 바넷사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줄 상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이미 흐름은 내 쪽으로 넘어왔다!

    "아니. 잠깐만. 얘기는 끝까지 다 듣고 내려야지. 뭔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해봐. 응? 응?"

    "이럇!"

    "으악! 야! 알았어! 내릴게! 내리면 되잖아!"

    얘 지금 진짜로 그냥 출발하려고 했지?!

    하여간 농담이 안 통한다니까. 고분고분하게 귀여운 말 좀 해주면 어디 덧 나냐?!

    "아무튼 그럼 이만. 네가 정 기다리고 싶으면…."

    "이럇!"

    아니. 그러니까 말이라도 좀 끝까지 듣고 가라.

    내가 마차를 내리기가 무섭게, 바넷사는 절대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마차를 몰고 갔다.

    쟤 말이야. 나한테 고백하고 내 여자가 되기로 한 애 맞지?

    사도 임명인가? 사도 임명을 안 한 게 문제인 건가?

    아니. 사도 임명이 무슨 성격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저건 그냥 성격 문제인가.

    뭐, 둘이서 노닥거리는 분위기가 되면 또 그땐 내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상관없지만 말이야.

    내 여자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전이랑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 바넷사의 태도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나는 일단 아라크네 클랜에서 볼 일부터 마치기로 했다.

    "야! 진짜다. 진짜로 이리로 온다!"

    "숨어! 너희는 왜 나와 있어?! 훈련은 어쩌고?! 됐어! 아무튼 빨리 숨어!"

    그리고 내가 아라크네의 클랜 하우스에 접근하자, 정문 근처에 모여서 날 주시하고 있던 여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숨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이미 진작에 다 알고 있었거든?

    아무튼 나 한명 접근한다고 저렇게나 술렁거리는 걸 보니,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나 뭔가 저질렀던가?

    내가 요즘 많이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내 유명세에 지대한 공헌을 한 건 바로 그 교육용 영상이다.

    즉, 굳이 교육용 영상이 필요 없는 모험가들까지 저렇게 날 보고 환호할 일은 없다는 거다. 실제로 모험가들은 나에 대한 반응이 일반인에 비해 시큰둥한 편이었고.

    뭐, 유명세에 따른 효과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지.

    …어라? 혹시 모험가들이 지금까지 날 보고 시큰둥했던 건, 주위에 우리 애들이 견제하고 있어서 그런 척 했을 뿐?

    사실은 나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엄청 인기인이야?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무튼 내가 다가가자, 처음부터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날 막아서며 힘차게 질문했다.

    물론 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앨리시아를 만나러 왔는데요."

    "꺄아아아악!"

    그리고 내 대답과 동시에, 뒤에서 새된 환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뭐야?! 뭔데 그래?!

    아니. 그보다 너희들 숨는 거 아니었냐?

    "앨리시아님 말씀입니까?"

    심지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비병마저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다는 듯 입을 꿈틀거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날 쳐다봤다.

    "네? 네. 그런데요? 혹시 없어요?"

    "아, 아뇨! 아닙니다!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어디 가지 마시고 꼭 여기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금방 얘기를 전하고 오겠습니다!"

    던전을 나오면서 앨리시아와 대화를 나눴던 게 벌써 며칠 전이다.

    안 그래도 그 삼인방을 엄청나게 굴려대는 앨리시아니 혹시 또 금방 던전에 간 건가 싶었지만, 다행이도 아직 던전에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경비병은 어째선지 내게 떠나지 말도록 신신당부를 하고는, 곧장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아니. 경비가 직접 그래도 되는 거냐?

    뭐, 어차피 여기 숨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대놓고 날 엿보는 사람들이 엄청 많으니까 별문제는 없겠지만 말이야.

    구경꾼들은 숨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내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자기들끼리 뭔가를 떠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내가 주워들은 말이 바로 이거였다.

    "드디어 앨리시아님에게도 봄이?!"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지금까지 일들이 전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 응. 과연. 그런 거냐.

    여기 클랜 사람들이 날 보고 유독 소란스러웠던 것도, 경비병이 그런 말을 하고 서둘러 들어갔던 것도 전부 말이다.

    하지만 착각을 해도 그런 착각을 하다니.

    뭐, 확실히 내가 여기 클랜 사람들 중에서는 유독 앨리시아하고만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앨리시아는 뭐, 일단 생긴 건 미인이고,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선남이다.

    주변에서 보면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 커플로 보였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가 주변에 있는 미인들은 전부 내 여자로 만들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앨리시아는 아니지.

    나도 그렇게까지 아무한테나 막 손을 뻗는 게 아니라고. 이래 봬도 진짜 반한 상대한테만 손을 뻗는다니까?

    "앨리시아랑 나랑 그런 관계 아닌데 말이야."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착각에, 나는 저도 모르게 그만 입 밖으로까지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소란스럽던 주변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정적에 감싸였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조용해지면 무서운데.

    뭔데? 대체 왜 그렇게 심각한 반응인데?

    그야 앨리시아 걔가 생긴 것과는 달리 남자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어서…응. 생각해보니 심각한 일 맞네. 너희가 그렇게 들떴던 이유가 있었구나. 미안. 아무리 그래도 난 아니야.

    "아니. 그게 말이죠. 앨리시아 걔 따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던데요."

    숨 막히는 침묵을 버티기 힘들어진 나는, 마치 누구에게 변명이라도 하듯이 허공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짓말은 아니다. 전에 나한테 그렇게 놀려지면서까지 여자다운 행동을 연습하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분명 마음에 둔 남자가 있기는 있는 거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주위를 짓누르는 숨 막히는 정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결국 구경꾼들의 시선을 피하듯 땅을 바라보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크, 크흠! 뭐야? 무슨 일이냐?"

    그리고 그렇게 기분 나쁜 정적이 흐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저택으로 들어갔던 경비병이 직접 앨리시아를 대동하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앨리시아!"

    "우앗! 뭐, 뭐야! 새끼야! 갑자기 달라붙고! 떠, 떨어져!"

    "아니. 미안. 반가워서."

    "크, 크흠! 며칠 전에 봤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어디 조용한곳 없냐? 단둘이서 얘기할 수 있는 곳."

    "뭐, 뭐?! 그, 그게 무슨…!"

    "아니. 여긴 조금…그래서, 없어?"

    "따, 따라와!"

    솔직히 그냥 전에 있던 일을 설명만 하면 끝이니 여기서 얘기하고 헤어져도 별 문제는 없었겠지만, 지금 여기는 너무 분위기가 침울하다.

    모두가 앨리시아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고.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건 앨리시아뿐이다.

    그런 고로, 나는 앨리시아를 유도해서 이 장소를 벗어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저택 내부.

    바로 앨리시아의 집무실 같은 곳이었다. 집무실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은 이유는, 얘가 진짜로 여기서 일을 하기는 할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별 뜻은 아니고 말이야.

    얘는 딱 봐도 육체노동 전문이잖아?

    "그, 그래서? 크, 크흠! 굳이 둘만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한 이유가 뭔데?"

    앨리시아는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면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상당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거기는 지금 네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서 그랬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얘기할 수 없겠지.

    말했다간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얘한테 내 입이 찢어질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게 말이지. 거기 조금 사람이 많았잖아? 왠지 다들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조금 불편해서 말이야."

    그래서 나는 머리를 살짝 더 굴려서 진실 아닌 진실을 대답하기로 했다.

    "무, 무, 무, 뭐어어어?!"

    "그래. 나도 알아.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안 그래?"

    "으, 으핫! 으하하핫! 그,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럴 리가 없지! 하핫! 너 같은 병아리랑?! 내가?! 응?! 하핫! 어떤 녀석들이 그랬는데?! 걸리기만 해봐! 하, 하핫! …찾아내서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앨리시아는 황당하기 그지없단 표정으로 웃으면서 내 등을 팡팡 때리더니, 마지막엔 야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따! 따갓! 아파! 아파! 아얏! 아, 아니. 어떤 사람이 그랬는지는. 아무리 기분 나빠도 그렇지 살인은 안 되잖아. 살인은."

    그리고 그 미소를 보면서, 나는 등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앨리시아를 뜯어 말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랑 그런 관계라고 오해 받는 게 그렇게 싫냐?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연참은 3시쯤에 합니다.

    신판타지 // 아직 써 본지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 허리는 확실히 편해졌습니다.

    오래 앉아있어도 허리에 통증이 생기지 않네요.

    제품명은 죄송합니다. 이 글도 돈을 내야 읽을 수 있는 글인 만큼 상품명 같은 걸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지 잘 판단이 서지 않네요.

    정 궁금하시면 쪽지를 보내주시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