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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09화 (59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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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첼의 사정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어쩜 좋아!"

    "누님 진정하세요. 지금부터라도 빨리 준비하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네. 아니. 지각이면 지금이라도 빨리 준비해서 가야하는 게 맞잖아요."

    "그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누님은 날 보면서 왜 모르냐는 듯,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방금 전에 지각이라고 누님 스스로가 그렇게 외쳐놓고는, 이제 와서 지각이 문제가 아닌 것처럼 반응하는 건 대체 무슨 뜻이지?

    "모르시겠어요?! 어제 그런 식으로 조퇴하고, 어제랑 같은 옷으로 지각까지 하면…!"

    아, 아아…. 누님이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누님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즉, 물론 지각도 문제지만, 지각을 해서 일어날 여파가 더 문제라는 거다.

    그야 분명 사람들이 뒤에서 엄청 수군거리기는 하겠지.

    하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다 큰 성인 남녀가 관계를 가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특히나 이 세계에서는 더더욱 말이야.

    뭐, 우리가 어젯밤에 같이 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은근히…라고 할까 대놓고 연애 내성이 없는 누님이었다.

    "…제가 같이 가서 대신 총알받이라도 돼줄까요?"

    사태를 파악한 나는 살짝 흐뭇한 기분이 되면서도 속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그런 제안을 던져봤다.

    어제 내가 잠깐 혼자 안내원석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런 소동이 일어났으니, 분명 내가 같이 가면 누님보단 내 쪽에 더 이목이 집중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 그러지 마세요! 괜히 더 창피하잖아요!"

    하지만 누님은 제발 그만 두라는 듯 두 손을 맹렬하게 휘저으면서 날 뜯어말렸다.

    내 제안 역시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라는 듯이 말이다.

    "창피하다니…누님은 제가 창피하세요?!"

    그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인 나머지, 나는 그만 저도 모르게 우리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장난을 쳐버리고 말았다.

    "아,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 해놓고 아차 싶었지만, 다행이도 누님은 내 장난에 그대로 넘어가줬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는 오히려 누님이 대놓고 길드 안에서 내게 달라붙어있었으니,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는데 말이야.

    역시 어제는 무사한 날 보고 안심한 나머지 주변 눈도 신경 안 쓰고 그렇게 행동해버린 것뿐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런 누님의 반응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이 기세를 더 이용해보기로 했다.

    "아니면 뭐에요! 전 누님과 그런 소문이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니! 오히려 내가 나서서 더 소문을…!"

    "꺄아악! 꺄아아악! 그, 그러니까 그만 두시라고요! 책임지실 거예요?!"

    "네? 아니. 책임은 원래 질 생각이었는데요."

    누님은 별 생각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은 모양이었지만, 나로선 책임질 거냐는 말 자체가 당황스러웠다.

    우리 관계는 애초에 내가 책임지겠다고 누님을 꼬드기고 있는 상황에서 누님이 거절하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그만 반사적으로 정색하고 대답을 해버렸는데, 그게 또 누님에겐 먹혀들은 모양이었다.

    "그…! 우으으읏! 우으으읏!"

    누님은 발을 아까보다 더 심하게 동동 구르면서, 얄밉다는 듯이 날 노려봤다.

    분명 어제와 마찬가지로 화를 내고 있는 상황인데도, 어제와는 달리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귀여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 놀릴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아직 어제 일의 해명은 안 끝났고 말이야.

    "알았어요.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우선은 출근 준비부터 해야죠? 누님은 씻고 준비하고 계세요. 제가 얼른 가서 마차를 준비시켜 놓을 게요."

    나는 일단 여기선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하고, 그렇게 말한 후 누님의 방을 뒤로 했다.

    그리고는 마차를 준비시키기 위해, 곧장 바넷사가 있을 식당으로 향했다.

    "바넷…! 말해두는데. 오해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간 순간, 전 방위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을 통해서 나는 곧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테이블을 보아하니 다들 이미 식사는 끝마친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여기 올 걸 예상하고 있다니. 똑똑하군.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너희 전부 눈으로 말하고 있거든?! 진짜라니까! 못 믿겠으면 레이아가 직접 냄새라도 맡아보면 되잖아! 아무튼 바넷사! 레이첼 누님이…레이아?! 진짜로 냄새 맡게?!"

    괜히 약한 척을 하면 오해를 살뿐이다. 나는 일부러라도 세게 나가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원래 목적대로 바넷사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레이아가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서는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 후훗. 아니요. 전 구원씨를 믿어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레이아는 내게 다가오며 포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대체 나한텐 뭐 하러…?"

    "그치만, 모처럼 구원씨에게 달라붙을 기회가 생겼는데 놓치면 손해잖아요."

    그리고는 의아해하는 내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천사 같은 답변을 속삭여주신 후, 그대로 내 몸을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천사다. 천사가 여기에 있어.

    "잠깐! 레이아! 치사해요!"

    "네? 전 그냥 냄새를 맡는 것뿐인걸요? 응.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나 봐요. 꼬옥 끌어안기만 하고요."

    …천사님. 일단 진짜로 냄새를 맡긴 맡는 겁니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정확히 맞출 때마다 살짝 무서워진다니까.

    이런 능력이 천사님한테 있었으니 망정이지.

    "거짓말 마요! 속삭이는 거 다 들었거든요!"

    그리고 귀가 좋은 사라는 레이아의 속삭임을 또 들었던 건지, 그렇게 외치고는 내게 달려들었다.

    "야. 넌 또 왜 붙냐."

    "뭐야?! 레이아는 괜찮고 난 안 된다는 거야?!"

    "아, 아뇨. 이왕 끌어안을 거면 좀 더 꽉 끌어안으시라고…으다다다! 아파! 아파!"

    "하여간 이 바보는. 레이아 가슴만 닿으면 헤벌쭉해져서는."

    "사라양도 치사한 건 마찬가지일세!"

    "그래요! 그래요!"

    불평을 하고 싶은 건 난데 오히려 내가 불평을 들어버렸다.

    뭐, 됐어.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내게 달라붙어있는 사라를 보고 이번엔 디아나가 질투하면서 달라붙으려 하고, 그걸 보고 은근슬쩍 동조하며 마틸다까지 달라붙으려 하자, 나는 더 이상 얘들을 말리긴 포기했다.

    그냥 달라붙는 대로 그냥 전부 받아주면서, 나는 시선을 바넷사에게 고정시켰다.

    아, 그 전에 실비아야. 괜히 주위 사람들한테 휩쓸려서 너까지 달라붙으려고 안 해도 되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죽음을 각오한 표정으로 다가오지 않아도 된다. 이것아.

    안 그래도 아까 전에 호되게 당했으면서 말이야.

    아니. 그걸 당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바넷사. 레이첼 누님께서 늦잠을 자셔서 말이야. 출근 시간이 지난 모양인데 미리 마차를 준비해줄 수 있겠어? 아, 그리고 이왕이면 가면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것도 부탁할게."

    "……."

    내 부탁에도 불구하고 바넷사는 날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바넷사?"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한 번 더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바넷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끝을 돌려 식당을 빠져나갔다.

    쟤 설마 질투한 거야?

    아니. 야. 집사님. 방금 레이아의 발언으로 내 오해도 다 풀렸을 텐데 그 반응은 아니지 않냐?

    그야 질투해주는 건 기쁘지만 말이야.

    바넷사의 반응에 뭐라 말하기 힘든 감상을 품으면서도, 나는 일단 할 일을 끝마쳤다는 충실감을 느끼며 일단 뭐라도 좀 주워 먹기로 했다.

    "…그래서. 구원씨는 왜 같이 오시는 건가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러서 지금은 마차 안.

    나는 레이첼 누님과 함께 길드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있었다.

    분명 같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따라온 나를, 레이첼 누님은 살짝 원망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 속에서는 희미하게나마 기쁨의 감정도 엿볼 수 있는 게 또 귀여우셨다.

    누님도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따라오는 게 싫지만은 않은 건가.

    "그야 어제일의 해명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요."

    "그건…이제 됐어요. 어차피 착각했던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아뇨. 그럴 순 없죠. 그게 어떻게 누님 잘못이에요. 착각하게 만든 제 잘못이죠. 그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런 착각을 했을 걸요?"

    "……."

    "사실 요즘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서, 디아나하고도 같이 잔지 조금 오래 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어제 오랜만에 디아나랑 같이 자게 돼서, 디아나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마음에 괜히 안달해서 그렇게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끌고 간 거였어요. 죄송해요."

    내가 그렇게 사과하자, 누님은 살짝 실망한 것 같은, 한편으론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 굳이 절 데려가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서 헤어졌어도 되는 것 아니었나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뭔가 기대하는 게 있는지, 마치 매달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난 이미 누님을 만족시킬만한 답변을 준비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게 말이죠. 디아나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누님이랑 조금이라도 더 오래있고 싶기도 했거든요. 어차피 집에 가더라도 곧장 디아나랑 둘이서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같이 식사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요. 그러니까 미안해요.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

    내가 누님의 손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누님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누님?"

    대답이 없는 누님에게 살짝 불안해진 나는,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누님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누님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누님?"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누님에, 더더욱 불안해진 나는 결국 몸을 숙여서 아래로부터 그 얼굴을 엿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누님의 두 손에 가로막혀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정확히는 두 눈을 틀어막은 누님은 갑자기 당황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아앗! 바, 바넷사씨! 여기면 되요! 여기서 세워주세요!"

    살짝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느낌도 없잖아 드는 말투였지만 말이다.

    "네? 하지만 길드까지 가려면 아직 조금 더 가야합니다만."

    "그, 그게…다들 구원씨가 디아나님과 같이 사시는 걸 아는데, 거기까지 이 마차를 타고 가는  건…아, 아무튼 여기면 됐어요! 여기부턴 제 발로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누님의 부탁에 눈치 빠른 바넷사는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마차를 세웠고, 누님은 그대로 내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얼굴을 돌린 후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전 여기서!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네? 잠깐! 누님! 어제 일은 용서해주신…!"

    "그럼 다음에 봐요! 구원씨는 절대! 절대 따라오시면 안 돼요!"

    나는 황급히 누님을 불러 세우고 사과를 받아주신 건지 확인하려 했지만, 누님은 그렇게 외치고는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절대 따라오지 말라니. 아니. 뭐, 내가 따라가면 그야 시선을 집중할 테니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뜻으로 따라오지 말라고 한 거 맞겠지?

    "사과, 제대로 받아주신 거 맞겠지?"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내 중얼거림에 대답하는 건, 평소보다 더 굳어진 것처럼 들리는 바넷사의 목소리뿐이었다.

    하지만 바넷사의 그 반응을 보고, 나는 살짝 안심할 수 있었다.

    얘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내가 레이첼 누님과 잘 됐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난 눈이 막혀있는 바람에 레이첼 누님의 반응을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바넷사가 봤을 땐 잘 된 모양이다.

    "에이. 넌 또 왜 그러냐. 질투하냐?"

    안심한 나는 마부석 쪽으로 뚫린 조그만 창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돌아가는 동안 바넷사와 장난이나 치기로 했다.

    "핫."

    "어라? 답지 않게 리액션이 큰 거 보니까 진짠가 본데? 잠깐 마차 멈춰봐."

    "싫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나도 마부석에 가서 앉게."

    "오지 마십시오. 좁습니다."

    "얘가 또 싫은 척 한다. 자기도 내심 좋으면서."

    "방해됩니다."

    "그러지 말고 멈춰 보라니까? 안 그러면 나 그냥 이대로 마부석에 간다? 위험해질 수 있다고?"

    "위험한 거 아시면 가만히 계십시오."

    "자, 지금부터 간…."

    찰싹!

    내가 진짜로 마차 문을 열고 마부석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바넷사가 들고 있던 채찍을 강하게 휘둘렀다.

    당연히 마차의 속도는 빨라졌고, 문을 열었던 나는 하마터면 마차에서 떨어질 뻔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내가 다칠만큼 연약한 놈은 아니지만 말이다.

    "야! 너 뭐하냐?!"

    그래도 일단 항의를 하자, 바넷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럼. 그래야지. 자기도 실은 좋으면서.

    그 틈에 나는 마차를 나서서 마부석으로 옮겨가려고 했지만, 그 전에 바넷사가 고개를 돌려 조그만 창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마부석은 좁습니다. 방해됩니다. 얌전히 계십시오."

    "…네."

    아무래도 바넷사는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미안. 레이첼 누님이랑 잘 풀린 것 같아서 너무 들떴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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