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07화 (591/1,205)
  • 607====================

    레이첼의 사정

    "레이첼 누님. 일어나셨나요?"

    다른 사람 방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하는 건 사람의 기본 도리지.

    아무리 내 집이라고는 하나, 손님이 계신 방에 그냥 들어갈 정도로 나는 못돼먹지 않았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으면 어쩌려고.

    마틸다가 들으면 분노했을 거라고?

    아니. 마틸다하고는 다르지. 내가 마틸다 방문을 그냥 열고 들어갔을 때는 애초에 하러 간 거였잖아. 오히려 옷을 벗고 있는 편이 더 좋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마틸다도 문은 잠그지 않고 있었고. 처음은 몰라도 솔직히 두 번째부턴 마틸다도 기대한 거 아니야?

    그러니 그거랑 이거랑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응.

    "…누님?"

    아무튼 노크를 하며 누님을 불러봤지만, 누님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린 후 재차 노크를 하며 누님을 불러 봐도, 여전히 방문은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상하다. 누님이 이 시간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언제 어느 시간에 길드를 가도 항상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만큼 성실한 누님이다. 이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는 건 이상하다.

    아니. 잠깐만. 애초에 누님은 몇 시에 출근을 하는 거지?

    매일 길드에 갈 때마다 일을 하고 있던 누님이다. 모르긴 몰라도 출근 시간이 엄청 빠르기는 할 테데…. 이거 혹시 진작 일어나서 출근해버린 거 아니야?

    아니. 이유야 어찌됐든 일단 남의 집에서 묵은 거다. 집주인에게 말도 안 하고 그냥 나갈 누님이 아니지.

    나한테는 화가 났으니 아무 말이 없이 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디아나한테는 분명 인사라도 하고 나갈 거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답이 없는 이유는, 역시나 그냥 나한테 아직도 화가 나서 그런 건가?

    그건 그거대로 또 싫은데 말이야.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대로 기다리고 있어봐야 대답을 들을 확률은 없다고 봐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무작정 들어가 버리면 더 화를 내실 테고.

    이거 어쩌면 좋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냐면, 실비아의 방문이 다시 살며시 열릴 때까지 고민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조용했으니, 아마 내가 갔다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없었던 건지, 실비아는 자기 방문을 살짝 열더니 문틈사이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서 주위를 살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게 아닌가 싶었지만, 확실히 이번만큼은 정확한 판단이다.

    실제로 나하고 제대로 눈이 맞아버렸고.

    "안녕."

    "히익! 으아웃!"

    눈이 마주친 김에 인사를 해줬더니, 실비아는 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문을 쾅 닫으려고 했다.

    물론 문틈에 얼굴을 배꼼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문이 닫힐 리가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당황했잖아. 아니. 깜짝 놀라는 거야 이해하지만 말이야.

    "아우…으으읏…."

    있는 힘껏 문을 닫으려고 한 바람에 충격이 상당했던 건지, 실비아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낮게 신음을 했다.

    몬스터의 공격에도 저렇게 고통스런 반응을 보인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기본 방어력이 높다고는 하나, 본인이 스스로 있는 힘껏 문을 닫은 거니까 말이지.

    파티 구성상 서브 탱커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은 실비아지만, 기본적으로 실비아는 공수 밸런스가 잘 잡힌 타입이니 문이 주는 데미지가 상당했을 거다.

    게다가 경황 중에 불의의 일격을 맞은 거나 다름없으니, 치명타까지 터졌을 확률이 높다.

    "야, 야. 괜찮냐?"

    그 모습에 걱정이 된 나는 얼른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과연 실비아도 이번만큼은 나와의 접촉에 떨거나 할 여유가 없었는지, 내가 다가가도 가만히 목을 감싸 쥐고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히야우으으읏…!"

    상처부위를 살피기 위해 실비아의 손을 목에서 치우고 그 길고 하얀 목이 잘 드러나도록 머리 위쪽을 짚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게 만들자, 실비아가 갑자기 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뭐야? 왜…."

    "무, 무리…!"

    내가 무슨 일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실비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다리를 파닥파닥 움직여서 자신의 방 안쪽으로 도망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엉덩이 안 아프냐?

    "뭐야? 혹시 많이 아픈 거야?"

    물론 실비아의 저 반응은 목이 아픈 게 아니라 나와의 접촉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나는 일단 만약을 위해 그렇게 확인을 해봤다.

    "아, 아닙니다아! 젼 괜찮습니다! 이, 이까짓 것! 아아무 문제 업슙니다아!"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런 내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으로 끝이 났다.

    실비아는 목이 아니라 이마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는 필사적인 느낌으로 외쳐댔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진정해라. 의도한 게 아니라고는 하더라도 이마 만져서 미안하니까.

    "…목은 정말 괜찮은 거지?"

    "네, 네헵! 그, 그러니까…그, 그게…."

    내 질문에 다시 한 번 고개를 크게 끄덕인 실비아는 내게 이런 말을 하기 힘들다는 듯 주저하면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오냐. 알았다. 가면 되지. 가면."

    "우, 우으읏…죄, 죄송합니다아."

    "오냐.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레이아나 마틸다한테 가서 제대로 치료 받아라?"

    "네에…."

    상처받은 척 하면서 놀려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또 실비아랑 이러느라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레이첼 누님. 나는 마음속에서 뭉클뭉클 샘솟아 오르는 장난기를 꾹 억누르고 실비아의 방문을 닫아줬다.

    그렇게 실비아와의 해프닝이 끝나고,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래. 일단 들어가 보자.

    의도한 건 아니었다곤 하지만, 누님께 사과하려는 것처럼 방문을 두드리고는 실비아와 노닥거린 거다.

    만약 누님이 방에서 듣고 있었다면 화가 나서라도 뛰쳐나왔을 텐데,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두 가지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방에 있지만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거나, 아예 방에 없거나.

    어느 쪽이든 일단 안에 들어가서 확인을 해본 다음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대로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으면 실비아가 방에서 나올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누님. 저 들어갈게요."

    누님이 내 목소리를 들을 상황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나는, 곧장 누님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이도 문은 잠겨있지 않아서, 손질이 잘 된 고급스런 문은 거의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방 안의 풍경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방안에 있지만 내 목소리를 들을 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맞았지만 말이야. 설마 아직도 자고 있었을 줄이야.

    누님이 워낙 성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설마 이 시간까지 자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니 당연한 거였다.

    애초에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눈 밑에 진한 기미가 생길 정도로 며칠 동안 걱정에 밤잠을 설치셨던 모양이니, 그야 내가 무사하단 걸 확인한 지금은 이렇게 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렇게 푹 잠이 든 누님의 모습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뭐, 그것도 일어나면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는 거지만.

    안심한 건 안심한 거고, 화는 화대로 여전히 나있으실 테니까.

    그래도 역시 일단 깨워서 대화를 해야겠지?

    나는 천천히 누님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평소에는 단정히 모아서 틀어 올리고 있는 아름다운 금발은, 역시 잘 땐 풀어두는 건지 길에 풀어헤쳐져 있었다.

    같은 금발이지만 레이아의 그것과는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레이아의 머리가 진한, 그야말로 황금을 연상케 하는 찬란한 금발이라면, 레이첼 누님의 머리는 좀 더 색이 옅은, 레몬색에 가까운 금발이라고 할까?

    눈을 감고 새근새근 조용히 숨을 쉬며 자는 그 모습은 역시나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만약 안경 같은 걸 쓰면 엄청 잘 어울릴 것 같은 지적인 미인인데도 불구하고 자는 모습은 천진난만해 보인다고 할까, 연상인데도 불구하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일어나 있어도 의외로 애교가 많아서 귀엽지만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길드 안의 조명이 아니라 창가로 비치는 햇살을 받고 있기 때문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길드 안에서만 지내기 때문인지, 이렇게 보니 피부가 병적일 정도로 새하얘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눈가에 기미는 없어졌네.

    이렇게 푹 자는 것만으로도 말끔히 사라지다니. 대체 얼마나 잠을 안 잔 거야. 뭐, 그만큼 날 걱정했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만.

    그럼 지금은 깨우기보다 좀 더 자게 내버려두는 게 나은가?

    원래는 해명을 위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지만, 지금은 우선 레이첼 누님이 더 푹 자도록 내버려두는 게 더 좋아보였다.

    며칠 만에 곤히 잠을 수 있게 된 누님의 안면을 또 내가 방해할 수는 없지.

    게다가 누님이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이 든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실컷 감상이나 하기로 할까.

    나는 누님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 옆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누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어제 디아나와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디아나와 둘이서 밤새 얼굴만 보고 있자고 했던 그 대화 말이다.

    물론 디아나는 내게 어떻게든 한 번 이겨먹으려고 함정을 판 거였지만, 성행위 없이 얼굴만 보고 지냈어도 아마 디아나는 상관없었을 거다.

    몸만이 목적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 거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니까 말이다.

    뭐, 나랑 디아나는 그런 걸 증명할 단계는 진작 넘어섰으니까 별로 의미가 없었지만.

    하지만 레이첼 누님은 다르다.

    아직 누님이 내 여자가 되지 않은 이유는, 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런 연출을 한다면?

    …이거 제대로 먹히는 거 아니야?

    게다가 나에 대한 믿음만 생기는 게 아니라, 화났던 것도 순식간에 풀릴지도.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이 나오는 그 계획을, 나는 당장 실행으로 옮기기로 했다.

    누님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누님의 곁에 최대한 바싹 붙어서 눕고, 금방이라도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여기서 팔베개까지 하면 완벽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면 누님이 깰 것 같고 말이야.

    "으음…하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누님의 예쁜 얼굴을 빤히 보고 있자, 갑자기 누님이 달콤한 한숨을 내쉬면서 내 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구원씨…."

    그리고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누님은 조용하게 내 이름까지 불렀다.

    어? 어? 뭐야 이거? 설마 깨어있으신 거야? 대체 언제부터?

    예상외의 상황에 잠깐 몸이 굳어졌던 나였지만, 이내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침착해. 침착하고 계획했던 대로 행동하자.

    "누님. 일어나셨…."

    "하아…쓰읍…하아…."

    나는 목소리를 깔고 최대한 멋들어진 목소리로 누님께 아침 인사를 하려 했지만, 누님은 그런 내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쌔근쌔근 숨소리를 냈다.

    아니. 쌔근쌔근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숨을 상당히 깊게 내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거…아직 잠들어있는 거지?

    "저…누님?"

    "으응…."

    확인 차 누님의 귓가에 살짝 입을 가져다대어 속삭여봤지만, 돌아오는 건 누님의 살짝 요염하게 들리는 콧소리뿐이었다.

    위험해. 조금 서버렸다. 깨어나면 화를 풀어줘야 하는데, 그런 실수를 할 수는 없지.

    나는 황급히 마나를 돌려 물건을 죽이고, 누님이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걸 이용해서 그 고개 밑에 팔베개까지 해주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누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계획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쓰읍…하아…쓰읍…하아앙…으응…구원씨이…."

    그리고 이 계획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누님이 깰 때까지 내가 제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 된다는 거다.

    아니. 누님. 진짜로 잠들어 계신 거 맞죠? 왜 갈수록 숨소리가 야해지는 것 같죠?

    가슴에 얼굴을 박고 심호흡하는 것도 그만둬 주세요. 그 달콤한 숨이 가슴을 간질일 때마다 미칠 것 같다고요.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디아나랑 한 판 하고 오는 건데.

    디아나 그녀석이 아까 괜히 자극한 바람에 괜히 더 하고 싶어지잖아.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연재 재개합니다.

    예정보다 훨씬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해외직구라는 걸 처음 해봤는데, 설마 이렇게 배송이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고장 난 의자를 곧장 처분하지 말 걸 그랬네요.

    아무튼 거의 2주 가까이 연재를 중단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제 소설을 보느라 노블 이용권을 구입한 분들도 계실 텐데 말이죠.

    그동안 연재를 못한 분량은 내일부터 될 수 있는 한 꾸준히 연참을 해서 반드시 메꾸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연참이 아닌 이유는, 사실 의자 받고 신나서 이것저것 만져보느라 시간을 많이 날려버려서요.

    아루꿍 // 그런가요? 워낙 오래 전 얘기라 제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몇 화에 그런 내용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