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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04화 (58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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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첼의 사정

    레이첼 누님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던전에 간 후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만 가지고 판단해 보자면,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그럴듯하게 보였다.

    게다가 이렇게 심각한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그냥 알고 있는 사람이 해를 입은 게 아니라 레이첼 누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 해를 입은 거겠지.

    솔직히 말해서 누님의 반응만 놓고 생각해 본다면, 사랑했던 사람이 던전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마 누님은 지금까지 살면서 애인 같은 거 없었을 거란 말이지.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같이 레스토랑에 갔을 때 누님이 누님 입으로 직접 그랬잖아?

    나랑 진심으로 결혼을 생각하는 사이이고, 태어나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고.

    물론 누님도 나와 식사 중에 갑자기 디아나를 만나서 패닉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은 아마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누님의 진심이었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아나 역시도 레이첼 누님의 말을 긍정했었잖아.

    레이첼 누님의 어머니, 그러니까 길드장은 디아나에게 반말로 얘기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으니, 레이첼 누님에게 애인이 있었다면 디아나가 그걸 모를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거다.

    하지만 애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체 누구를 던전에서 잃었기에 레이첼 누님이 이렇게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혹시 가족? 아니면 절친한 친구?

    뭐, 나 혼자 이러고 생각해봤자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괜히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말고 집에 가서 디아나에게 물어보자.

    누가 됐든 간에 레이첼 누님과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던전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면 디아나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나는 일단 고민을 미루고, 모처럼 누님과 같이 보내는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 잠깐만요. 누님. 그럼 방금 전에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제게 달려 나와 키스한 것도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무, 물론이죠! 후, 후훗. 구원씨 엄청 당황하시던데요? 어때요? 그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을 며칠 동안 방치했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상당하셨죠?"

    누님은 살짝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내가 질문하는 척하면서 밑밥을 잘 깔아놓은 덕분에 쉽게 낚여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란 말이지.

    "그야 뭐…. 그런데 누님. 진짜로 괜찮으세요?"

    "뭐가요?"

    "아뇨. 저야 누님 만나러 갈 때나 던전에 드나들 때 잠깐잠깐 들르는 게 전부지만, 누님은 계속 거기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오늘 일로 소문이 엄청나게 퍼질 텐데요."

    그래. 진짜 문제는 누님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아니라, 그 여파가 지금부터 상당히 커질 거라는 거였다.

    나도 이제 유명인인 만큼, 나랑 그런 사이라는 게 알려지면 이제부터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텐데 말이야.

    게다가 누님은 안내원.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질문하러 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일이니 더더욱 귀찮아질 거다.

    "아앗…! 겨, 겨우 그런 걸로 걱정하시는 건가요? 후훗. 귀여워라.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전 구원씨와의 관계가 퍼져도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아니면 뭔가요? 구원씨는 저와의 관계가 알려지는 게 부끄러우신가요?"

    누님도 내가 지적한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순간적으로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애초에 길드에서 보였던 그 모습은 연출이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야.

    누님으로서도 내가 너무 걱정된 나머지 일단 저지르고 본 일이었을 테니, 뒷일은 당연히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누님은 내 앞에서 여유를 잃을 수 없다는 듯, 꿋꿋하게 누님다운 태도를 유지했다.

    전에 사라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누님 연애에 초짜라서 혼자 연습이라도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이제 이렇게 애드리브까지 넣을 수 있게 되다니. 많이 발전하셨구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 누님은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시겠지.

    나는 누님에게 티 나지 않도록 혼자 흐뭇해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누님이 그렇게까지 절 좋아하셨다니…."

    "감동했어요?"

    "네. 다시 한 번 반했습니다. 누님. 제 여자가 되어주세요."

    "가, 갑자기 무슨…어, 어차피 첩이 되라는 말이잖아요?"

    "그, 그건…."

    대화의 흐름에 따라 은근슬쩍 그런 말을 하자 누님도 부끄러워하시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렇게 쉽게 넘어와 주시지는 않았다.

    내가 말문이 막히자 누님은 검지를 튕겨서 내 코끝을 살짝 때리더니, 어림도 없단 말투로 대답했다.

    "절 첩으로 들이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요. 며칠 동안 방치해놓고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요?"

    "으윽…역시 안 되는 건가요."

    "당연하잖아요. 누나의 마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고요? 절 첩으로 들이고 싶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믿음을 주지 않으면. 그래. 지금보다도 훨씬. 훨씬 더. 아니면…."

    장난스런 어조로 대답하는 누님이었지만, 마지막만큼은 사뭇 진지함이 느껴졌다.

    아니면…대체 뭐란 건데? 차근차근 믿음을 주는 것 말고도, 누님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네? 아, 후훗. 비밀이에요."

    당연히 그 뒷말이 궁금했던 나는 질문을 던져봤지만, 누님은 스스로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황급히 얼버무리려 했다.

    "네? 잠깐만요! 궁금하게 만들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후훗. 비밀은 여자를 아름답게 하는 법이라고요. 그런 말 몰라요?"

    "누님. 그러지 말고. 네? 네?"

    내게 따져 봐도 누님은 검지를 세워서 그 매력적인 입술에 가져다대고, 더 이상 말해주려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누님의 반응에도 나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너무 아쉬운 주제였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난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척까지 하면서 누님에게 졸라봤다.

    "읏…. 귀, 귀여운척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이게 또 먹힌단 말이지.

    나같이 덩치 산만한 놈이 귀여운 척 하는 게 먹히다니.

    이 세계 여자들 취향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내 매력이 높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참 신기한 일이다.

    "에이. 누니이임. 네? 네? 저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아요."

    "아, 아무리 귀여운척해도 안 된다니까요. 그만하세요!"

    내가 얼굴을 들이밀며 계속 귀여운 척을 하자, 누님은 이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듯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밀치며 외쳤다.

    역시 이렇게 밀어붙여봤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좋아! 그렇다면! 찍기로 맞춰보겠어!

    "쳇. 대체 뭘 하면 되는데 그래요? 뭘 하면 바로 제 여자가 돼주실 건데요? 길드가 가장 붐비는 시간대에 다들 보는 앞에서 공개 프러포즈라도 할까요?"

    "그, 그만두세요! 안 그래도 내일부터 힘들 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진짜 일을 못하게 될 거라고요!"

    괜히 찍었다가 혼만 났다.

    아니. 그래도 이건 혼만 난 게 다행인 건가?

    그냥 되는대로 말해보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레이첼 누님이 공개 프러포즈를 해달라고 했다간…나 분명 살해당한다.

    아직 제대로 프러포즈도 안 한 우리 애들한테.

    "그럼 뭔지 말해주세요! 뭘 하면 바로 제 여자가 되어주실 건데요?!"

    "그러니까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아니면 뭐에요? 제게 믿음을 줄 자신이 그렇게 없나요?"

    "그럴 리가! 두고 봐요. 믿음 팍팍 줘서 나중엔 누님이 먼저 매달리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네. 제발 꼭 좀 그렇게 해주세요."

    누님이 그렇게 대답한 후에야, 나는 결국 누님이 말한 비밀이 뭐였는지는 그냥 얼버무려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하지만 누님이 저렇게 말하는데 믿음을 줄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젠장.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강수를 둬보자!

    "안 믿는 거죠?! 그럼 오늘은 저랑 같이 저희 집으로 가요!"

    "네? 에? 네에?!"

    바로 우리 집으로 가서, 내가 여자들을 끼고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다.

    덤으로 우리 애들이 레이첼 누님한테 좋은 소리라도 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실제로 많은 여자들과 같이 지내면서도 다들 만족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누님도 지금보다는 믿음이 생기겠지.

    그런 의도로 집으로 초대한 거였지만, 누님은 내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 그렇게 갑자기! 아니. 물론 저희가 벌써 몸을 섞은 사이이기는 하지만…아니. 그래도 저도 그게, 몸단장이라든가…."

    누님! 누님! 여유가 없어졌어요! 연애에 통달한 것처럼 누님스러운 태도를 취하던 게 완전히 가면이 벗겨졌어요!

    "무, 물론 이제 시간도 늦었고, 저도 이대로 구원씨와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요. 하, 하지만 그래도 벌써 외박까지 하는 건…."

    부끄러워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누님.

    나는 그런 누님의 말에,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누님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 샌가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즉, 예정과는 다르게 저녁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디아나와 같이 밤을 보내게 되는…으악! 안 돼!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당장. 한시라도 빨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이첼 누님과 이렇게 애매한 상황에서 헤어질 수도 없다.

    "누님. 설명은 가면서 할 테니 우선 같이 가시죠."

    "네? 자, 잠깐. 그러니까…."

    "싫으세요?"

    "시, 싫은 건…."

    "그럼 가시죠?"

    "하읏…네, 네에…."

    이 이상 말이 길어져서 시간을 끄는 것도 아깝다.

    오해는 가면서도 풀 수 있으니, 우선은 출발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평소완 달리 조금 강압적으로 레이첼 누님에게 말을 건넸고, 레이첼 누님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해서, 나는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니. 무사히 돌아왔다고 표현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나.

    "자네 왔는가. 조금 늦었…음? 레이첼양 아닌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저녁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이도 디아나는 그정도론 화내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저녁식사 이후니까 말이다.

    다만 내가 레이첼 누님과 같이 온 걸 보자 조금 불안감을 느낀 건지, 디아나는 살짝 경계하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겠지만, 역시 디아나도 오랜만에 나와 같이 자게 되는 게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디아나님. 근처까지 오게 됐는데, 기숙사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늦어서요. 구원씨의 호의에 따라 외박하게 됐어요. 그래서 구원씨, 전 어디서 자면 되나요?"

    그리고 그런 디아나를 안심시키듯, 레이첼 누님이 환하게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다만, 내가 보기에 그 미소는 아무리 봐도 안내원 일을 할 때 형식적으로 보여주는 영업 스마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시 엄청나게 화났어….

    그도 그럴 것이, 나랑 같이 자는 게 아니라는 걸 오면서 설명했으니까 말이야.

    오는 도중에 설명을 들은 레이첼 누님은 자신이 착각했단 사실에 잠깐 부끄러워하는 것 같더니, 그 부끄러움을 이내 나에 대한 분노로 전환시켜서 오는 내내 이런 태도였다.

    저택에 초대해서 나에 대한 인식을 좋게 만들려고 했던 생각이 오히려 악수로 작용하게 되다니.

    아무리 급했어도 역시 그 자리에서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게 좋았을지도.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봤자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방은 저기 있는 바넷사에게 물어보면 준비해줄 거예요. 그보다 누님. 모처럼 오셨으니 같이…."

    "그렇군요. 그럼 바넷사씨. 미안하지만 바로 부탁해도 될까요? 제가 조금 피곤해서요. 그럼 디아나님. 좋은 밤 되세요."

    "네? 누님?! 하지만 저녁은…."

    "괜찮아요. 방금 전까지 케이크도 먹었고. 그럼 내일 봐요."

    내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레이첼 누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넷사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자네. 레이첼양에게 뭔가 잘못이라도 했는가? 확실히 피곤해보이기는 했네만…."

    "…이따가 얘기해줄게."

    나는 그런 레이첼 누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쓰는 건 일찍 썼습니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일부러 그 전에 쓰고 나갔거든요.

    12시 전에 들어올 줄 알고 예약도 안 걸고 그냥 나갔는데, 설마 이 시간에 집에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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