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03화 (587/1,205)
  • 603====================

    레이첼의 사정

    누님 말대로 연차가 쌓여있기 때문인지, 누님은 아무 문제없이 조퇴를 허가받고 방에서 나왔다.

    "구원씨, 저 왔…꺄악! 이, 이게 뭐에요?!"

    "…제가 묻고 싶어요. 그러니까 옆 데스크로 가라고!"

    "여, 여긴 끝났어요! 죄송해요! 여러분! 옆 창구를 이용해주세요!"

    "쳇. 결국 이번에도 여자 데리고 있는 거네."

    "아깝다. 역시 저거 성자 맞지? 옆에 여자 안 끼고 혼자 있는 건 진짜 보기 드물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언제 시간이나 되나 물어봤어야 됐는데."

    누님이 데스크 위에 옆 데스크로 가 달라는 팻말을 올려놓은 후에야, 내 앞에 쭈욱 일렬로 길게 늘어져있던 줄이 해산하기 시작했다.

    저 팻말, 미리 올려놔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내가 고생할 일도 없었는데 말이야.

    아니. 왜 나한테 와서 안내를 받으려고 하는 거지? 척 보면 나 혼자 안내원복장 안 입고 있는 거 모르나?

    그리고 으스대는 것 같아서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말이야, 이젠 나도 유명인 아니야? 좀 눈치 채라고. 성자라고. 성자. 너희 전부 여신님 신자일 거 아니야.

    뭐, 개중에는 날 알아보고서도 일부러 이쪽으로 다가와서 장난치던 녀석들도 있지만 말이다.

    특히 마지막에 혀 차면서 사라지던 녀석들. 저 녀석들은 확실히 알고 그런 거다.

    뭐, 인기가 많다는 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런가. 지금까지 나한테 여자들이 추파를 안 던졌던 건, 옆에 우리 애들이 착 달라붙어 있어서 그랬던 건가.

    그러고 보니 유명해지고 나서 우리 애들이랑 떨어져서 다닌 기억이 거의 없다.

    여기 왔을 때처럼 혼자 길을 걸을 때도, 기본적으로 신체능력을 살려서 뛰어다니니까 말이야.

    "자, 그럼 갈까요?"

    누님도 모험가들이 사라지면서 한 얘기를 들은 건지, 마치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은근히 내 소매를 당기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다녀오면서 화장도 하고 온 건지, 아까 전의 푸석푸석한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누님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눈 밑의 기미는 화장으로 다 가려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손끝으로 내 소매만 붙잡고 가는 누님의 손을 살며시 마주잡아주자, 누님은 그제야 살포시 웃으며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팔에 가슴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같았지만, 걸을 때마다 살짝살짝 닿는 게 오히려 더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 사이에 또 사람 애태우는 기술이 늘어난 모양이다.

    아무튼 길드 근처의 카페, 전에 사라랑 셋이서 온 적도 있는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하게 주문을 마치고 겨우 서로를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구원씨.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누님.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 무리수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을 건 누님이었지만, 과연 이번만큼은 나도 딴죽을 걸지 않곤 있을 수 없었다.

    누님도 스스로 무리수를 던졌다는 자각은 있는 건지, 내 말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모, 몸은 조금 어떠세요?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던데요?"

    "걱정해주셨어요?"

    "당연하잖아요. 불안해서 눈물로 베개를 적시느라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단 말이에요."

    내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질문하자, 누님도 장난스럽게 흑흑하고 우는 시늉을 하며 대답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 장난스런 말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실비아가 대체 뭐라고 했는데 그렇게 걱정을 하셨어요?"

    "그냥 구원씨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오늘은 마석 정산 없이 귀환 보고만 하겠다고만…. 실비아씨는 원체 무뚝뚝하신데다가 그 날은 다급해 보이기까지 하셔서 그 이상 자세한 말은 들을 수 없었어요."

    누님의 그 말에 잠깐 위화감을 느낀 나였지만, 이내 무슨 말인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실비아 그 녀석, 나 없을 땐 나른하다고 해야 할까 멍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할 말만 하지.

    게다가 얼른 내 곁으로 돌아오고 싶었을 테니, 진짜 짧게 할 말만 대충 전하고 빠진 모양이다.

    실비아 그 녀석…제대로 말했다고 한 주제에.

    아니. 일단 할 말은 제대로 전한 게 맞긴 맞는데 말이야. 이왕이면 좀 가볍게 설명할 수도 있었잖아.

    하긴 실비아 자신부터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 과한 건가.

    "그래서 저, 불안해서 불안해서…정말! 멀쩡하시면서 곧장 찾아오지 않으신 구원씨 잘못이라고요! 다른 여자들이 있더라도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게 해준다고 말했으면서."

    말하면서 점점 불안해하던 기억이 떠오른 건지, 레이첼 누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침울해져갔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레이첼 누님은, 침울한 모습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내 코끝을 손끝으로 톡 건드리며 꾸중을 하듯 그렇게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 그게. 전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우리 애들이 밖에 나가질 못하게 해서요."

    그렇게 억지로 밝게 말하는 레이첼 누님의 모습이 오히려 더 구슬프게 느껴져서, 나는 제대로 고개를 숙여서 사과를 했다.

    사실 빨리 올 수 없었던 이유가 우리 애들한테 외출 금지령을 선고받은 것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얘기는 굳이 할 필요 없겠지.

    지금 바넷사 얘기를 꺼냈다가는 괜히 레이첼 누님 기분만 안 좋아질 것 같고.

    그게 아무리 깊은 트라우마에 관련된 얘기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밖에 못 나가게 했다니…대체 무슨 일이었는데요?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내 외출 금지령 얘기를 듣고 불안해 진 건지, 레이첼 누님은 다시 표정을 흐리게 만들며 내 안색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정말이라니까요. 그냥 전에 제가 4계층에서 조난을 당했잖아요? 그때 혼자 있기 심심해서 친…장난감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번에 4계층으로 갔다가 우연히 그때 그걸 발견했거든요. 그래서 그거 보고 반가워했더니, 애들이 트라우마가 재발했다느니 뭐니 호들갑을 떤 것뿐이에요."

    펄슨…. 친구를 친구라 부를 수 없는 날 용서해다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그런 씁쓸한 심정이 표정으로 드러난 건지, 레이첼 누님은 내 해명에도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 그렇군요.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죠?"

    "저,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그, 그보다 누님은 왜 그러신 거예요?"

    이대로 이 얘기가 계속되면 결국 펄슨 얘기가 나오게 될 거고, 그럼 레이첼 누님도 우리 애들처럼 과민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네, 네?! 뭐가요?"

    "과일 바구니 말이에요. 그거 무슨 암호에요?"

    "아, 암호라니…. 그냥 병문안 선물인데요?"

    아무래도 암호 같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뭔가의 신호나 암호 같은 게 아니라면, 오히려 의문이 더 커질 뿐이었다.

    "그럼 며칠 동안 병문안 선물만 주고 가신 이유가 뭐에요? 그것도 매일같이. 제 얼굴도 보러 안 오시고. 제 상태가 궁금하셨던 거 아니에요?"

    "그, 그건…."

    내 질문에 대답할 말이 궁해진 건지, 레이첼 누님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고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짜로 대체 무슨 일인 거람.

    "레이첼 누님?"

    "마, 만약…. 만약 구원씨의 얼굴을 보러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을 못하는 누님.

    참다못한 내가 이름을 부르자, 레이첼 누님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고는 쥐어짜내는 것 같은 고통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는데…만약 구원씨의 상태가 위험한 상황이라면…전…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레이첼 누님.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서 테이블 너머로 가늘게 떨리는 그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여줬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누님. 전 아무 문제없으니까요."

    "흐윽…네…."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낮게 흐느끼던 누님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몸의 떨림이 진정됐다.

    그러더니 이번엔 내 가슴팍에서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훗. 어때요?"

    "엥?"

    "조금은 죄책감이 생겼나요?"

    내가 몸을 떼고 누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누님은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면서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고 있었다.

    "이렇게 구원씨만 바라보며 기다려준 좋은 여자를 며칠 동안이나 방치하고 있었던 벌이에요."

    그리고는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손을 뻗어서, 누님은 이번에도 검지 끝으로 내 코끝을 톡 하고 살짝 두드려줬다.

    "전에도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방치하면 정말로 딴 남자한테 가버릴 거예요? 저 정말로 들이대는 남자 많다고요. 아까 전에 구원씨가 안내데스크에 있을 때 정도 수준이 아니니까요. 정말이에요?"

    "아, 네…."

    "정말…. 안 믿는 거죠? 평소에 구원씨가 오시는 시간이 사람이 한가할 시간대라 그런 거라고요. 붐빌 때는 정말로 장난 아니니까요."

    "아, 아뇨. 믿어요."

    "흥. 정말일까요? 그런 사람이 위기감도 없이 절 며칠씩이나 방치해요? 일부러 신경 쓰이게 선물만 보내고 얼굴도 안 비췄는데."

    아무래도 누님은 그 주장을 밀고 나갈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누님이 과일만 보내고 얼굴을 비추지 않은 진짜 이유는, 처음 말했던 그 이유가 맞다.

    누님은 혹시라도 정말 내가 잘못됐을까봐 두려웠던 거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던 걸까?

    물론 날 사랑하신다고 하니, 내가 잘못돼는 걸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껏 와서 얼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벌벌 떠는 건 조금 이상한 거 아닌가?

    게다가 방금 전 레이첼 누님의 반응. 누가 봐도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의 사연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레이첼 누님은 모험가가 던전에서 실종당할 때마다 기겁을 하면서 자신이 구출하러 나섰지.

    4계층에서 날 찾아 나섰던 건 누님이 날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고려해본다면 그나마 이해가 된다.

    하지만 3계층에서 그 수인족 파티를 구했을 때는?

    확실히 그 파티와 누님은 안면이 있는 모양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누가 봐도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서 구하러 갈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누님은 그 파티를 구하러 갔고, 심지어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파티를 보호했다.

    뭔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 그런 의심이 끊이지 않고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죄송합니다. 무슨 암호 같은 건 줄 알고 풀어보려고 했거든요.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아서 정답을 들을 겸 온 거였는데, 설마 암호가 아니었을 줄이야."

    물론 나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우선은 레이첼 누님의 말에 맞장구 쳐주기로 했다.

    억지로라도 얘기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누님이 이렇게 얼버무리고 있는 거다.

    누님 마음속에선 내게 얘기할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든가, 아니면 아직 얘기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억지로 캐물어 봐도 오히려 역효과만 나올 뿐이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일단 모르는 척 하자.

    다행이 내게는 든든한 조언자도 있으니까 말이야.

    "정말. 구원씨는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는데, 칭찬 아니니까요?"

    "어?! 아니었어요?!"

    "후훗. 정말! 농담 아니니까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던전에 나오면 곧장 누님께 인사부터 드릴게요. 설령 우리 애들이 외출 금지령을 내릴지라도! 어떻게든 감시의 눈을 뚫고 누님의 곁으로!"

    "그, 그건 그만 두는 편이 좋아요! 저도 디아나님께 밉보이긴 싫단 말이에요!"

    내가 굳은 결의를 내비치며 말하자, 누님은 살짝 당황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누님은 여러 가지 의미로 디아나한테 밉보이기 싫겠지.

    같은 엘프의 선조격이고, 엄마 친구고, 게다가 정령 마법을 다루는 걸로 보아 누님도 일단 마법사고, 심지어 나중엔 첩으로 들어갈 남자의 부인까지 되는 입장이니까 말이다.

    우와. 생각해보니 레이첼 누님 디아나한테 진짜 찍소리도 못할 입장이네.

    "그럼 다음부터는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누님이 제 얼굴을 보러 오는 걸로?"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세요!"

    장난치는 척 떠보자, 누님도 장난스럽게 날 혼내는 척 하면서 진짜로 화를 냈다.

    역시 뭔가가 있어.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세 시간보다 조금 더 걸렸네요.

    아무튼 연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