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02화 (586/1,205)
  • 602====================

    레이첼의 사정

    "저…누님? 저도 얼굴 누님 얼굴 보게 돼서 기쁘고, 하고 싶은 말도 엄청 많이 있지만, 우선은 하던 일부터 마저 하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언제까지 계속 여기서 이렇게 주목을 받고 있을 수는 없다.

    그냥 길드 안내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모험가에게 키스를 하는 장면만 하더라도 충분히 주목받을 사건인데, 심지어 그 당사자 둘이 바로 여신의 사자와 길드장의 딸이다.

    묘한 소문이 폭발할만한 조합이라는 거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남의 눈이 있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전에 성자님의 구원인지 뭔지 하면서 잘못된 소문이 얼마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똑똑히 경험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을 계기로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면, 고생하는 건 내가 아니라 레이첼 누님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평소와 상당히 다른 레이첼 누님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누님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응. 아무래도 묘한 소문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레이첼 누님이. 연차를 너무 안 써서 쌓아두고 있다고 했을 정도로 워커홀릭이었던 그 레이첼 누님이 자신의 일을 가리키며 아무래도 좋다고 하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실비아야. 혹시 누님한테 내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한 건 아니겠지?

    "에이, 누님도 참. 자, 제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일단 하던 일부터 마무리 짓고 느긋하게 얘기해요."

    "알겠…알겠어요."

    내가 그렇게 다독이자, 누님은 지근거리에서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마치 스캔을 하는 것처럼 내 얼굴을 바라보던 누님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내 손을 붙잡고.

    "누, 누님?! 누님?! 저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그냥 안내데스크 근처까지 데려오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나랑 같이 안내데스크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는 누님.

    그런 누님의 태도에 나는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아뇨. 아뇨아뇨아뇨. 안 되잖아요. 안쪽에는 직원만 볼 수 있는 서류라든가, 이것저것 있을 것 아니에요. 일반인이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생각은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님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누님의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해보였으니까 말이다.

    공과 사는 완벽하게 분리하는 비즈니스 우먼 같았던 누님이 한순간이지만 일까지 내팽개치고, 게다가 항상 외모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있던 누님이 이렇게 화장기도 없이 푸석푸석한 모습을 하고 있고, 심지어 말투에서도 평소 같은 여유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손을 잡고 가는 행동도 그렇다. 평소에 누님은 뭐라고 표현할까…일부러 애간장을 태우는 것 같은 스킨십을 해왔었는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그런 누님의 손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나란 놈이 매정한 놈은 아니었다.

    그런고로, 나는 지금 안내원 자리에 들어와 있었다.

    다행이도 누님이 의자 하나를 더 가져다준 덕분에, 나는 지금 누님의 뒤에서 앉아있었다. 한 손은 여전히 누님의 한쪽 손에 잡힌 채로.

    …이거.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주위의 시선이 한층 더 따가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아니. 그것보다 한 손으로도 일 엄청 잘 하시네.

    "네. 여기 마석 정산금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이용해주세요. 그럼 다음 분 오세요. 아! 거기! 뒤에 더 이상 줄 서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옆 창구를 이용해주세요!"

    누님은 빨리 말하기 대회라도 하는 것처럼 속사포로 주어진 대사를 읊으며 일을 처리해나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단 매뉴얼대로 대사를 읊는 걸 보면, 역시 프로는 프로다.

    아니. 뭐, 안내원 매뉴얼에 진짜 저렇게 말하라고 나와 있는 건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레이첼 누님의 서두르는 모습에, 누님의 자리에 줄서있던 모험가들도 대충 분위기 파악을 해줬는지 빠르게 용건만 마치고 자리를 벗어나줬다.

    하지만 모험가란 부류는 아무래도 자유로운 족속이다 보니, 전원이 그렇게 서둘러주는 건 아니었다.

    레이첼 누님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마 평소에 하던 대로 느긋하게 말을 걸어오는 모험가도 있었다.

    "뭐야? 뒤에? 애인?"

    "아직 아니에요. 그래서 방문해주신 용건은 무엇입니까?"

    "뭐겠어. 평소처럼 마석 정산이지. 그래서. 아직 아니라는 건, 곧 그렇게 될 거라는 거?"

    "네. 마석 받았습니다. 정산되는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누님은 마치 업무만 처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 네라고 대답한 거, 나랑 곧 애인이 될 거란 얘길 긍정한 거 아니야?

    그 증거로, 네라고 대답하는 순간 내 손을 잡은 누님의 손에 살짝 긴장한 것처럼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정작 뒤에 있느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마석 받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긍정한 거지? 이럴 수가! 레이첼! 나랑은 그냥 장난이었던 거야?!"

    하지만 모험가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대답하는 순간 표정 역시도 변한 모양이었다.

    모험가는 안내데스크에 두 팔을 얹고는 누님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곤 장난스럽게 말하더니, 갑자기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연극조로 그렇게 말했다.

    "오해받을 소리 하지 마세요! 구원씨! 아니니까요!"

    네. 누님. 저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 아닌 거 알아요.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마석 정산 받고 있는 모험가 녀석, 여자인 걸요.

    "여기 마석 정산금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이용해주세요!"

    "어쩜 이리 박정할 수가! 레이첼! 그 날 밤의 일을 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 잘 여문 가슴이 내 손안에서 찌그러지며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고, 그 탐스러운 허벅지가 내 허벅지를…."

    "없는 소리 지어내지 마세요! 그리고 여자끼리도 성희롱은 성립되거든요?!"

    그렇게 외치는 누님은 상당히 흥분한 건지,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서 환하게 드러나 있는 목덜미가 새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어머, 무서워라. 그렇게까지 흥분할 거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가는 여전히 장난스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역시 모험가란 녀석들은 이런 녀석이 많은 건가?

    그러고 보니 가끔 다른 모험가랑 대화를 나눌 때도, 초면에 나랑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주고받는 놈들이 상당히 많았던 기분이 든다.

    그런가. 누님은 항상 이런 녀석들을 상대하고 있는 건가.

    왠지 누님이 내 장난에도 어른스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내가 눈앞의 저 모험가처럼 분위기 파악 못하고 아무 때나 장난질을 해대는 건 절대…아니라곤 말 못하지만.

    그,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잖아?

    "볼 일 마쳤으면 좀 가세요!"

    "아직 안 끝났대도. 아, 5계층 지도도 하나 보여줘."

    "네? 5계층을요? 이미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더라고. 아무래도 잃어버렸나봐."

    누님은 의심스럽다는 듯 모험가를 쳐다봤지만, 모험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능글맞게 그렇게 대답했다.

    "모험가가 지도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자 누님은 곧바로 모험가를 꾸중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런 모험가의 능글맞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누님은 일단 안내원으로서의 본분은 다 할 모양이었다.

    하긴. 예전에 내가 처음 보자마자 누님을 헌팅하려 했을 때도 일단 모험가 등록은 끝까지 시켜줬지.

    안내원이라는 거, 생각보다 훨씬 힘들구나.

    아무튼 누님은 내 등 뒤에 있는 선반에서 지도를 찾으려는 건지, 대답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물론 나는 방해가 되지 않게 의자에서 일어나서 옆으로 비켜서려고 했다.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은근슬쩍 안내 데스크 밖으로 나가 있어도….

    그런 계획까지 꾸몄던 나였지만, 그 계획은 누님에 의해 간단히 좌절되고 말았다.

    "앉아계세요!"

    "네? 아니. 하지만…."

    "괜찮으니까요!"

    누님은 날 절대 자신의 곁에서 떼어놓지 않겠다는 듯 내 어깨를 눌러서 강제로 의자에 다시 앉히고는, 그대로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내 등 뒤에 있는 선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아니아니. 누님.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저희 지금 남들이 보면 엄청나게 오해받을 자세가 됐는데요?! 여기 누님 직장이잖아요?! 풍기 문란 아니에요?!

    아주 잠깐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안면 전체를 감싸는 풍만한 감촉에 의해 그런 생각들은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풍기문란이든 뭐든 알게 뭐야. 난, 지금의 이 순간을 즐긴다!

    부드러운 가슴이 타이트한 안내원복에 감싸여서, 뭐라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운 감촉을 내 얼굴 전체에 선사해줬다.

    밀려들어오는 행복감에, 나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들고는 엄지를 척 세웠다.

    누님에게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안내데스크 너머에 있을 이름 모를 모험가를 향해.

    "큭. 크큭."

    내 그런 반응이 재밌었던 건지, 안내데스크 너머로 모험가가 낮게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여기 있다. 응차."

    아무래도 5계층 지도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5계층에 갈 수 있는 모험가 자체가 얼마 없을 테니까 말이야.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은 물건은 그런 곳에 두는 거겠지.

    아무튼 누님은 내 얼굴에 가슴을 꾸욱 밀어붙이며 지도를 한 장 꺼내더니, 내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으아아…내 가슴이…."

    "뭐, 뭐라고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위험해. 저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와버렸잖아.

    거기! 이름 모를 모험가! 남의 일이라고 웃지 마라! 넌 이 가슴이 가진 마성의 매력을 몰라서 그래!

    "하아…정말로…."

    그리고 그런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서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누님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 여기. 5계층 지도에요. 모험가는 지도가 생명줄이니까 또 잃어버리면 안돼요? 베테랑이신 분이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누님은 다시 설교 모드로 들어가서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는 듯 강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긴. 누님은 던전에서 모험가가 실종되면 스스로 찾으러 나설 정도로 던전에서 아는 모험가가 해를 당하는 게 싫은 모양이니까 말이야.

    저번에 3계층에서도 그랬고, 나 때도…어? 잠깐만. 그렇다는 말은 즉, 혹시 지금 나도 던전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심각하게 걱정한 건가?

    "미안. 미안. 그만…아."

    하지만 그런 누님의 태도에도 모험가는 가벼운 말투고 그렇게 건성건성 대답하더니, 갑자기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한 손을 뺐다.

    그리고 그 손에는 너덜너덜해 보이는 종이 쪼가리 하나가 들려있었다.

    "미안. 여기 있었네?"

    "뭐라고요?! 당신 일부러…!"

    "미안! 레이첼! 다음에 봐! 마석 정산 고마워!"

    누가 봐도 일부러 그러는 게 뻔히 보이는 그 모습에, 레이첼 누님도 드디어 폭발하려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레이첼 누님이 어떤 태도를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던 모험가도, 이번만큼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날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저 녀석이랑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드디어 누님의 자리에 줄서있던 모험가들은 전부 처리했다.

    "정말! 언제나 장난만!"

    "저, 저기…죄송합니다."

    분통을 터뜨리는 레이첼 누님을 보고, 괜히 찔리는 게 있는 나는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고 말았다.

    누님은 그런 날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이내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콕콕 찔렀다.

    "뭐에요. 구원씨. 평소에 자기도 그런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네요?"

    아, 평소의 레이첼 누님으로 돌아왔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그렇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제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나는 일부러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고, 누님은 그런 날 보며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을 뿐이었다.

    "후훗. 그럼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퇴 신청하고 올 테니까요."

    누님은 내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고는, 그대로 내게 멀어져 이 자리에서 한층 더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뇨. 누님. 그동안 저 계속 여기에 있으라고요?

    "저, 저기…모험가 신청은 여기서 하면 되나요?"

    "…옆 데스크로 가라."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했던 연참은 지금부터 써서 올리겠습니다.

    아마 세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닭구 //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