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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본심 -->
"그 말은 너도 괜찮다는 말이야?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 그…추기경 입장으로서 라든가."
"추기경인 것과는 무슨 상관 인가요? 추기경이라고 해서 그런 행동의 옳고 그름까지 판단할 자격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 여신님도 아닌 일개 성직자가 어떻게 그런 권한이 있겠어요. 그리고 애초에 여신님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당신이잖아요?"
아니. 추기경은 일개 성직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추기경대접이라곤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리고 내가 여신님에 가까운 존재라니. 그야 뭐 여신님의 사자라고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말이야.
난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진 여신님의 교리를 따르기는커녕 그 존재조차도 몰랐던…게임한 것도 교리에 따른 걸로 쳐주나?
"그러니 제가 더 할 말은 없어요. 저 개인적인 판단에 따르자면…레이아씨와 같아요. 앞으로 더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더 할 말은 없어요."
마틸다는 레이아에게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틸다는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 그렇게 말하는 걸로 내 행동을 용서해줬다.
"그리고 입장을 생각한다면, 저보다 실비아씨를 더 신경쓰셔야하는 것 아닌가요? 그냥 성직자인 저와 달리 실비아씨는 나라에서 일하시는 기사님이라고요."
헛! 그, 그러고 보니!
실비아의 평소 이미지 때문에 실비아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서해줄 거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던 걸까?
실비아가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얘는 기사님이잖아. 원래 세계로 따지자면 쉽게 말해서 경찰 겸 군인이라고 볼 수 있는 기사.
마틸다가 그걸 지적함으로써 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실비아에게 쏠리게 됐다.
그리고 그 당사자인 실비아는 자신이 주목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저, 전…구원님의 곁에 오는 순간부터 기사의 직위를 버렸…."
그리고는 설마 했던 기사 직위 포기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아니. 실비아야. 네가 나 상대로 엄청나게 무른 건 잘 알겠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기사를 버릴 건 없잖아.
"야. 왕실친위대 기사님. 자기 직위 버리려고 하지 마라."
"저, 정말로…!"
"그건 예전에 성노예로 받아달라고 했을 때 얘기잖아? 나랑 잘 풀리고 나서 공주가 계속 기사 직위 유지하게 도와준 거 여기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너 일단 명목상으론 여기 파견 온 거잖아."
"아우으…하, 하지마안…."
기사로서의 자신을 저버리려 하는 실비아에게 주의를 주자, 실비아가 머리를 감싸 쥐며 고뇌에 빠졌다.
저렇게 나온다는 건, 실비아 본인은 내 행동을 용서할 생각이 있어도 기사로선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는 건가?
"역시 기사로선 내 행동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만에 하나 기사로서의 실비아가 내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내 곁을 떠난다면…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절로 우울한 기분이 됐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과거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난 아마 똑같은 짓을 저지를 거다.
레이아나 마틸다에게 다신 안 그러겠다고 했지만, 그건 더 이상 그럴 녀석이 없기 때문이다.
녀석은 다른 것도 아니고 감히 내 여자를 강간하려 든 녀석이니까.
"아, 아닙니다! 전혀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런 살인자에 강간범은 어차피 그냥 잡혀도 사형입니다! 그 집행을 여신님의 사자이신 구원님이 도와주신 거니, 아무 것도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울해진 걸 실비아도 눈치 챘는지, 실비아는 황급히 양손을 좌우로 파닥거리면서 날 달래듯 그렇게 말했다.
"…나 일단 그 때는 지금처럼 다들 알아 모시는 여신님의 사자가 아니었는데?"
"구원님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여신님의 사자로 오신 것이니 아무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건 좀 제멋대로인 판단 아니냐? 만약 제대로 걸렸으면 역시 문제인 거지?"
모처럼 실비아가 날 두둔해주고 있는 거니까, 사실은 내가 이런 질문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고마워해야한다.
하지만 뭔가 실비아가 허둥지둥 당황하는 게 재미있어서, 나는 반사적으로 계속 실비아를 놀리듯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과연 이번 질문만큼은 말문이 막혔는지, 실비아는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중얼거렸다.
"괘, 괜찮습니다! 저, 저희 바벳가의 힘이라면…."
"야. 갑자기 악덕 귀족처럼 굴지 마라."
"아흐으읏…!"
나는 결국 실비아의 머리를 가볍게 톡 때리며 제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공격에 실비아는 자지러지듯 물러났다.
이마를 감싸고 있는 걸 보니, 내 손바닥이 우연히 스친 모양이다.
다른데도 아니고 이마에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사도인장 위치를 잘못 새겨놨나? 아니. 뭐, 내가 만지는 것만 아니면 괜찮은 모양이지만.
"이 자의 말이 맞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발언을 하다니. 자네 어머니도 실망할 걸세."
그리고 내 옆에서 디아나도 실비아를 꾸중하듯이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가 펠리시아랑 실비아 어렸을 때 가정교사 노릇을 한 적도 있다고 했던가?
"하, 하지만 구원님을 위해서라면…!"
"떼끼. 실비아양. 아무리 그래도 청렴하고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어머니의 이름에 먹칠을 하려 들어서야 되겠는가."
마치 가정교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이, 이마를 부여잡은 실비아는 계속해서 떼를 쓰듯 말했다.
그리고 디아나 역시도 가정교사가 된 것처럼 엄하게 계속 훈계를 늘어놨다.
뭔가 훈훈한 광경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실비아가 반격을 시도했다.
"디, 디아나님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습니까아…!"
설마 실비아가 저런 식으로 디아나를 공격할 줄이야.
쟤 혹시 내가 이마 만졌다고 패닉상태가 된 건가? 뭐, 아까도 기절할 정도로 놀랐으니 이상한 건 아니지만.
"으햐아앗! 그, 그것과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디아나도 설마 실비아가 자신에게 저렇게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엄청나게 당황하면서 팔을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두면 조금 위험할지도.
흐뭇하게 둘의 말다툼을 구경했던 나였지만, 슬슬 끼어들 때인 모양이다.
"둘 다 그만해. 요는 너희가 그런 짓을 할 일이 없도록 내가 처신을 잘 하면 되는 거잖아? 앞으론 그런 일 없을 테니까."
"그렇네! 자네가 문제일세!"
어, 어라? 난 그냥 중재를 하려고 한 건데 왜 갑자기 내게 집중공격이?!
교실에서 싸우는 친구 둘을 말리다가 중간에서 펀치를 한 대 얻어맞은 그런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애들처럼 싸움에 참전하진 않을 거지만 말이다.
"그래. 그래. 너희가 내 일만 되면 자기 명예든 뭐든 다 내팽개치고 일을 저지를 거란 건 잘 알겠으니까."
"흐으으읏…."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디아나는 말없이 날 토닥토닥 때려댔고, 실비아는 이상한 소리를 흘리며 방구석으로 가서는 벽을 바라보고 쪼그려 앉았다.
실비아야.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건 잘 알겠는데, 그런다고 숨어지는 거 아니다.
"아무튼 할 얘기는 이걸로 끝이야. 다들 이해해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내가 그렇게 얘기를 마무리 짓자, 사라도 고개를 숙여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솔직히 복수가 우리 계획대로 진행된 건 아니라, 사라도 그 후에 찝찝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었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털어놓고 다른 애들이 이해해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사라씨도 힘드셨을 텐데 그동안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게다가 비밀을 공유함으로서 우리 사이가 더 돈독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레이아는 천사다.
"아무튼 다음부턴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 몸에게 먼저 말하는 걸세. 알겠는가?"
"쿠데타 일으켜주게?"
어른스럽게 한 마디 했던 디아나였지만, 내가 농담을 건네자 다시 내게 달려들어 토닥토닥 공격을 감행해왔다.
"일으킬 걸세! 뭐 문제 있나아?!"
"너 방금 전에 실비아한테 그러지 말라고 설교하지 않았었냐?"
"이 몸은 바벳가와 달리 명예 같은 거 없네!"
"야. 모든 마법사의 우상. 대마법사님.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몸 맘일세!"
이런. 너무 놀렸나. 디아나가 이성이 사라져 버렸어.
원래는 이정도 놀려선 이렇게까지 안 되는데 말이야.
역시 실비아한테 아무런 대비도 없이 한 방 얻어맞은 게 컸나.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진정해. 아프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적어도 아픈 척이라도 하면서 하게!"
"아야! 아야!"
"지금 이 몸을 놀리는 겐가아?!"
아니. 아픈 척 해달라고 해서 해준 거잖아. 뭐 어쩌라고.
결국 나는 사라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한 것만큼이나 시간을 소모한 후에야 겨우 디아나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얘기가 마무리 되고 나서, 나는 드디어 레이첼 누님에게 갈 수 있게 됐다.
평소보다 점심을 빨리 먹은 것도 있어서, 아직 시간은 2시 30분쯤.
다행이도 레이첼 누님을 만나러 갔다 올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해서 과일 바구니를 직접 가져오는 걸 보니, 이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런 고로, 나는 재빨리 레이첼 누님에게 향하기로 했다.
"저기…얘들아? 나 잠깐 밖에 다녀와도 되지? 그 왜, 사람이 건강하려면 바깥 공기도 좀 마시고…."
물론 그 전에 허락부터 받아야겠지만.
"다녀오게."
다행이도, 전에 나하고 펄슨에 관해서 걱정할 것 없다는 대화를 나눈 디아나가 내 외출을 허락해줬다.
방금 전까지 날 토닥토닥 거리고 있느라 지쳤는지, 꽤나 피곤한 목소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역시 디아나야. 어른스럽다니까. 사랑한다.
"그럼 사라야. 가자!"
"난 됐어."
외출 허락을 받은 나는 혹시나 다른 애들이 반대라도 하기 전에 황급히 사라를 데리고 사라지려고 했지만, 사라는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날 따라오려 하지 않았다.
"그, 그 말은…외출은 불허한다는 뜻입니까?"
"바보. 그런 거 아니야. 난 아까도 허락했었잖아? 그냥 혼자 다녀와. 난 방금 전 얘기 때문에 조금 피곤해서 그래."
"하지만…괜찮겠어? 너 어제도…."
"어, 어젠 목걸이가 고장 난 것 같아서 그런 거고! 괜찮으니까! 전에도 구원이 올 때까지 혼자 여기서 버틴 적 있잖아?!"
"너 그러고 나서 바로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봐라. 말해두는데, 오늘 디아나 차례다."
"아, 알고 있거든!? 정말 괜찮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
사라는 주변에서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날 쫓아내듯 내 등을 떠밀었다.
진짜로 괜찮은 걸까?
뭐, 전처럼 하루 종일 나가있을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저녁식사 전에는 돌아올 거다. 본인도 저렇게 말하는 거고, 아마 괜찮겠지.
살짝 불안하기는 했지만, 나는 홀로 레이첼 누님에게로 가게 됐다.
"구원씨!"
그렇게 해서 곧장 길드에 찾아온 나였지만, 굳이 레이첼 누님이 계신 안내데스크로 갈 필요는 없었다.
내가 길드에 입장하기가 무섭게, 누님이 먼저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누님을 보면서, 나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내원 누님의 표본인 것처럼 언제나 그 지적인 외모를 가꿔서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레이첼 누님이, 마치 며칠 잠이라도 못 잔 것처럼 푸석푸석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원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이런 모습조차도 병약한 미녀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누, 누님? 괜찮으세요?"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구원씨! 괜찮으세요?!"
…괜찮냐니. 역시 그 얘기겠지?
실비아야. 잘 얘기해뒀다고 하지 않았었냐?
대체 뭘 어떻게 설명해놨기에 누님이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거야.
"아…음…네. 괜찮은데요?"
"다행이다!"
내가 살짝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주자, 누님은 바로 내 목에 매달리면서 진한 키스를 해왔다.
누님. 여기 일단 누님 직장인데요. 다들 보고 있어요.
특히 레이첼 누님의 팬인 건지 길드에 있는 몇 안 되는 남자 모험가들의 눈빛이 상당히 따갑게 느껴졌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방금 전까지 누님의 데스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그대로 레이첼 누님이 내팽개치고 온 여성 모험가가 재미있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것 정도일까.
그…마석 정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600화 축하도 감사드립니다. 완결까지 열심히 쓰겠습니다.
백파랑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