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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00화 (58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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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사의 본심 -->

    그렇게 해서 사라의 복수 얘기는 흐지부지 마무리 됐고, 우리는 다소 적막한 점심시간을 보내게 됐다.

    평소 같은 내가 나서서 농담이라도 하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겠지만, 아무리 나라도 사라의 복수 얘기 다음에 농담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신경이 굵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거다!

    아니. 도망가는 게 아니라고. 사라도 같이 데리고 가서 분위기 환기라도 조금 시키려고 그러는 거라고.

    애초에 밖에 나갈 일도 있었고 말이다.

    "자, 그럼. 아까 바넷사랑 하는 얘기를 들었겠지만, 난 지금부터 레이첼 누님한테 한 번 가볼 생각인데. 사라 넌 나랑 같이 갈 거지?"

    "누가 밖에 나가도 된다고 했어?"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곧장 자리를 일어나며 활기차게 그렇게 제안한 나였지만, 내 그 속셈은 사라에 의해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뭐, 뭐라고…?"

    "바넷사하고 시시덕거리느라 까먹은 모양인데, 난 아직 구원이 밖에 나가도 될 상태라고 인정한적 없거든?"

    …….

    그, 그러고 보니. 나, 펄슨 가지고 소란 떨어서 집으로 강제 연행된 상태였지.

    "아니. 잠깐. 야. 내가 던전에 가는 것도 아니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안 돼? 사람이 좀 바깥 공기도 쐬고 해야지 건강해지는 거지. 매일 이렇게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아, 바넷사. 너 디스하는 거 아니다?"

    "…그런 뜻이라고 생각 안 하고 있었습니다. 만, 이제는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나는 혹시나 해서 디아나의 뒤에 가만히 서있던 바넷사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을 건넸지만, 그런 내게 돌아오는 건 바넷사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아, 나 혹시 괜한 소리를 했나?

    "흐으응. 바넷사하고 시시덕거린 건 부정 안하는구나."

    "아니. 야. 잠깐. 그거야…그러니까…그…너도 알잖아?!"

    "뭘?"

    "아오 진짜!"

    "푸흣. 바보. 농담이야."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자, 사라는 그제야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장난 따먹기나 한 것처럼 되어버렸잖아.

    아니. 이건 사라가 이런 분위기가 되도록 유도했다고 봐야 되는 건가?

    자기 때문에 무거워진 분위기는 자기가 수습하겠다는 건가.

    "다녀와."

    "응? 넌?"

    "난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랑 할 얘기가 있어."

    사라는 그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힐끔 둘러봤다.

    여전히 디아나와 레이아는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표정이었고, 마틸다는 사라에게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기절해있느라 얘기를 듣지 못한 실비아만이, 지금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 파악은 한 건지 구석에 조용히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상황에 안 맞게 귀엽단 생각이 들어버렸다.

    뭐, 실비아 쟤는 굳이 이럴 때가 아니더라도 나랑 같은 공간에 있을 땐 구석에서 조용히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할 얘기가 있다니. 설마 복수에 관한 걸 전부 얘기하겠다는 건가?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아니. 만약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나도 그 자리에 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거의 계획을 주도한 건 나였는데?

    하지만 오늘은 꼭 레이첼 누님을 보러 가야 할 것 같고…으아아! 그러니까 요즘 왜 이렇게 일들이 연달아 터지는 거야!

    에잇!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얘기를 빨리 끝내고 오늘 안에 무조건 레이첼 누님도 보러 간다!

    "그런 거라면 나도 같이 할게."

    "됐으니까. 구원이 있으면 농담이나 하고 얘기가 탈선하고 괜히 복잡해지니까."

    "야. 아무리 나라도…아무튼 이번만큼은 네가 뭐라고 하더라도 안 물러날 거야."

    레이첼 누님을 보러 가는 걸 뒤로 미루면서까지 도와주겠다고 한 나를 오히려 방해된다는 듯이 말하는 사라.

    그런 사라의 태도에 처음엔 살짝 욱했었지만, 나는 이내 그게 사라가 날 도발해서 쫓아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하여간 이럴 때만 쓸데없이…."

    "쓸데 있을 때만 그러는 걸 잘못 말한 거겠지?"

    중간에 말을 바꾸는 날 보고 자신의 계책이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사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물론 나는 그런 투정조차도 가볍게 흘려 넘겨버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오랜만에 사라의 고집을 꺾고, 대화에 참석하게 됐다.

    "그래서, 할 얘기란 것이 대체 뭔가?"

    그렇게 다들 식사를 마친 후 한 자리에 모이자마자, 디아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는 말과는 달리, 그 말투는 마치 지금부터 우리가 할 말이 뭔지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할아버지의 복수에 대한 얘기에요. 이대로 놔두면 여러분이 저와 구원을 살인범 같은 걸로 오해할 것 같으니까요."

    사라야. 말투만 장난기 넘치게 한다고 분위기가 밝아지는 게 아니야. 하는 말은 전혀 장난이 아니잖아.

    무거워. 무겁다고. 아니. 무거운 걸 뛰어 넘어서 살짝 무섭기까지 해.

    아무튼 그렇게 운을 뗀 사라는, 천천히 우리의 복수에 대한 얘기를 털어놨다.

    포츠의 여자를 빼앗고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줘서 붕괴를 시키려했지만, 사고가 나는 바람에 결국 녀석이 자살해버린 것까지.

    사라는 거의 정확히 모든 사건을 털어놓았다.

    다만 나와의 견해 차이가 있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중간 중간 계속해서 내가 끼어들었고, 결국 우리는 말싸움까지 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구원은 제가 억지를 부려서 강제로…."

    "아니. 난 그때 복수라는 명목으로 너희 몰래 다른 여자랑 즐겨댔어. 물론 그땐 너희의 마음을 서로 확인한 때가 아니기는 했지만, 쓰레기였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너야 말로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시끄럽네! 조용히 하게! 이 몸들이 자네들 사랑싸움이나 보려고 모였는지 아는가?!"

    그리고 그런 우리를 디아나가 고함을 질러서 말렸다.

    디아나는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사라와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씩 먹였다.

    "결국 얘기의 요점이 뭔가?!"

    "그러니까 구원은 아무 잘못이…."

    "무슨 소리야! 애초에 계획도 내가 짠 거잖아!"

    "그, 그것도 결국 내가…! 이씨! 이러니까 같이 말하러오기 싫었던 거야! 왜 내 말대로 안 따라줘?! 나만 나쁘게 되면 구원은 아무 일 없이…!"

    "왜냐하면 내 말이 사실이니까! 아예 비밀로 할 거면 몰라도 이 상황에서 얘들한테 거짓말까지 하긴 싫어!"

    "이 바보가 진짜…!"

    "그러니까 이 몸 앞에서 사랑싸움하지 말라고 했네! 그리고 자네들이 뒤에서 그런 짓을 한 건, 굳이 말 안 해도 진즉에 알고 있었네!"

    "뭐, 뭐?!"

    "뭐라고요?!"

    "네에?!"

    그리고 이어지는 디아나의 고함에, 우리는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뭐? 다 알고 있었다고?

    아니. 그야 아예 짐작을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쉬쉬해도 포츠가 여관에서 죽은 건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그런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나와 사라가 곧바로 이어진 거다.

    뭔가 수상하다고 느낄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니 디아나나 레이아가 아까 뭔가 눈치 챘단 반응을 보인 것도, 어쩌면 할아버지의 복수란 단어로 대충 사건의 관계성이 보인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디아나의 지금 말투는, 대충 짐작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전부 알고 있었다는 말투잖아?

    물론 레이아는 디아나가 알고 있었단 사실을 몰랐는지, 우리랑 같이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여줬지만 말이다.

    "자네가! 케이트양을! 이쪽으로! 보낸 건! 잊었는가아!"

    디아나는 내 머리를 한 손으로 톡톡톡톡 때려대면서 화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뭐, 뭐?! 잠깐. 케이트가 여기 왔었어!? 아니, 그걸 또 전부 얘기했어!?"

    "그럼 마법사가 이 몸의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계속 비밀로 하고 다닐 줄 알았는가!? 진즉에 알고 있었네!"

    "그, 그럼…내가 한 짓을 디아나는…."

    "말해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닐세. 방식이 비열하다고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기 전에 이 몸에게 상담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안 드네! 하지만…사라양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네. 그리고 결국 그 자가 죽은 것도, 자네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계속 아무 말 않고 있었던 걸세."

    디아나는 내 머리를 두드리던 손으로 이번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일 어른스러운 디아나는, 이 사건 역시도 우리 몰래 어른스런 대응을 보이고 있었다는 얘기다.

    "디아나…."

    나는 그런 디아나에게 감동하면서도, 아직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디아나와는 달리, 진짜 고비가 남아있었으니까.

    나는 이번엔 나머지 셋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말 안하고 있어서 미안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놈이야. 마냥 착한 놈은 아니지. 너희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다를 수도 있어. 실망시켰다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내가…."

    이번 고백으로 인해 내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을 지도 모른다.

    그나마 실비아나 마틸다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둘 다 나랑 있으면 상태가 이상해져서 그렇지, 내가 마냥 착한 놈이 아니란 건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까.

    애초에 이런 관계가 되기 전에는 실비아는 무뚝뚝했었고, 마틸다는 나한테 막대해졌었으니까.

    하지만 레이아는 다르다. 레이아는 나에 대한 환상을 너무 심하게 가지고 있는 바람에, 나도 레이아의 앞에선 최대한 몸가짐을 조심해왔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 그 환상이 깨진 거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단 생각에 사라에게 독박 씌우지 않고 전부 다 솔직히 말했지만, 레이아의 반응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구원씨. 괜찮아요."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날 보고, 레이아는 내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포개듯 감싸서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팍에 꼬옥 끌어안았다.

    "언젠가 한 번 말한 적 있죠? 전 구원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착하지만은 않다고."

    확실히 레이아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레이아가 내게 한 유일한 거짓말로 기억하고 있지만 말이야.

    우리 천사님이 천사가 아니면 세상에 누가 천사겠어. 천사는 레이아야.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이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쯤 알고 있어요. 설령 그게 구원씨라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레이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가만히 쓰다듬더니, 이번엔 살짝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그 표정은 솔직히 말해서 흐뭇한 감상마저 들만큼 귀여우셨지만,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레이아를 마주 봤다.

    "물론 구원씨와 사라씨가 하신 행동은 아주, 아주 잘못되셨어요. 아무리 복수라고 하더라도, 좀 더 정당한 방법이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그 복수의 대상뿐만 아니라 아무 관계도 없는 여성분마저 말려들게 된 거잖아요? 솔직히 구원씨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겠죠."

    죽자. 천사님을 실망시켰다니. 죽자. 지금 당장 죽자. 나란 놈은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어. 난 버러지야. 이 세상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버러지야.

    "하지만, 전 구원씨가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라씨가 죄를 뒤집어쓰려고 했는데도 나서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조금 질투심이 날 정도로 멋졌는걸요."

    이번에는 살짝 삐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아는 내게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다신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맹세해주실 수 있죠?"

    "응. 맹세할게."

    천사님의 그 자애로우신 말씀에, 나는 이끌리듯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한 순간, 레이아는 방 전체가 밝아질 듯이 환하게 웃으며 내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줬다.

    "그럼 저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을 게요. 전 구원씨를 믿어요. 어쩌다 가끔 잘못된 길을 걸을 지라도, 결국엔 옳은 길을 걸을 거예요. 구원씨는 그런 분이에요."

    크으윽. 천사님…. 천사니이임…!

    내 마음의 더러운 부분이 정화되어가는 기분이야.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천사 같으실까.

    "하아. 멋진 부분은 레이아씨한테 전부 뺏겨버렸네요."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마틸다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저번 화를 조금 수정했습니다.

    실비아가 자신의 퀘스트는 키스라고 대답하자 구원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설정 오류였습니다. 그 전에 이미 구원이 사도 임명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장면이 있었죠.

    그래서 구원이 그 부분을 지적하는 장면을 추가했습니다.

    쓰면서 계속 찝찝하기만 하고 기억이 안 났는데 댓글로 지적해주신 다음에야 기억이 났네요. 지적해주신 i74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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