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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본심 -->
물론 사도 임명을 하기 위해서 퀘스트가 필요하단 가설이 증명됐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래도 일단 우리 애들 모두 퀘스트라고 생각될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건 확실한 것이니까 말이야.
어차피 그 밖에 사도 임명이 실패한 이유가 짐작가는 것도 아니니, 우선은 퀘스트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가정한 채로 생각을 해보자.
마틸다의 퀘스트가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걸린 상태에서 평범하게 대해줄 것’인 게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논리는 다른 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즉, 트라우마 같은 걸로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다.
게임에서도 호감도 제한 해제를 위한 퀘스트는 대게 이런 식이었으니, 사도 임명을 위해선 퀘스트가 필요하단 가설에 더더욱 힘이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내 가설이 맞았다고 한다면, 대체 바넷사의 퀘스트는 뭔데?
트라우마로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준다.
이것만 놓고 보면, 바넷사의 퀘스트는 대대로 내려온 용인족 트라우마를 극복시켜 줄 것이 되는 게 자연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문제는 마틸다의 퀘스트 내용이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었단 말이지.
저주를 푸는 게 아니라, 저주가 걸린 상태에서 평범하게 대해줄 것이었다.
즉, 바넷사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용인족 트라우마를 극복시키는 게 아니라 ‘용인족 상태를 긍정해주고 평범하게 대해줄 것’이 퀘스트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건 이미 내가 한 거잖아!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애초에 그렇게 했으니까 바넷사가 나한테 반한 거잖아! 완전히 퀘스트 완료한 거 아니야?!
여신님! 시스템 오류 생겼어요! 버그 수정 좀요!
위를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강력하게 항의를 해본 나였지만, 물론 여신님이 그에 응답해주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응답이 가능했으면 나랑 맺은 계약인지 뭔지 하는 것부터 확실히 알려줬겠지. 젠장.
"다, 당시인…?"
마틸다의 고백을 들은 내가 한동안 침묵하고 있자 이 어색함을 참을 수 없어진 건지, 마틸다는 부끄러움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내 이름을 불렀다.
이런. 모처럼 다들 보는 앞에서 이런 고백까지 해줬는데, 계속 이 상태로 둘 순 없지.
"응? 아, 미안. 잠깐 생각을 조금 하느라. 알려줘서 고마워. 사랑해."
"아아. 저도 사랑해요오…."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마틸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자, 마틸다는 황홀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내 목을 끌어안고는 그대로 키스를 했다.
"야. 이 바보야! 지금 그럴 때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라가 내 옆구리를 꼬집으면서 바넷사 쪽에 눈치를 줬다.
아니. 너도 봤으니 알겠지만 내가 키스한 게 아니고 마틸다가 한 거거든?
너 그냥 질투 나니까 괜히 바넷사 핑계 대면서 꼬집는 거지?!
애초에 바넷사는 디아나를 생각해서 내 여자가 되는 것까지 거절했던 애니까, 이제 와서 이런 걸로 너처럼 질투할 일 없거든? 그렇지 바넷사?
"……."
어, 어라? 어째 날 바라보는 눈이 조금 더 차가워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뭐, 뭐어…일단 바넷사 일이 우선이니까 지금은 그만두기로 할까.
나는 마틸다의 양 어깨를 붙잡고 부드럽게 마틸다의 몸을 떼어냈다.
"아앙…."
아니. 야.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내지 말아줄래?!
너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도 부끄러워했던 주제에! 지금 이게 더 부끄럽지 않냐?!
"아, 아무튼. 대충 알겠어."
물론 알겠는 건 사도 임명을 위해선 일종의 퀘스트를 수행할 필요가 있을 거란 사실뿐이고, 바넷사의 퀘스트가 무엇일지는 짐작도 되지 않지만 말이다.
"후우…좋아. 그럼 일단은…."
바넷사랑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며 퀘스트가 대체 무엇일지 진득하니 알아봐야지.
그렇게 말하려고 한 순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구원님…실례합니다…."
바로 오늘 하루 내 담당이 될 거라고 말했었던 그 메이드였다.
"응?"
"저, 저기…그, 그러니까…구원님 앞으로 선물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전원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쏠리자 꽤나 당황한 듯, 메이드는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내게 과일 바구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과일 바구니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짐작한 나는 황급히 시간을 살펴봤다. 그리고 역시나, 시간은 어느 샌가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후우…. 그래. 건네주면서 별 말은 없으셨고?"
"네, 네…. 뭔가 할 말이 있으신 모양이었지만, 결국에는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이번에도냐. 과연 이쯤 되면 그냥 병문안 선물로 주고 갔다고 보긴 힘들겠지.
그런 식으로 던전에서 돌아오고 나서 벌써 며칠째 얼굴도 안 보고 있기도 하고, 슬슬 한 번 얼굴 뵈러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바넷사는…하아…요즘 들어서 할 일이 너무 많아. 난 복잡한 건 싫은데 말이야.
우선 하나하나 정리를 해나가기로 할까.
"바넷사. 일단 나 좀 보자. 얘들아 나 잠깐 다녀올게."
나는 아직도 디아나의 한발자국 뒤에서 가만히 서있는 바넷사의 팔을 붙잡고, 근처의 빈 방으로 들어갔다.
바넷사는 내가 팔을 붙잡자 몸을 움찔 떨기는 했지만, 군말 없이 날 따라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겠냐? 당연히 사도 임명 문제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왜 실패한 건지 대충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읏?! 정말입니까?! 어떤 이유입니까?!"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바넷사가 내게 한발자국 더 다가와서는 몸을 밀착시키며 질문을 던졌다.
무뚝뚝한척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바넷사도 상당히 사도 임명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유는 바로…."
그런 바넷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곧장 퀘스트에 관한 얘기를 하려했던 나였지만, 말하기 직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이걸 얘한테 얘기하도 되는 건가?
게임에서 했던 것처럼 편의상 퀘스트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업은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의 빗장을 여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걸 상대방한테 얘기해버리면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자신에게 사도 임명을 하기 위한 행위로, 그러니까 진실하지 않은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걸로 과연 퀘스트 조건이 충족되는 걸까?
"…구원님?"
"생각해보니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네."
"…네?"
결국 나는 바넷사에게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나는 뭔가 있어보이는 표정으로 그렇게 얼버무리기로 했다.
바넷사는 그런 내 반응에 살짝 불안해졌는지 한쪽 눈썹을 움찔하고 떨었지만 말이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말로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그럼 곧바로 사도 임명도 가능하다는 얘기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시간이 필요한 일이라서."
"…구원님의 여, 여자로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그 말입니까?"
"뭐, 비슷한 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란 거지."
생각해보니 우리 애들이랑 했던 퀘스트들도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주제에 점점 더 깊은 인연을 맺어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해결이 된 경우였다.
바넷사도 아마 계속 함께 이런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언젠간 그 정체 모를 퀘스트가 해결될 테니,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란 말도 결코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괜히 안달내지 말고, 천천히 우리 관계를 깊이 다져나가자고. 어차피 사도 임명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나 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잖아?"
"으음…하아…네…."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바네사의 얼굴에 살며시 얼굴을 가져가자, 바넷사도 얼굴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내 키스를 받아줬다.
"그럼 가자."
나는 바넷사의 머리를 한번 뒤로 쓰윽 넘기듯 쓰다듬어준 다음, 다시 바넷사의 팔을 붙잡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럼 전 식사 준비를 하러 가겠습니다."
얌전히 내게 팔을 붙잡힌 채 식당까지 따라왔던 바넷사였지만,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내 손을 풀고는 무뚝뚝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뭐? 뭐하러? 너 어차피 오늘 쉬는 날이잖아."
"꾀병이었습니다."
바넷사는 어차피 아까 내가 썰을 다 푼 덕분에 이제 더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듯, 냉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디아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디아나님. 꾀병으로 일을 빠져서 죄송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일에 복귀하겠습니다."
여전히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앉아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나는, 그런 바넷사를 바라보고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으, 음? 흠. 그런가. 그…오늘은 쉬어도 되네만?"
아까 전에 집사 일을 계속해도 된다고 강하게 긍정해줬기 때문에 이제 와서 정반대되는 말을 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는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디아나는 바넷사에게 조심스럽게 오늘은 쉴 것을 제안했다.
고백은 전에 이미 했다지만, 진정한 의미로 나랑 맺어진 건 오늘부터니까 말이다.
디아나로서도 바넷사를 챙겨주고 싶은 거겠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그런가."
하지만 바넷사는 그런 디아나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디아나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평소엔 디아나가 하는 말은 뭐든 들을 것처럼 행동하는 주제에, 저런 부분은 또 완고하다니까.
나는 디아나의 제안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쉬지 그래? 나도 오늘은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아뇨. 구원님은 레이첼님께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힘을 실어줘도 바넷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로 말이다.
"뭐? 여기서 갑자기 레이첼 누님 이름이 왜 나와?"
"마음에 걸리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너랑…."
"전 정말 괜찮습니다."
살짝 당황한 나는 약간 횡설수설하면서 대답했고, 당연히 그런 말투로 완고한 바넷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실력행사를 하기로 했다.
"읏…!"
바넷사의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자, 바넷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 둘만 있을 때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아줬던 것과는 달리, 이렇게 다들 보는 앞에서 이러는 건 제아무리 바넷사라도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뭐, 키스할 생각으로 이런 건 아니지만.
"정말로. 정말로 괜찮아?"
나는 지근거리에서 바넷사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다시 한 번 되물었다.
"흣…괜찮습니다. 어차피 저와 있어봤자 레이첼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얼굴을 간질이는 내 입김이 간지럽다는 듯 살짝 목을 움츠린 바넷사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뭐, 확실히 아예 레이첼 누님 생각을 안 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저는…저택에서 매일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완전히 부정을 못하는 날 바라보며, 이번엔 안심시키듯 그렇게 말하는 바넷사.
자기도 이런 말 하는 게 답지 않다는 자각은 있는지, 평소와 달리 꺼질 듯이 조그만 목소리로 다른 애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지만 말이다.
물론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고 하더라도, 지근거리에 있는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크으! 그 바넷사가 이런 예쁜 말을 하게 되다니!
나는 곧장 바넷사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키스를 하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근무 중에 그런 행위는 삼가주십시오."
하지만 이번엔 아까와 달리 바넷사의 손에 입술이 막혔다.
진짜냐. 벌써 근무 중이 된 거냐.
"그럼 전 이만 식사 준비를 해야 하므로."
내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살며시 떼어낸 바넷사는, 일견 무뚝뚝하게 들리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뚜벅뚜벅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서. 슬슬 이 몸들에게도 사정 설명을 해주겠나?"
"그, 그래요! 결국 전 왜 이렇게 모두가 있는 곳에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했던 건가요?!"
그리고 사도 임명 실패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아서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우리 애들은, 나와 바넷사의 대화가 끝나자 마자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래도 바넷사랑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 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보다 마틸다야. 너 핑크빛 모드 풀렸구나? 그렇게 울먹이면서 째려보지 마라. 다 설명해줄 테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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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구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