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597화 (581/1,205)

597

<-- 집사의 본심 -->

"…먼저 들어가시지요."

앞장서서 날 식당으로 이끈 바넷사는,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멈춰 서서는 날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바넷사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하긴, 나라도 부끄러울 것 같기는 하다.

모두의 앞에서 ‘전 구원님의 여자가 되진 않겠습니다. 집사로 남겠습니다.’라고 멋지게 선언한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가서는 ‘이제 구원님의 여자가 됐습니다.’라고 말해야 되는 거다.

솔직히 나였다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녔을 거다.

"부끄럽냐?"

"뭐가 말입니까?"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서 장난스런 말투로 그렇게 말해봤지만, 바넷사는 여전히 철가면을 뒤집어쓴 채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에이. 알면서."

"모르겠습니다. 구원님의 여자가 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까?"

오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렇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당연히 아니지. 그럼 이렇게 같이 들어가자."

나는 바넷사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고, 그대로 바넷사와 동시에 식당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물론 바넷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부끄러운 거 맞잖아.

나는 바넷사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고, 그대로 바넷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바넷사 역시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뺨이 미묘하게 붉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역시나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바넷사와 무언의 대치를 하다가 나는 자연스럽게 그 얼굴에 키스를…하려 했지만, 그전에 바넷사의 손에 턱하고 얼굴이 막혔다.

"…무슨 짓입니까읏!"

내 얼굴을 한 손으로 막은 채 무뚝뚝한 반응을 보이려 했던 바넷사였지만, 내가 그 손바닥을 할짝 핥아주자 흠칫하고 놀라며 내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냥 긴장 좀 풀어주려고 했지."

"괜한 짓 하지 말고 가십시오."

바넷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핥아졌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보통 닦는 게 정상 아니냐? 가슴 주머니에 행거칩도 꽂고 있는 주제에.

아님 뭐야? 닦기 아깝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아니 이건 너무 나간 생각인가?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바넷사의 의미 없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예뻐 보여서 곤란하단 말이야.

심지어 저렇게 무표정으로 날 차갑게 바라보고 있는 것마저도 예전이랑 다르게 느껴질 정도니까.

이거 어쩌면 중증일지도.

"…뭡니까."

"아니. 긴장도 좀 풀린 것 같으니까 가자."

나는 허리에 둘렀던 손으로 바넷사의 엉덩이를 한 차례 톡톡 두르려 주고는 앞장서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자네!"

그리고 내가 식당으로 들어가자마자, 디아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게다가 식당에는 디아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라도 레이아도 실비아도 마틸다도 전부 아까 내가 나가기 전에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는가?! 응?! 어떻게 됐는가?!"

"진정해. 내 표정 보면 모르겠어?"

나는 내게 달려들어 질문을 퍼붓는 디아나를 끌어안고 그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킨 후, 내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바넷사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오더니, 디아나를 보고는 허리를 90도로 접으며 사죄를 했다.

"디아나님. 죄송합니다."

"음? 뭐가 말인가?"

"…저번 그런 말까지 해놓고 결국 저는…구원님의 여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디아나의 대응이 상당히 두려웠던 건지 바넷사는 목소리는 물론 살짝 몸까지 떨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디아나에게 전달했다.

그런 바넷사를 바라보고, 디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홱 돌려서 나와 바넷사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아무래도 디아나는 그냥 내가 바넷사의 화를 풀어주기만 하는 것에 그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말했잖아. 믿으라고 말이야.

대체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하단 표정을 감추지 않는 디아나를 보고, 나는 씨익하고 미소 지으며 엄지를 들어 올려줬다.

그러자 디아나는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네 말대로 잘 했잖아!

"…바넷사."

하지만 디아나는 곧바로 다시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바넷사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만 허리를 숙이고 있어서 디아나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바넷사는 디아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쟤 대체 얼마나 긴장한 거야? 이미 전에도 디아나가 내 여자로 인정해 주겠다고 말했었잖아.

물론 그걸 거절했다가 다시 받아들이는 거니까 조금쯤이야 긴장도 되겠지만 말이야.

"잘 생각했네!"

하지만 긴장하고 있는 바넷사와는 달리, 디아나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바넷사의 머리를 꽉 끌어안아줬다.

그거 봐라. 네 주인님을 조금 더 믿으라니까.

"요,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바넷사는 그런 디아나의 태도에 크게 당황했는지, 고개를 들고는 눈에 띄게 울먹이는 표정까지 지어보이며 디아나를 바라봤다.

…야. 어째 나랑 둘이 있을 때보다 표정이 더 풍부한 것 같다? 나랑 디아나랑 비슷한 정도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야 둘이 같이 보낸 시간이 길다보니 표정이나 태도가 더 자연스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내가 설마 내 여자에 관한 일로 내 여자에게 질투를 하게 되다니.

무슨 말이냐고?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조용히 질투심을 불태우는 내 속마음과는 달리, 디아나와 바넷사의 훈훈한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져나갔다.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말하지 않았는가. 이 몸은 자네라면 낭군님의 여자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네. 정말 잘 생각했네."

"…으읏. 디아나님…. 전, 전…."

"음. 음. 아무 말 말게. 괜찮네."

"…아닙니다. 디아나님. 또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연령에 걸맞은 얼굴로 인자하게 바넷사를 다독이는 디아나였지만, 바넷사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지으며 디아나를 쳐다봤다.

"음? 부탁? 뭔가?"

"구원님의 여자가 되더라도, 전 계속해서 디아나님의 집사로 있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절 계속해서 집사로 있게 해주십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오히려 이 몸이 부탁하고 싶을 정도네. 자네가 원하는 한 자네는 언제까지나 이 몸의 집사일세."

"크흑. 디아나님…."

디아나의 한없이 인자한 말에, 바넷사는 결국 그 아름다운 눈에서 한줄기 눈물까지 흘리며 디아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야! 잠깐만! 너 내가 고백할 때도, 방금 전에 내 여자가 된다고 했을 때도 안 울지 않았었냐?! 너 진짜 나랑 디아나랑 비슷한 수준으로 좋아하는 거 맞지?!

물론 진심으로 질투하는 건 아니라고? 지금 당장 저 둘에게 달려들어 분위기를 망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고?

하지만 사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내 팔을 끌고 식탁 반대편으로 갔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라, 다들 날 둘러싸서 벽을 만들기까지 했다.

사라, 레이아, 마틸다, 심지어 실비아까지 다가와서는 말이다.

"지, 질투한 거 아니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저거 보고 질투했어?"

제발이 저려서 곧장 부정한 날 보고 사라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듯 황당하단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뇨. 안 했는데요? 무슨 소리신지? 그, 그보다. 난 왜 여기로 끌고 왔는데?"

물론 나는 황급히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사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이상 뭐라고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궁금하니까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런 우리 대화를 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하고 우아하게 웃은 레이아가,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질문을 했다.

레이아. 그러고 있으면 가슴이 내 몸에…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가기 전까지 화나있는 것 아니었어요? 어떻게 저렇게까지 구워삶은 거죠?"

물론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건 레이아뿐만이 아니었다.

여자가 연애 얘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한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눈치를 못 챘다고.

너희 혹시 나 없을 때 너희끼리 그런 얘기 하면서 보내니?

설마 실비아마저 내게 바짝 다가와서 눈을 빛낼 줄이야.

뭐, 그래도 나와 바넷사의 얘기. 즉, 얘들 입장에선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 얘기인데도 이렇게 질투심보다 호기심을 더 보인다는 건, 다시 말해 얘들도 마음속으론 이미 바넷사를 내 여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니까. 이건 좋아해도 되는 건가?

물론 상황의 특이성도 크게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어제부터 화가 나서 오늘까지 모습도 안 보이던 바넷사가 갑자기 내 여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거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보일 테니, 그야 궁금하기도 하겠지.

"흐야앗!"

"훗. 잘 들어. 지금부터 이 몸의 엄청난 활약상을…."

나는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져서는, 방심하고 있던 실비아를 끌어안고 썰을 풀어나가기로 했다.

실비아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내게 가까이 다가왔었는지 깨달은 듯 몸을 진동시키기는 했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넷사는 결국 나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게 됐다는 얘기지! 어때?!"

"네. 역시 굉장하세요."

"하여간 이럴 때는 쓸데없이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평소에도 이랬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말이죠."

"히야우아으으…."

"흠. 그래서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것이었구먼."

자신만만하게 썰을 푼 나를 솔직히 칭찬해주는 건 역시나 우리 천사님밖에 없었다.

아니. 사라 쟤는 원래 저러니까 그렇다 쳐도, 마틸다 너까지 그런 말은 심하지 않냐? 평소에도 이랬으면 좋겠다니 무슨 말이야! 난 평소에도 스마트한 호청년이라고! 귓가에 속삭이면 바로 인정할 거면서!

아니. 그보다 지금 디아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냐?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어느 샌가 우리 곁으로 다가온 디아나와 바넷사가 있었다.

디아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바넷사는 디아나보다 한 발 뒤에 서서 마치 수치 플레이라도 한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애써 무표정을 만드는 게 상당히 귀여웠다.

"그래서, 보고를 하러 왔다. 이 말인 겐가?"

"응. 그래…아 참! 마틸다!"

"꺄앗! 네, 넷?!"

"질문이 있어!"

"네, 네엣…뭐든 물어보세요오…."

방금 전에 내게 불평을 했던 태도는 어디로 사라지고, 내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자 마틸다는 곧바로 핑크빛 모드에 돌입하게 됐다.

훗. 결국 이럴 거면서 말이야.

내가 평소에도 스마트하다고 인정하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지만, 나는 일단 소기의 목적부터 달성하기로 했다.

"너 전에 저주랑 관계없이 날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지?"

"넷?! 네, 네에…."

과연 핑크빛 모드에서도 이 대답은 조금 부끄러웠던 건지, 마틸다는 주위를 둘러보고 살짝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긍정했다.

"혹시 그 이유가 있어? 나한테 언제 반한 건데? 말해봐."

"넷?! 여, 여기서 말인가요?! 그, 그게…그러니까…."

"역시 있구나. 뭔데?"

"꼬, 꼭 말해야 하나요…?"

"그래. 중요한 일이야."

"웃…으, 으읏…다, 당신이…처음이었으니까…."

"응? 뭐가?"

"제, 제 저주를 알고도…아무렇지 않게 대해준 남자는…당신이 처음이었으니까요오…. 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제 저주에 당신이 영향을 안 받게 된다고 눈치 챈 건…5계층에서 계층의 주인을 잡은 직후였다고요. 하지만 그 전부터 당신은…다른 남자들과 다르게…제, 제게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하는 마틸다는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결국에는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는 수준까지 되어버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기 전에, 듣고 싶은 내용은 전부 나왔다.

그러고 보니…확실히 그런 말을 적이 있었다. 마틸다가 중요한 얘기라면서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지.

그땐 그게 어떤 의미로 한 질문인지 알 수 없었는데, 설마 그게 그런 뜻이었어?!

그렇다면 그게 마틸다의 사도 임명 퀘스트였다는 게 되는 건가? 저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해줄 것이?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i74 // 예전에도 같은 질문이 있었죠. 그런데 제가 나중에 나올 내용에 대해선 일부러 답변을 안 드리고 있기 때문에 답변을 안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겨우 그 이유가 나왔네요.

닭구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어제는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었는지 유독 이상한 문장이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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