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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본심 -->
"바넷사."
"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이름을 불러도 바넷사는 작업을 멈추는 일 없이, 아니. 심지어 내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태도는 마치 ‘떠들 시간 있으면 일이나 해라. 아니. 그냥 방해하지 말고 가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또 미묘하게 상처를 받았다.
저도 모르게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 하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고,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겠는데, 진짜로 저렇게 외쳤다간 일이 더 중요하단 대답이 나올 것 같아서 안 물어본 게 아니라고.
"힘들지 않아? 일, 바꿔서 할까?"
"아뇨. 괜찮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그리고 나한테 물품 확인을 맡겨도 말이야, 원래는 이걸 네가 하는 게 안심되지 않아?"
"괜찮습니다. 구원님을 믿고 있습니다."
바넷사아아아아! 그래! 나 열심히…헛! 조심해! 조심하라고! 이건 공명의 함정이다! 하마터면 감동받아서 그냥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뻔 했잖아!
지금까지 완전 무관심으로 일관한 주제에 갑자기 저런 태도를 보이다니! 저거 노린 게 분명해!
하지만 상대가 나빴어. 나 구원이야. 구원. 성자라고!
"…그리고 함부로 만지기 위험한 물건도 있으니까요."
자신의 천재 같은 책략을 내가 완벽히 간파해냈다는 걸 깨달았는지, 바넷사는 뒤늦게 덧붙이는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내 쪽으론 얼굴도 안 돌리는 주제에 잘도 내가 간파했다는 건 깨닫는군.
과연. 머리 좋은 디아나의 곁에서 평생을 자란 값은 한다는 건가.
"그래도 무거운 것도 있어 보이는데? 그런 건 힘 센 남자한테 맡기는 편이…."
"힘 센…남자 말입니까?"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내 근처에 물건을 하나 옮긴 바넷사는 드디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날 똑바로 쳐다봤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내게는 그 표정이 마치 ‘여기 힘 센 남자가 어디 있는데?’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 그 표정은 뭐냐?"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넷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서 다시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나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바넷사. 넌 지금 건드려선 안 될 녀석을 건드렸어.
바로, 남자의 자존심이란 녀석을!
"잠깐 기다려 이것아."
"…읏! 뭐, 뭡니까?"
내가 뒤돌아선 바넷사의 어깨를 잡아 세우자, 바넷사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나는 그런 바넷사의 몸을 내 쪽으로 돌려세우고, 미묘하게 떨리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그리고 서로의 얼굴사이의 거리가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을 정도까지 다가간 다음, 나는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승부다!"
"…하아."
그리고 내가 외치는 순간, 바넷사는 숨조차 쉬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에 힘을 풀면서 대놓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잠시 일을 멈추고 지하로 오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예전에 그 쓰레…용사 레온과 결투를 했던 그 장소로 말이다.
거기에서, 나와 바넷사는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가까이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간단하다. 팔씨름을 위해서다.
바넷사나 내 힘을 생각해봤을 때, 그냥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고정하고 전력을 다 했다가는 테이블이 박살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파괴 불가능한 재질로 방 전체가 도배되어 있는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얘기다.
"…정말로 한 번만 하고 끝입니다."
처음에는 바쁘다고 거절했던 바넷사였지만, 내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자 결국 날 이길 수는 없었는지 이렇게 같이 내려오게 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얘도 역시 날 좋아하는 만큼 은근히 나한테 무른 건지도 모르겠다.
"알겠다니까. 자, 손!"
"……."
내가 척하고 손을 내밀자, 바넷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팔씨름이 시작되려 하는 순간, 나는 그제야 조금 머리가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어쩌면 좋지?
바넷사의 태도에 욱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상태로는 내 승산은 희박했다.
요즘 실비아, 바넷사, 마틸다와 연속으로 관계를 엄청나게 가지면서 레벨이 또 상당히 오르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아직 바넷사가 나보다 레벨이 더 높았다.
그렇다면 승리를 위해서 근력을 올려야 된다는 건데, 이게 또 그래선 안 된단 말이지.
아니. 보너스 포인트는 있다. 요즘 잘 쓰지도 않아서 차고 넘치게 있다.
다 때려 박으면 근력을 한계치인 500까지 올리고도 남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해보면 그래선 안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내겐 근력에 포인트를 투자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 되는 상황이다.
레벨을 한계치인 250까지 올린다고 가정했을 때, 내 근력은 이미 성자 레벨만으로도 420을 넘어갈 정도다.
거기에 더해 그동안 월영무사의 레벨도 오를 것을 감안해보면, 아마 한계치인 500은 되지 않더라도 그에 근접한 수치가 찍힐 거라는 계산이 나온다.
레벨 업만으로도 그 정도 수치를 찍을 수 있는데, 여기서 근력을 더 찍게 되면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내구처럼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과연 고작 팔씨름을 이기기 위해서 포인트를 버리는 게 옳은 선택일까?
내구를 그러게 무식하게 올릴 때는 그나마 살기 위해 그랬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이래선….
"구원님. 안 하십니까?"
"어? 아, 응."
고민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던 건지, 바넷사가 빨리 시작하자는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바넷사를 보니…이게 또 절경이었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지금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즉, 몸에 딱 맞는 집사복에 감싸인 바넷사의 커다란 가슴이 바닥에 짓눌려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물론 집사복의 특징상 가슴골이 보인다든가 하는 노출은 전혀 없었지만, 저 단정한 복장을 하고 가슴이 강조되듯 눌려있는 모습이 미묘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얘도 가슴이 은근히 크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냉정해진 지금에서야,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지금, 일이랑 관계없이 단 둘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와서 놀고 있는 거 아니야?
승부욕에 불타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이거 완전히 기회가….
"안 하실 거라면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아니야. 한다니까 그러네. 그냥 조금 정신이 팔린 것뿐이야."
"…대체 뭐에 말입니까? 여긴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무슨 소리야. 남자라면 누구나 정신이 팔릴 미녀가 눈앞에 있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마주잡은 손을 부드럽게 주물럭거리자, 바넷사의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그런다고 해서 제가 봐드릴 거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 안 했다니까. 그보다 바넷사. 잠깐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
됐다! 완전히 좋은 분위기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기세를 몰아서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어제 우리 애들에게 잠깐 모습을 보인 이후로는 다시 평범한 인간 모습으로 생활하는 바넷사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에게 용인족의 모습이 보이는 게 두렵기 때문일 거다.
때문에 아까 전에 바넷사를 만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할 때도, 용인족으로 변해 있으라는 말은 염두조차 하지 않았던 거다.
트라우마가 심한 애한테 갑자기 그런 모습을 강요해봤자 효과적으로 치료가 될 거란 생각은 안 드니까 말이다.
창고에서 단 둘이 됐을 때 말을 해보려고 하기도 했지만, 창고라는 특징상 다른 메이드들이 가끔 물건을 가져오러 드나들기도 했었기 때문에 결국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기라면?
나하고 단 둘밖에 없는데다가, 여기는 정말 웬만해선 다른 사람이 올 가능성이 없는 곳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에이. 알면서 그러냐."
내가 일부러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잡은 바넷사의 오른손을 아예 양손으로 붙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자, 바넷사의 몸이 또 한 번 움찔하고 떨렸다.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자신의 엉덩이 위로 가져가 눌렀다.
그렇게 왼손으로 눌린 엉덩이가, 내 눈에는 미묘하게 좌우로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꼼지락대듯이 말이다.
"바쁘다고 말했습니다만."
물론 그런 몸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바넷사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딱 잘라 거절했다.
"응? 바쁜 거랑 무슨 상관이야?"
"…몰라서 묻습니까?"
"몰라서 묻는데?"
말하기 싫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회피하는 바넷사였지만,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몰아붙였다.
"…구원님과 하는데, 대체 얼마나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왜? 나랑 하게 되면 빨리 마무리할 자신이 없어?"
"제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구원님이…."
"자신 없구나. 하긴 전에도 이성을 잃을 정도로 좋았던 모양이니까."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날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봐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 이것아.
대답을 못 한다는 건 긍정한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바넷사. 그거 알아?"
"…뭘 말입니까?"
"나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
"…예?"
"아니. 뭘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고 그러냐. 엉큼하게. 바넷사, 야해."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내 손을 붙잡고 있던 바넷사의 오른손에 아귀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파! 아프다 이것아! 내 손을 찌부러트릴 셈이냐?!
아니! 진짜로 아픈데?! 야. 사과할 테니까 손에 힘 좀 풀지 않을래? 아니. 풀어주지 않으실래요?
게다가 더 힘든 건, 지금의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겉으로 표출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참자. 참는 거다. 구원아.
"…그럼 무슨 뜻이었는지 설명해보시죠."
"난 네 원래 모습이 예쁘니까 그 모습을 보고 싶다는 뜻이었지. 아, 말해두겠는데 지금 모습이 안 예쁘단 뜻은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 모습이라면 매일같이 본 거고, 네 원래 모습은 다른 사람한테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잖아? 그러니까 단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그 모습으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지."
나는 간신히 미소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넷사의 아귀힘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까와는 다르게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손에 느껴지는 고통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엔 그냥 손이 꽉 쥐어지는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 어서 팔씨름이나 하시죠. 전 바쁩니다."
"끄아아악!"
바넷사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말투로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내 손을 바닥에 처박아버렸던 거다.
"제 승리로군요. 그럼 이만."
"기다려 이것아."
바넷사는 그렇게 말하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 방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나는 잡고 있던 바넷사의 손을 놓지 않고 일어난 후 그대로 잡아 당겨서 바넷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바넷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그 엉덩이를 힘껏 끌어안아 내 몸에 밀착시켰다.
오른손에 느껴지는 격통은 아직도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그나마 손바닥에 퍼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격통을 완화시켜주는 것 같았다.
"닳는 것도 아니고, 예뻐서 좀 보자는데 그런 태도는 아니지 않아?"
"…바지가 닳습니다만."
"살짝 내리고 변하면 되지. 어차피 너랑 나밖에 없는데."
"…그런 뜻은 없었던 것 아닙니까?"
"없었지. 그런데 이제 그런 마음도 생겨버렸어."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바넷사의 엉덩이를 한 번 강하게 꽉 주물렀다.
그리고는 그대로 손을 움직여서, 바넷사의 벨트를….
"끄아아악! 잠깐! 항복! 탭! 탭!"
"…그러니까 바쁘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용무는 없으신 모양이니. 전 이만 가겠습니다. 구원님은 더 안 도와주셔도 됩니다."
내 손을 붙잡고 간단히 손목을 꺾어버린 바넷사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다만 냉정한 그 표정이나 말투와는 다르게, 그 발걸음은 평소 바넷사답지 않게 상당히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마치 이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된다는 것처럼.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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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 본업 쪽이 너무 바빠서 글 쓸 시간이 잘 안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