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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본심 -->
자,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홀로 팔짱을 끼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했다.
오늘은 어제처럼 날 구속하는 일 없이 다들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가려고 하면 곧장 말리겠지.
디아나하고는 어떻게 얘기가 잘 됐지만, 다른 애들은 아직도 내가 안정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내가 근처에 있는지 확인 가능한 목걸이까지 건네 준 이상, 몰래 밖에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나는 얌전히 오늘도 저택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저택에서 할 일도 있고 말이다.
바넷사가 내게 더더욱 푹 빠지게 만든다는 중요한 일이.
하지만 빠지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팔짱을 끼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본 결과, 나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주변에 여자가 많이 생겨서 하렘 같은 상황까지 되었다보니 스스로도 착각하고 있었어.
뭔가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려는 것처럼 이러고 있는데 말이야, 애초에 난 지금까지 스스로 나서서 여자를 꼬셔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지금까지 나한테 넘어온 여자들은 전부 같이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호감이 생기게 된 케이스였다.
물론 실비아와 마틸다는 반하게 된 계기 같은 게 조금 특이한 케이스이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사도 임명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내 여자가 될 정도로 애정이 깊어진 건 같이 지내면서 그렇게 된 거다.
그나마 바넷사의 경우와 비슷한 케이스라면 레이첼 누님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 누님 역시도 바넷사의 경우와 완전히 상황이 같은 건 아니었다.
내게 좀 더 애정을 갖게 만들어야하는 바넷사와는 달리, 누님의 경우는 이미 날 향한 애정이 차고 넘칠 정도로 있으시다.
혼자서 4계층을 떠다니면서 날 찾아다니고, 날 발견하고 의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패닉상태가 되어서는 무작정 섹스를 했을 정도니까 말이야.
그러니 난 누님을 만날 때마다 그저 단순하게 내가 다른 애들과 동시에 누님도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다고 믿음을 주기만 하면 됐다.
즉, 형식상으론 아직 내 여자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냥 내 여자 대하듯이 대하기만 하면 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넷사는…여자가 내게 반하게 만든다는 거,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설마 이런 기본적인 단계에서부터 막혀버릴 줄이야.
아무리 머리를 싸쥐고 생각해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아니. 나도 일단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 대충 맘에 드는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는 있어. 이론상으로는 말이야.
하지만 상대는 그 바넷사라고?
몸에 피 대신 얼음물이 흐를 것 같은 그 바넷사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꼬드긴다고 해서 과연 넘어올까?
심지어 실전 경험도 없이, 그저 이론상으로만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는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남자들이 하는 것보다야 성공률이 높기는 할 거다. 일단 내게 고백을 할 정도로 좋아하기는 하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성공률은 낮아보였다.
난 지금 바넷사의 안에서 디아나를 향한 감정보다 날 향한 감정이 더 커지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
게다가 수대에 걸쳐서 내려온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서라는 중대한 목적까지 가지고.
그런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어설픈 작전보다는, 뭔가 더 확실한 게 필요했다.
바넷사가 확실히 감정의 변화를 보일 정도로 강렬한 한 방이.
그리고 그런 강렬한 한 방이라면, 지금 내게 생각나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섹스말이다.
아니. 아니라고. 머리에 섹스만 가득차서 그런 게 아니라고.
그게 말이야, 소위 말하는 떡정이란 것도 있잖아?
그리고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자신 있는 분야로 상대를 끌어들여 승부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 아니겠어?
거기에 더해 내가 지금까지 바넷사랑 알고 지내면서 제일 그 철가면이 많이 벗겨졌을 때가 바로 섹스할 때였으니까 말이야.
다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섹스란 결론이 나온 거라고.
게다가 바넷사도 스스로 말했잖아? 가끔씩 사랑받고 싶다고.
즉, 하자고 해도 된다는 뜻이잖아?
어차피 여기서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끙끙 거려봐야 이것보다 더 좋은 생각도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킨 나는, 일단 바넷사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라, 바넷사가 찾아오는 거지만 말이야.
"바넷사!"
나는 곧장 박수를 치면서 바넷사를 불렀다.
물론 바넷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바넷사씨. 혹시 바쁘시지 않으면 잠깐 얼굴 좀 비쳐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바쁩니다."
그리고 이번엔 박수 없이 정중하게 말하고 나서야, 바넷사는 어디에선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 탓인지 그 시선은 꽤나 차갑게 느껴졌다. 아니. 절대 기분 탓이 아니겠지.
"무슨 일이십니까?"
"하자. 지금. 당장."
바쁜 것 같은 바넷사에게 최대한 빨리 용건을 전하자,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바넷사의 시선이 점점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그것으로 변해갔다.
야. 너 진심으로 그 표정 그만둬라. 상처받는다고.
내 멘탈이 튼튼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삶의 의욕을 잃을 수준이라고.
아니. 물론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
그렇게 한동안 날 쓰레기 보듯 쳐다본 바넷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서 사라지려고 했다.
"자, 잠깐 스톱!"
"…후우. 뭡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 표정 그만 두래도. 너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나 운다? 다 큰 남자가 엉엉 우는 거 보기 싫으면 얼른 그 표정 그만 둬라.
"농담이었으니까 너무 그렇게 정색하지 마라."
"농담이었습니까?"
"…하, 하핫. 제법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군."
"볼 일이 없으면 전 이만…."
"그러니까 스톱! 볼 일이라면 있어!"
"그러니까 뭡니까?"
아무래도 정말로 바쁜 모양인지, 내가 다시 한 번 불러 세우자 바넷사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플랜 A. 섹스로 친목 다지기가 물 건너 간 거다.
플랜 B로 작전을 변경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사전에 그런 건 없다.
젠장. 대체 어떻게 하면.
내 대답을 기다리는 바넷사의 눈빛이 차가워지면 차가워질수록, 내 머리는 점점 더 맹렬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를 굴린 보람이 있었는지,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됐다.
그래! 내가 지금까지 왜 이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
내가 스스로 여자를 꼬드기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여자가 내게 꼬여진 상황을 되새겨보는 거다.
대부분의 경우가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긴 경우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바넷사마저도 그런 경위로 날 좋아하게 된 케이스일 거다.
즉, 난 굳이 여자를 꼬드기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계속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언젠간 날 향한 호감이 디아나를 향한 그것보다 더 커지게 될 날이 오겠지.
이 역발상을 이제야 깨닫다니.
게다가 타이밍 좋게도, 지금은 바넷사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안 그래도 지금 바쁜 모양이니까 말이야.
"바쁘다고 했잖아? 도와줄게."
"거절하겠습니다."
그렇게 내 돈오에서 비롯된 획기적인 제안을, 바넷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칼같이 거절했다.
설마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나는, 살짝 당황하면서 바넷사에게 달라붙었다.
"왜, 왜?!"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몰라서 묻는다!"
바넷사의 거절하는 게 당연하다는 그 태도에, 나는 살짝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바넷사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한 채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주인에게 자기 일을 떠넘기는 집사가 어디 있습니까?"
"너 치사하게! 언젠 나보고 주인 아니라면서!"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그러니까 내 전매특허 써먹지 말라고!
얘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애들이 날 상대로 저 말을 자주 써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정작 나는 거의 못 써먹고 있는데 말이야.
"그럼 주인이 아니라 네 남자로서…."
"…구원님의 여자가 되는 건 거절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으그그극!"
내가 바넷사를 찌릿 노려보자, 이번에는 바넷사도 조금 미안했는지 살짝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내게 일을 돕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는지, 바넷사는 아까보다 살짝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애초에 갑자기 왜 일을 도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제가 지금 무슨 일 때문에 바쁜 건지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다! 왜?!"
꽤나 희귀한 바넷사의 부드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오기만 남은 나는 계획이고 나발이고 다 포기하고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읏!"
하지만 또 그게 먹혀들었는지, 내 대답을 들은 순간 바넷사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리고 이번엔 시선뿐만이 아니라, 아예 얼굴을 뒤쪽으로 빠르게 홱 돌리면서 내가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오호라. 이거 봐라?
그리고 그런 바넷사의 반응을 보고, 나는 형세가 역전됐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기만 남아서 애처럼 굴었던 주제에, 나는 곧장 마음을 가다듬고 바넷사를 몰아붙일 준비를 했다.
"바넷사. 오늘은 계속 네 얼굴을 보고 있고 싶어."
"그러니까 그런 건 다른 분들과 하십시오. 전 구원님의 여자가…."
"다른 애들이 아니라 네 얼굴이 보고 있고 싶은 거야. 너만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나도 널 좋아한다고."
"지금 발언. 다른 분들 귀에 들어가면…."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널 좋아하더라도 걔들을 향한 애정이 줄어드는 게 아니란 건 걔들이 더 잘 아니까. 그러니까 바넷사. 오늘은 네 곁에 있게 해주겠어?"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바넷사의 허리를 끌어안으려고 한 순간, 바넷사의 손이 내 손을 탁하고 쳐냈다.
아, 그건 안 되는구나. 응.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조금 떨어지십시오."
"난 오늘 너와 계속 이렇게 같이 붙어 있고 싶은…."
"떨어지십시오."
"네."
조금 더 부끄러워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얜 진짜 무표정이 아니면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후우. 오늘 할 일은 창고 정리입니다. 구원님은 재고 확인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케이. 오케이. 그쯤이야 간단하지. 맡겨둬."
그 과정이 조금 억지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드디어 바넷사와 같이 있을 수 있는 구실을 얻었다는 사실이 기뻤던 나는 바넷사의 부탁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기뻤던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딱히 창고의 재고 확인 작업이 힘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물건을 확인하고 숫자만 종이에 써넣으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으니까 말이다.
애초에 돕는 것 자체를 거절했던 바넷사가 내게 힘든 일을 시킬 거라고 생각하기도 힘들고.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디아나의 창고다.
각종 신기한 물건들이 산더미 같이 있어서, 솔직히 보물 탐험하는 기분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을 정도다.
"우왓! 이거 뭐야?! 마검 알레인?! 이름부터 엄청 세 보이는데?!"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손에 쥔 자의 생명력을 대가로 힘을 부여한다고 하는 저주받은 마검입니다. 아무리 구원님이라도 함부로 건드리는 건 위험할 겁니다."
내가 음울하게 빛나는 검푸른 검에 손을 대려고 하자, 창고의 반대쪽에 있던 바넷사 살짝 주의를 주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머, 멋있다! 완전 설정부터 주인공만이 다룰 수 있는…아니! 지금 이게 아니잖아!
바넷사가 내게 빠지게 만드는 계획은 어떻게 된 거야!? 전혀 진전이 없잖아!
얼굴을 마주보고 있기는커녕 대화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종이에 물품들의 숫자를 끄적거리는 동안, 바넷사는 창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량 파악이 끝난 물건부터 차례로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 힘쓰는 일은 바넷사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계획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서 신경이 곤두선 건지,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도 내게는 미묘하게 굴욕적으로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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