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579화 (56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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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본심

    "바넷사씨의 본모습은 저런 모습이었군요."

    그 흔들리는 꼬리를 바라본 것이 나 뿐만은 아니었던 건지, 옆에서 레이아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요. 저 모습으로 트라우마라니. 같은 여자가 봐도 충분히 예쁜데 말이죠. 그런 게 아니면 아무리 딱한 사정이 있더라도 이 바람둥이가 좋다고 달려들 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라가 옆에서 그 말을 받아주면서도, 은근히…아니. 대놓고 날 디스했다.

    "야. 바람둥이는 너무하지 않냐?"

    "그럼 아니라고?"

    "…맞지요. 죄송합니다."

    그냥 반사적으로 반론해본 나였지만, 생각해보니 이 상황에서 내가 그 말을 부정할 방법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바넷사가 거절하기는 했지만, 첩을 한 명 더 늘리려고 하기도 했었고.

    "그, 그보다 다들 바넷사의 용인족 모습 눈치 채고 있었구나?"

    "그야 당연히 눈치 채죠. 저렇게 대놓고 변했는데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요?"

    마치 드디어 자기도 입을 열어도 될 주제가 나와서 다행이라는 듯, 마틸다가 그렇게 말하면서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무래도 계속 조용히 사태를 지켜만 보고 있는 게 상당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난 꼈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마틸다나 실비아도 내 여자인 건 변함이 없으니, 발언권은 충분히 있다고 보는데.

    "아니. 다들 아무 언급도 없었잖아. 혹시나 해서."

    "헷?! 으햣?!"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마틸다의 옆에 오도카니 앉아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실비아를 꽉 끌어안았다.

    하아…힐링된다. 진짜 오늘은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는데, 고작 이 몇 시간동안 일어난 일 때문에 기가 빠진 기분이야.

    심지어 아직 얘기가 끝난 것도 아니란 말이지.

    "바넷사씨는 저 모습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으니까요. 아무 말 안 하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과연. 그런 건가.

    뭐, 아까 전 대화부터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얘들은 바넷사가 저 모습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아마 나보다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난 그저 바넷사의 행동을 보고 추측한 것에 불과했지만, 얘들은 디아나한테 사정을 직접 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 잘했어. 트라우마가 심하긴 심한 모양이더라."

    "그리고 지금으로선 자네가 바넷사의 트라우마 극복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걸세. 생각만큼 잘은 되지 않은 모양이지만 말일세."

    내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디아나가 한숨을 내뱉으면서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 타이밍이 너무나도 절묘해서, 마치 이 이상 내가 입을 여는 걸 막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튼 디아나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조금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 애들이 디아나의 말만 듣고도 바넷사를 받아들여주겠다고 한 이유.

    그리고 애초에 디아나가 바넷사와 내 관계를 지지하게 된 이유.

    혹시 전부 바넷사의 용인족 모습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전부 앞뒤가 맞는다.

    실비아나 마틸다와 마찬가지로, 바넷사 역시 나와 관계를 가져야할 이유가 있었던 거다.

    물론 그 둘과는 다르게,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섹스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는 거지만.

    트라우마 극복만을 위해서라면 바넷사와 꼭 섹스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아니. 옆에서 지지하며 트라우마 극복을 돕기 위해선 깊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고,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섹스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자네들. 미안하네만 조금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나? 조금 이 자와 단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일세."

    "그래요. 알겠어요."

    "구원씨. 나중에 봐요."

    디아나가 피곤하단 표정으로 이마를 손으로 짚고 그렇게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을 나서려고 했다.

    "왜? 그냥 얘들 있는데서 말하면 안 돼?"

    "바넷사를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정을 말하기는 했네만, 그래도 이건 바넷사의 사적인 문제 아닌가. 너무 떠들고 다니는 건 이 몸의 성격에 맞지 않네. 무엇보다도…."

    "응? 무엇보다도?"

    "자네는 그저 실비아양을 껴안고 있고 싶을 뿐이 아닌가."

    칫. 들켰나. 어쩔 수 없잖아.

    이러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머리도 더 잘 돌아간단 말이야.

    나는 하는 수 없이 실비아를 품에서 놔줬다.

    "흐햐아아…."

    벌써 저렇게 헤롱헤롱 거리다니. 실비아야.

    설마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약발이 다 됐니?

    너 사도 임명도 버텨냈잖아. 좀 더 잘 버티자고.

    "그래서, 할 얘기란 건?"

    아무튼 그렇게 우리 애들이 방을 나서게 되고, 나는 디아나와 단 둘이서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렇구먼. 일단 사정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구먼. 그래. 우선 자네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말하는 걸 보니 바넷사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을 하고 있는 모양이네만."

    "응? 자기 용인족 모습이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정도?"

    "후우…. 역시 그렇구먼. 바넷사 그 아이가 자세한 설명을 했을 리가 없지. 그나마 자네가 트라우마에 대해 눈치라도 챈 게 다행이라고 해야겠구먼."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이들에겐 자네가 사정을 전부 이해한 상태에서 바넷사를 구하기 위해 바넷사와 관계를  가질 결심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네. 혹시 자네가 말실수라도 할까 이 몸이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아는가?"

    "뭐어? 너 그래서 다른 애들은 내보낸 거였어?"

    "바넷사의 개인사를 다른 이들에게 터놓기 싫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네."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티 테이블에 앉아서, 마른 목을 축이듯 이미 완전히 식어버린 차에 다시 입을 댔다.

    "그래서. 그 사정이란 게 대체 뭔데? 분위기를 보니 그냥 외모 트라우마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음. 그렇구먼. 꽤나 긴 얘기가 될 걸세."

    그렇게 운을 뗀 후 이어지는 얘기는, 디아나의 말대로 꽤나 긴 얘기였다.

    그리고 들으면 들을수록, 바넷사의 트라우마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몇 대에 걸쳐져 내려오며 마치 세뇌된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공포심이라니.

    바넷사의 반응을 보고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닐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문제였다.

    외모운운이 문제가 아니라, 바넷사의 마음속 깊이 각인된 용인족으로서의 공포심을 극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넌 내가 그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음. 그게 아니라면 이 몸이 왜 자네와 바넷사의 관계를 다른 이들을 설득까지 해가며 지지하겠나?"

    "하지만 그건…."

    "알고 있네. 그리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하지만 자네는 성자 아닌가?"

    "야.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내 성자는 그 성자 아니다."

    …요즘은 그 성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힘들어지게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무엇보다도, 이 몸의 낭군님 아닌가. 이 몸은 자네를 믿네. 아니면 뭔가? 바넷사의 마음을 얻을 자신이 없는 겐가?"

    "야. 그걸 말이라고 해? 나 성자야! 성자!"

    "음. 알고 있네."

    아, 낚였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애초에 바넷사는 내 여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말이야. 이제 와서 달라지는 건 없지.

    "그래서, 디아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음. 그렇구먼. 우선은 바넷사가 자네에게 좀 더 빠지게 만들 필요가 있어 보이네. 보아하니 아직 자네에 대한 사랑이 이 몸에 대한 충성심을 뛰어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구먼. 그게 아니라면 방금 전 바넷사의 태도는 설명이 안 되니 말일세. 그래서 말이네만. 우선은 바넷사가 이 몸을 존경하는 것 이상으로 자네를 사랑하도록 만들게. 자네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이 몸의 말을 어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일세."

    "야. 우선은 이라고 말해놓고 처음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은 주문을 하는 거 아니냐?"

    "이 몸이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는가?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바넷사는 트라우마를 평생 극복하지 못할 걸세. 지금같이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우선 제대로 자네의 첩으로 삼아야지 트라우마 극복의 기회도 엿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거야…."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다.

    바넷사가 부탁한 지금의 관계는 너무 어설프기 그지없다.

    집사로 지내면서, 가끔 사랑을 나누는 관계라니. 그게 대체 뭐야?

    게다가 이대로 가면 그마저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철가면처럼 보이는 바넷사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방금 전 발언마저도, 아직 나와 관계를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고양된 상태로 내뱉은 말일 가능성이 있다.

    고양된 상태에서 내뱉은 말마저 저런데, 만약 고양감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면?

    다시 본래의 바넷사 상태로 돌아가서, 디아나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커지기까지 한다면?

    가끔 사랑을 나누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질 가능성마저 있는 거다.

    디아나의 말대로, 우선은 확실히 내 첩으로 들여놓아야지 이후에 어떤 식으로든 바넷사와 접하기 편해진다.

    "그러니까 자네. 부탁하네. 지금부터는 틈만 나면 바넷사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애정을 갈구하게 하는 걸세. 알겠는가?"

    "알겠어."

    눈썹을 찌푸리고 한껏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렇게 말하는 디아나의 미간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어 주름을 펴주고, 나는 대답을 하면서 그대로 디아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인가! 이 몸이 애정을 갈구하게 만들라는 말이 아닐세!"

    "알아. 디아나는 벌써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나한테 넘어온 상황이니까. 이 이상 애정을 갈구하게 만들 수도 없잖아?"

    "우…!"

    "그냥 너무 예뻐서. 사실 디아나도 날 남과 엮이도록 하는 게 그리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텐데도."

    "바네사 그 아이는 이 몸에게도 남이 아닐세. 확실히 이 몸의 낭군님과 엮게 만드는 건 미묘한 기분이기는 하네만…괜찮네. 어차피 자네는 이 몸에게 푹 빠졌으니 말일세. 이제 와서 한 명 더 늘어난다고 이 몸에 대한 애정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 아닌가?"

    "당연하지. 세상에 어떻게 디아나에 대한 애정이 줄어들겠어. 만약 디아나가 나에 대한 사랑이 식더라도 난 영원히 디아나를 사랑할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디아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내 입술이 그 부드러운 입술에 닿기 전에 중간에서 가로막은 물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디아나의 손이었다.

    뭐, 이것도 부드럽단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흐햣! 뭐, 뭘 핥는 겐가?! 코, 코홈! 아무튼 자네는 또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는구먼. 반대의 경우라면 모를까 이 몸의 사랑이 먼저 식을 일은 없네. 자네가 이 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 몸이 자네를 더 사랑하니 말일세."

    디아나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싸움이 시작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됐음을!

    "야. 잠깐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더 사랑하거든?"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이 몸이 더 사랑하네."

    "내가…!"

    "이 몸은 자네 한 명만 바라보니 말일세."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은 순식간에 내 패배로 막을 내렸다.

    야. 이 타이밍에 그 발언은 치사하지 않냐?

    이번엔 자기가 나한테 다른 여자를 꼬드기라고 말하고 있었던 주제에.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내가 할 말이라곤 전혀 없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후흥. 알겠으면 이 몸에게 앞으로 더 잘하게."

    "네이. 네이.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바넷사에게도 말일세. 꼭 좀 부탁하네."

    살짝 삐진 말투로 대답하는 날 보고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디아나는 다시 한 번 진지한 말투로 바넷사의 일을 부탁해왔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나보단 네가 훨씬 더 귀엽거든?

    "맡겨만 둬. 나 없인 죽고 못 살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내 머리를 쓰다듬던 디아나의 손이 콩닥하고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저번 화는 솔직히 시간도 없고 내용도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그냥 중간 중간 잘라가며 썼는데 다들 날카로우시네요.

    피드백을 받아들여서 저번 화 내용을 더 늘렸습니다.

    흐름이 아주 변하진 않았지만, 내용이 상당히 늘어났으니 이왕이면 다시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닭구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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