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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68화 (55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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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본심

    바넷사는 디아나가 명한대로 디아나의 방에서 디아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디아나를 기다리는 바넷사의 마음속에는 여러 상념들이 복잡하게 뒤섞이며 휘몰아쳤다.

    평소 다른 사람으로부터 감정이 없는 것 같다는 평가를 자주 들을 정도로 무뚝뚝한 성격의 바넷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정말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디아나님의 곁에서 디아나님을 보필하는 것에만 충실한 기계였다면.

    그랬다면 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쯤 이렇게 디아나님의 방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을 일도 없을 텐데.

    디아나님은 눈치 채신 걸까?

    요즘 구원과 같이 지내면서 상당히 감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 디아나님이지만, 원래 디아나님하면 세계 최고의 마법사. 그야말로 이성의 화신 같은 분이었다.

    자신이 이런 성격이 된 것도, 어렸을 때부터 디아나님을 보고 동경하며 자랐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디아나님이다. 분명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지만, 속으론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분명 알고 계실 거다.

    그게 아니라면 그 타이밍에 자신을 이렇게 따로 불러낼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어떤 표정으로 디아나님을 뵈어야 하는 걸까.

    바넷사의 마음에 더더욱 깊은 죄책감이 휘몰아쳤다.

    그렇게 바넷사가 계속해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때, 드디어 눈앞의 방문이 열리며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디아나의 모습을 보자, 바넷사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떨렸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 없어진 바넷사였지만, 어떻게든 평온을 가장하고는 디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음. 기다렸는가. 그럼 어디 앉아서 얘기하세."

    역시나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디아나님의 얼굴.

    아니. 자세히 보면 얼굴이 조금 붉었다.

    구원과 단 둘이서 무슨 말을 하고 온 걸까? 아니. 무슨 짓을 하고 온 걸까?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그 장소에서.

    디아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부터 했다는 걸 깨닫고, 바넷사는 더더욱 죄책감에 휩싸였다.

    "앉게."

    "…네."

    디아나는 방 안에 있던 티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고는, 정면에 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바넷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디아나가 자리에 앉아있을 때, 보통 자신의 정위치는 디아나의 뒤쪽인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하고 앉게 되니, 바넷사는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아니. 안절부절못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가. 과연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부터 할 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말이다.

    설마 자신이 바넷사와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줄이야.

    물론 언젠가 바넷사의 연애 얘기를 들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자신과 바넷사의 사이가 단순히 주종관계가 아니라는 건, 비단 자신만의 생각이 아닐 테니까.

    말 그대로 태어났을 때부터 쭉 봐왔던 거다.

    바넷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자신은 바넷사를 손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바넷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언젠간 연애 얘기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남자에게 전혀 관심 없단 태도를 일관해오던 무뚝뚝한 바넷사지만, 평생 혼자 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 자신이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만약 짝이 생기지 않는다면, 자신이 좋은 짝을 찾아줄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 후보로 자신의 낭군님은 추호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설마 그 바넷사가, 자신의 낭군님에게 반하게 될 줄이야.

    어렸을 때부터 유독 자신을 잘 따르고 닮으려 하는 바넷사였지만, 설마 남자 취향마저 닮을 줄이야.

    아니. 이건 취향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낭군님이 너무 멋진 것뿐인가.

    음. 생각해보니 낭군님과 계속 얼굴을 마주하면서 안 반하는 게 무리인가. 낭군님. 멋지니까 말이지. 어쩜 그리 자상한지…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기는 하지만.

    아무튼 디아나는 눈앞의 바넷사를 두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대화의 주제는 처음부터 정해져있지만, 대체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좋을까.

    "흠. 그래서. 바넷사. 이 몸에게 뭔가 할 말은 없는가?"

    "……."

    너무 오래 침묵하고 있으면 분위기가 무거워질 뿐이다.

    어떻게 주제를 꺼내야 할지 정하지 못한 디아나는, 일단 바넷사 스스로 말을 하도록 유도를 해봤다.

    말을 내뱉고 나서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게 최선일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자신이 먼저 말하면 죄를 추궁하는 것처럼 되어버리지만, 그 전에 바넷사가 먼저 말하면 그나마 고해하는 기분이라도 들 테니까.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디아나의 그 말을 듣고, 바넷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디아나의 그 말로 드디어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디아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눈치 채고 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죄책감이 바넷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고 바넷사의 표정을 보고, 디아나도 바넷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표정을 읽기 힘들다고 말하는 바넷사의 얼굴이지만, 디아나는 바넷사의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하아. 바넷사. 이 몸은 추궁하는 게 아닐세."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장하며 그렇게 말해봤지만, 바넷사는 몸을 한 차례 움찔 떨기만 할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바넷사. 정말로 이 몸이 먼저 말하기를 바라는 겐가?"

    "……죄송합니다. 구원님께…품어선 안 되는 감정을 품고 말았습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결국 바넷사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을 기세로 허리를 푹 숙이며 디아나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그런 바넷사를 보고, 디아나는 역시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오늘 낭군님과 같이 있는 바넷사의 반응을 보고 확신을 가졌을 뿐, 이전부터 계속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화장을 했을 때도 낭군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하는 줄 알았고, 낭군님에게 유독 차갑게 대하는 것 역시 낭군님을 그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했었고 말이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단계라고 자신을 속이며 지금까지 시간을 끌고 말았다.

    "그렇구먼.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자네가 남자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빠질 성격은 아니라고 보네만."

    물론 낭군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할 정도로 멋지기는 하지만.

    그 생각은 굳이 말로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만 고이 묻어두기로 한 디아나였다.

    물론 바넷사를 손녀처럼 생각하는 디아나지만, 일단 표면상의 관계는 주종관계니까 말이다. 어느 정도 위엄은 유지하지 않으면.

    하지만 그렇게 위엄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바넷사의 다음 말에 금방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구원님과 우연히 살을 맞대게 된 이후부터입니다."

    "그렇게나 일찍 말인가?!"

    바넷사가 구원과 우연히 살을 맞대게 됐을 때라니.

    한참 전의, 구원이 성역 선포를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무렵의 일 아닌가!

    예상보다 한참 전부터 바넷사가 구원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디아나는 그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게다가 그때부터 좋아하게 됐다는 말은 즉, 그런 뜻 아닌가?

    바넷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고를 때 속궁합을 제일 중시하는 성격이었던 건가?!

    디아나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졌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고, 바넷사 역시도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디아나님은 알고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구원과 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디아나님은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고 있었던 거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이 더더욱 커졌다.

    역시 처음부터 디아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지금부터라도 솔직히 모든 걸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자.

    "……네."

    게다가 긍정해 버렸어?!

    정말로?! 정말로 그런 겐가!? 바넷사. 자네가 설마 그렇게 섹스를 좋아할 줄이야….

    설마 지금까지 여자만 있는 저택에서 일하게 하는 게 고문처럼 느껴졌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

    어렸을 때부터 봐와서 바넷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디아나였지만, 지금은 그 생각에 자신을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계속 입 다물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날 본의 아니게 다시 한 번 구원님과 살을 맞대게 된 이후로, 저는…."

    "음? 다시 한 번? 얼마 전 얘기를 하는 겐가?"

    "…옛?"

    그리고 그제야 디아나와 바넷사는 서로의 대화가 뭔가 맞물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잠깐. 잠깐 기다려보게. 그러니까 자네 말은 즉. 이 몸이 모르는 사이에 자네와 낭군님이 또 몸을 겹친 적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겐가?"

    그리고 머리 회전이 빠른 디아나는, 곧장 어떤 부분이 맞물리고 있지 않은 건지를 눈치 채고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네."

    이놈의 낭군님을 그냥 콱!

    바넷사가 대답하는 순간,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구원의 곁으로 달려갈 뻔 했다.

    하지만 아직 바넷사와의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낭군님을 처리하는 건 일단 이 얘기가 끝난 다음으로도 충분하다.

    "호, 호오…. 그, 그런가. 어, 어디 한 번 자세히 얘기해 주겠나…?"

    분노로 인해 목소리가 떨리는 걸 자각하면서도, 디아나는 일단 자리에 앉아서 바넷사의 얘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이야. 낭군님이 아무 이유 없이 바넷사에게 손을 댈 리가 없어.

    물론 바넷사의 아까 전 대답을 생각해 봤을 때 몸을 겹친 건 꽤나 예전 일인 모양이고, 요즘이야 모를까 예전의 낭군님은 난봉꾼 기질이 있기는 했지만…이놈의 낭군님을 어떻게 해줘야 할까.

    "…예전에 제가 구원님의 스킬에 다시 한 번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호, 호오…. 낭군님이 자네에게 스킬을 썼다. 이 말인가…."

    "아, 아뇨. 정확히는 제가 가서 맞았습니다. 구원님도 의도하신 것은…."

    "바넷사. 자네가 낭군님을 좋아한다는 건 잘 알겠으니, 그렇게 변명까지 안 해줘도 되네."

    그 바넷사가 저렇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변명을 해주다니.

    대체 낭군님을 바넷사를 어떻게 안았기에 이렇게 푹 빠지게 만든 겐가!?

    바넷사와 얘기만 끝나고 두고 보게나.

    속으로 그렇게 이를 갈았던 디아나였지만, 이어지는 바넷사의 말에 그 분노는 살짝 사그라지게 됐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사라님께 몰래 장난을 치시려고 했던 모양인지, 은신술을 쓰고 성자의 스킬을 사용하려는 구원님을 제가 몰래 들어온 도둑으로 오해하여…."

    "아아…."

    디아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바보 낭군님이 진짜….

    이 몸에겐 그런 깜짝 플레이 해준 적도 없으면서…아니. 그게 아니라. 어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그, 그런가. 그 얘기는 됐네. 그래서, 몸을 겹쳤다는 겐가?"

    "…네. 하지만 디아나님. 살을 맞댔다고는 해도 삽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으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들 신용이 없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정말로 삽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전 반드시 디아나님께 보고를 했을 겁니다."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바넷사를 보고, 디아나는 그 말이 사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낭군님이야. 음. 그렇고말고. 이 몸을 그리 쉽게 배신할 리가 없지.

    "그래서. 낭군님의 스킬의 영향을 풀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자네와 살을 겹쳤다는 것인가? 자네는 그것만으로 낭군님을 사랑하게 됐고?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자네는 분명 그보다 더 전에 낭군님과 끝까지 관계를 가진 적도 있는 것 아니었는가?"

    분명 아까 바네사는 다시 살을 맞댔다는 표현을 했다.

    즉, 처음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리고 디아나의 기억에 의하면, 분명 바넷사가 낭군님과 처음 살을 맞댔을 때는 그 때다. 성역 선포에 당해서, 하지만 스킬을 쓰는 것만으론 절정에 달하게 만들 레벨이 되지 못해서 끝까지 관계를 가졌을 때.

    그때는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았는데, 그 이후에 애무를 하는 것만으로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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