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565화 (54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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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첫날밤

    "구원! …좋은 아침."

    어째선지 평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는 바넷사를 쫓아서 식당에 도착하니, 날 제일 먼저 반겨준 건 다름 아닌 사라였다.

    사라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내 뒤를 따라오는 실비아의 얼굴을 보더니 알겠다는 표정으로 평범하게 인사를 했다.

    자기 차례를 양보까지 한만큼, 실비아와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실비아의 모습을 보면, 간밤에 어땠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그냥 평범하게 인사를 한 거겠지.

    아침부터 내 옆에 찰싹 붙어서 같이 식당으로 향하는 게 어색하고 부끄럽다는 듯이 새빨갛게 굳어져있는 한편, 가끔씩 실없는 미소를 헤실헤실 짓는 실비아를 보면 말이다.

    "응. 잘 잤어?"

    "응. 던전에서 돌아오자마자 누구씨한테 밤새 시달리지도 않고 푹 잤어."

    "뭣이?! 나랑 자는 게 싫다는 거야?!"

    "싫은 건 아니지만…던전에서 돌아온 당일은 조금 피곤하잖아?"

    "야. 자꾸 그러면 나 운다?"

    "바보. 다 큰 남자가 맨날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사라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실비아는 사라를 바라보면서 뭐라고 감사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 사라님! 그, 그게!"

    "실비아. 멋쩍게 그런 얘기하지 않기에요."

    물론 그 전에 사라가 실비아의 말을 멈췄지만 말이다.

    어젯밤에도 느낀 거지만, 사라 얘 은근히…아니. 대놓고 어른스러운 반응을 보여주네. 나이는 여기에서 제일 어린 주제에.

    맨날 자기 입으로 자기가 본처라고 주장하는 만큼, 이럴 때엔 확실히 하겠다는 걸까?

    "음. 밤새 이 몸들을 귀찮게 굴었으니 말일세. 그야 멋쩍기도 하겠구먼 그려."

    하지만 그런 모처럼 어른스런 사라의 이미지를, 옆에 있던 디아나가 철저히 박살내는 발언을 했다.

    "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디아나가 그 말을 내뱉자마자 사라가 당황해서는 디아나의 말을 멈추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사라를 붙잡고 디아나의 말을 재촉했다.

    "‘디아나, 레이아, 마틸다. 지금이라도 구원 방에 가는 게 좋을까요?’ 라든가. ‘난 바보. 바보야.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같이 잘 걸…구워어언…그리워어….’ 라든가. 덕분에 이 몸들도 새벽까지 제대로 자지도 못했네."

    "디, 디아나씨도 참…."

    디아나의 발언에, 옆에 있던 레이아도 부정은 하지 않고 살짝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셋 다 방금 전까지 자다 온 사람치고는 살짝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정작 사라는 멀쩡해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가. 어쩐지 내가 실비아랑 들어와도 셋 다 별 반응이 없더라니.

    내가 실비아와 잔다는 건 이미 지난밤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설마 그런 발언까지 했다니. 그렇다는 건 얘 혹시….

    "사라 너 혹시 어제 술 마셨어?"

    "…조, 조금?"

    내 질문에, 디아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던 사라가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뭐야. 그럼. 난 어젯밤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위기를 넘긴 거였어?

    사라 얘는 술만 들어가면 폭주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만약 어젯밤에 사라가 들어왔다면, 진지하게 실비아가 부끄러워 죽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디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 말게. 자네 방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이 몸이 마법으로 재웠네."

    "그, 그러니까 디아나아!"

    "우으…사, 사라님…죄송…."

    "실비아도! 사과 안 해도 되니까요!"

    결국 몇 마디 말에 어른스런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져버린 사라였다.

    그래. 사라야. 그 모습이 나이에 맞기도 하고 더 어울린다.

    평소보다 공격성이 조금 떨어져 보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분명 사라는 이렇게 당황하면 자기도 모르게 말로 명치를 때려대는데 말이야.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즉시 풀리게 됐다.

    "아무튼 그런 고로, 내일 밤은 사라양과 자게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사라양 혼자 본처 노릇을 하게 둘 수는 없지 않나. 이 몸들도 실비아양을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것일세."

    과연. 그런 거였나.

    어쩐지 오늘은 디아나가 저렇게 놀려먹어도 사라의 반응이 얌전하다 싶더라니.

    하지만 디아나도 레이아도 역시나라고 할까.

    디아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결국은 어제의 사라가 그랬듯 자기 차례를 한 번 뒤로 미루는 셈이 되어버리는 거다.

    역시 우리 애들은 전부 하나같이 천사야.

    내가 디아나의 곁에 다가가서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디아나는 마치 더 만져도 된다는 듯이 으쓱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내 손에 문질러왔다.

    하지만 그렇게 디아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나는 방금 전 디아나의 말에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단 사실을 깨달았다.

    "…응? 잠깐만. 내일? 그럼 오늘은?"

    "몰라서 묻는가? 아직 자네와 하룻밤도 못 자본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마틸다 쪽으로 겨우 시선을 돌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말을 안 걸었다 뿐이지, 조용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아…당시인…그런…하지만…아아…당신이 원하신다며언…."

    어째 내가 식당에 들어오기 전부터 핑크빛 모드가 돼서는 허공에 대고 중얼중얼 달콤한 말을 내뱉더라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거냐.

    "정말로? 서비스가 상당히 좋은데? 아니. 물론 마음씨는 고맙지만 말이야."

    "음. 자네의 본처로서! 이 정도 아량은 있다는 걸세."

    "말해두지만 디아나 혼자 정한 게 아니라 다 같이 상의한 거니까. 본처로서!"

    과연 이번만큼 강한 본처 어필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사라도 옆에서 지지 않고 옆에서 그렇게 대꾸해왔다.

    얘들 설마 어젯밤에도 이렇게 서로 본처라고 싸우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건 아니겠지?

    뭐, 결과가 좋게 끝난 것 같으니 다 좋은 거지만 말이야.

    "내가 뭘 원한다고?"

    "햣! 어, 어머. 다, 당신. 안녕히 주무셨나요오?"

    그런 우리 애들의 결정에 감사하면서 마틸다에게 말을 걸어보니, 마틸다는 그제야 내가 왔다는 걸 눈치 챘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인사를 했다.

    늦었어. 이것아. 그리고 다시 핑크빛 모드로 들어가려고 하지 마라.

    "우으…여, 여러분…."

    아무튼 그렇게 상황 파악이 끝나가자, 실비아도 우리 애들의 마음씨에 감동했는지 커다란 눈을 촉촉하게 글썽이면서 우리 애들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셋에게 본처취급해주며 깍듯이 대하던 실비아였지만, 지금은 거기에 더해 존경의 마음까지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후훗. 실비아씨. 그렇게 서있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네, 네헵!"

    그런 실비아의 눈빛을 받으면서, 레이아가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에게 손짓했다.

    평소에는 저기 식탁 구석에서 따로 떨어져 식사를 하는 실비아였지만, 오늘은 사도 인장까지 새기고 온 거다.

    과연 내 근처에서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긴장할 정도는 아니게 됐는지, 실비아는 힘차게 대답하며 레이아에게 다가갔다.

    그것이 함정인지도 모르고.

    아니. 아마도 우리 천사님은 의도한 게 아니었겠지만.

    "그, 그래요! 실비아! 어서 와보세요."

    "음. 그래서, 자네의 사도 인장은 어디인가?"

    실비아가 다가가자마자, 사라와 디아나가 실비아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서는 사도 인장의 위치를 캐내려했다.

    저 눈은…동병상련을 기대하는 눈빛이야.

    이것들…자기들은 어차피 사도 인장이 있는 위치를 보였다 이거지?

    하지만 이거 어쩌나. 니들이 기대할만한 위치에 새기지 않았는데.

    "네, 네헷? 사, 샤도 인자앙 말입니까아…? 여기…입니다아…헤헷."

    실비아는 사도 인장이란 말이 부끄러운지 살짝 몸을 꼬면서 말하더니, 수줍다는 듯이 한 손으로 앞머리를 넘겨서 이마에 새겨진 사도 인장을 보여줬다.

    "하아…."

    "구원…."

    그리고 역시나랄까, 실비아의 사도 인장 위치가 드러나는 순간 사라와 디아나는 동시에 실망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날 원망스럽단 눈초리로 노려봤다.

    "에, 엣…? 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아?"

    "아니에요. 실비아씨. 여러분도 참. 한숨 쉴 필요까지는…."

    실비아는 그 반응에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우리 천사님이 그런 실비아를 토닥이면서 곤란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너흰 대체 뭘 기대한 건데. 실비아한테 성감대가 없는 건 알고 있었잖아?"

    "우긋…그, 그러고 보니 그랬구먼…."

    "요즘 너무 평범하게 지내서 잊고 있었네요…."

    역시나. 성감대에 새겼을 거라고 생각하고 동병상련의 기분으로 캐물은 거였냐.

    게다가 마틸다는 성감대에 새기지 않은 만큼, 실비아만큼은 동지의식을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실비아가 불감증이란 사실마저 잊을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간절했던 거냐.

    "그렇게 지금 위치가 싫으면 너희 것도 옮겨준다니까?"

    "시, 싫네!"

    "내 인장 건드리기만 해봐!"

    이렇게 말하면 또 저렇게 반응하는 주제에.

    아, 그래도 지금 각자 엉덩이랑 하복부를 가리는 동작, 꽤나 섹시했어.

    역시 내가 사도 인장 위치만큼은 기막히게 설정했다니까.

    "그, 그보다 실비아씨의 인장도 멋지네요. 마치 티아라 같아서 예뻐요."

    계속 성감대 관련 얘기가 나오는 게 부끄러웠던 건지, 레이아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손뼉을 짝 하고 한 번 친 후에 실비아의 인장 위치 얘기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가, 감사합니다!"

    "그렇구먼. 저 위치라면 당당히 드러낼 수도 있고 말일세."

    "전 지금도 당당히 드러낼 수 있지만요."

    "그, 그건 이 몸도…!"

    "그러니까 드러내려고 하지 말라고. 아무튼 괜찮아 보여? 사실 여자 얼굴에 새기는 거라서 조금 고민했는데 말이야."

    "아, 그래서 색을 옅게 하신 거군요?"

    "응. 그래도 혹시 싫으면 말해. 위치는 언제든 옮길 수 있으니까."

    "괘, 괜찮습니다! 전혀 문제 없습니다아!"

    실비아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서는 앞머리를 내려 이마를 가리고는,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두 손으로 앞머리를 꾸욱 누르면서 철저하게 인장의 위치를 막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실비아도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뭐,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혼자 헤실헤실 웃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간헐적으로 기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헤실헤실 웃고 있다.

    실비아야.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웃음이 너무 헤픈 거 아니냐?

    예전의 그 나른해 보였던 기사님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야 물론 지금이 훨씬 귀엽지만 말이야. 사랑한다.

    아무튼 그렇게 실비아의 사도 인장 위치를 까는 신고식을 치르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럼 나는 잠깐 나갔다가 올게."

    드디어 파티 멤버 전원에게 사도 인장을 새길 수 있었다는 사실에 들뜬 덕분인지 평소보다도 훨씬 맛있게 느껴진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우리 애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천사 같은 우리 애들과 계속해서 같이 있고 싶었지만, 실은 할 일이 있었다.

    어제 그런 소란을 일으키면서 길드를 빠져나왔으니까 말이야.

    실비아가 뭐라고 말하면서 귀환 보고를 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지금쯤 레이첼 누님이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겸사겸사 앨리시아한테도 설명을 하지 않으면.

    확실히 앨리시아 걔가 많이 털털한 성격이라 눈치가 좀 없기는 하지만, 어제는 앨리시아가 억울할만했다.

    나는 멀쩡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면서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우리 애들은 날 깨지기 쉬운 도자기 취급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앨리시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냥 우리 애들이 호들갑 떠는 걸로 보였겠지.

    그러니까 조금 끈질기게 내 앞을 막고 있었던 것일 테고 말이다.

    뭐, 사실 호들갑이 맞기도 했고.

    실제로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했으니까.

    "안 돼."

    하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사라가 단호한 말투로 내 외출을 막았다.

    "으, 응? 뭐라고?"

    "허락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은 저택에서 푹 쉬게."

    "뭐? 아니. 하지만 난 멀쩡…."

    "구원씨."

    일단 저항을 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내 말을 이번엔 단호한 표정의 레이아가 끊었다.

    "네. 천사님."

    "나가시면 안 돼요."

    "넵."

    결국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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