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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57화 (54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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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신 강림을 위하여

    "후우. 이걸로 겨우 펭귄의 성기도 손에 얻었군."

    나는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수컷 펭귄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응? 뭔가 중간 과정이 생략되지 않았냐고?

    뭘 기대한 거야? 상대는 고작해야 펭귄이라고?

    라고 말하고 싶기는 하지만, 실은 말 그래도. 실은 중간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러니 귀찮지만 설명을 해주도록 할까.

    "너무 늦으면 수컷 펭귄과 싸우는 동안 구멍이 막혀버릴 위험도 있으니 말일세. 그렇게 되면 이 몸들은 꼼짝없이 4.5계층으로 내려가야 하게 되네. 어쩌면 도중에 통로가 막혀서 또 다시 파티가 나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일세. 그러니 일단 얼른 처리하고 다시 돌아와서 쉬는 걸로 하세. 황제 펭귄과 싸운 직후라 미안하네만, 가능하겠나?"

    다른 애들이 어떻게든 날 쉬게 해주려고 했을 때 바로 다음 할 일을 찾아버린 건, 그런 것까지 계산한 후에 나온 행동인 모양이다.

    하여간 우리 디아나는 똑똑하기까지 하다니까.

    "그럼 당연하지. 보다시피 팔팔하다고."

    나는 기특한 디아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디아나가 가리킨 벽에 난 구멍에 몸을 집어넣었다.

    끼, 낀다…. 어깨라든가 최대한 움츠리지 않으면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잖아.

    게다가 여길 통과해야 하는 거다. 포복훈련이 생각나게 하는군.

    신체 부위 중 가장 넓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느라 팔은 움직일 수도 없었고, 나는 다리 힘만으로 좁은 구멍을 통과해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얼음이라서 잘 미끄러진다는 점일까?

    게다가 마치 기계로 뚫은 것처럼 표면이 맨들맨들하기도 하고.

    발바닥에 부착된 아이젠을 이용하여, 나는 어떻게든 구멍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고, 나는 그 사이에 새로 전직한 월영무사의 스킬이나 확인하기로 했다.

    역시 무투가와 암살자를 합친 직업이니만큼, 기본적으로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기습을 가하는 격투 계열 스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래선 앞으론 방어력을 믿고 탱커를 하는 것 보다는 성자 스킬로 어그로를 끌고 피해 다니는 회피 탱커 역할을 하는 게 좋아 보이네.

    애초에 지금까지도 내구만 믿고 억지로 탱커를 했을 뿐, 딱히 방어계열 스킬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레벨에 비해 무식하게 내구가 높아서 통했지만, 과연 6계층정도까지 내려가면 방어스킬 없이는 힘들 테니까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된 걸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킬을 대충 훑어보던 중,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드디어 마나를 담아 공격하는 스킬들이 생겼네.

    지금까지 무투가 스킬들은 그저 일정 자세로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하면 공격력을 올려주는 스킬이 주류였고, 직접적으로 마나를 담아 공격하는 스킬들은 없었다.

    사라가 손이나 화살에 마나를 담아 파랗게 빛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드디어 나도 그런 스킬이 생겼다는 얘기다.

    사라 쟤는 나랑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마나를 담아서 공격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전직한 다음에나 배울 수 있는 걸 그런 저레벨부터 사용했다니.

    용사란 직업 너무 사기 아니냐?

    아니. 성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통로를 빠져나오자, 아까 전에 있던 보스방보다 한층 더 넓은 공간으로 빠져나오게 됐다.

    설마 황제 펭귄이 뚫어놓은 길이 이런 곳으로 연결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정말로 돌아가면 실비아를 듬뿍 귀여워해주자.

    그리고 그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역시나 예상대로 황제펭귄 보다도 한층 더 몸집이 큰 펭귄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수컷 펭귄이었다.

    녀석은 날 바라보자마자 바로 바닥에 배를 붙이고 미사일처럼 빠르게 미끄러져왔다.

    얘도 역시 저 공격이냐!

    "얘들아! 아직 오지 마! 그리고 거기서도 조심해! 이 녀석이 그쪽까지 뚫고 갈지도 몰라!"

    나는 빠져나왔던 구멍에 대고 그렇게 소리친 후, 일단 옆으로 몸을 날려서 놈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놈은 역시나 황제 펭귄과 마찬가지로 벽을 뚫고 그대로 몸을 감췄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어디서 기습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압박감으로 다가오겠지만, 무식하게 튼튼한 방어력과 암살자 레벨을 올리며 높은 민첩을 가지게 된 나로서는 그다지 큰 압박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구멍에 빠져나온 후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을 줘서 고마울 정도였다.

    좋아. 펭귄 녀석아. 황제 펭귄은 구멍을 뚫으라고 한동안 놀아줬지만, 넌 그럴 필요도 없어.

    다음에 몸을 드러낸 순간 성자 스킬 한 방으로 끝을…아니. 잠깐만.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냥 간단히 성자 스킬로 해치우는 게 맞겠지만, 나는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건…이건 가능할지도 몰라!

    펭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나는 곧장 지금 떠올린 아이디어를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손에는 성자의 손길을. 한 손에는 월영무사로 전직하며 배운 투기를.

    상반되는 두 개의 힘을 각각의 손에 담은 나는, 그 이질적인  두 가지 힘을 합치기 위해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상반되는 두 개의 힘이 서로를 배척하듯이 반발작용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지만, 일단 나는 팔을 일부러 부들부들 떨면서 힘겨운 척을 했다.

    이런 건 연출이 중요하다고.

    알 수 없는 외계어 주문까지 외우면 완벽하겠지만, 과연 그런 것까지는 기억이 안…아니. 난 저작권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굳이 외우지 않겠어.

    그렇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 낀 자세로, 나는 펭귄 녀석이 다시 내게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끼에에엑!"

    그리고 펭귄이 다시 벽을 뚫고 내 쪽으로 날아오는 순간, 나는 깍지 낀 두 손을 휘두르며 혼신의 힘을 다 해서 외쳤다.

    "우오오오오옷! 헬! 앤드! 헤브으으으으은!"

    아, 참고로 고통과 쾌락을, 그러니까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보여주겠다는 뜻이야. 따라하는 게 아니라고.

    "꾸에에엑!"

    아무튼 그런 내 깍지 낀 손에 정통으로 후려쳐진 펭귄은, 괴성을 내지르며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성자의 손길에 의한 쾌락으로 죽은 건지, 투기에 의한 고통으로 죽은 건지는 나도 모를 일이지만.

    두 손으로 마석까지 뽑아내면 완벽했을 텐데.

    펭귄의 마석 위치는 대충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노려봤지만, 과연 미사일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놈의 마석 위치를 정확히 캐치하긴 힘들더라고.

    아니. 그 이전에 투기를 담은 주먹으로도 가죽이 뚫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방어력이 약해도, 일단은 보스급 몬스터라는 거다.

    뭐, 그래봤자 한 방에 죽은 건 변함이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무사히 수컷 펭귄의 성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응? 결국 중간 과정에 있었던 중요한 일은 뭐였냐고?

    지금까지 뭘 본 거야! 내가 필살기를 개발해냈다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었잖아!

    아무튼 나는 수컷 펭귄에게서 드랍 된 성기를 주워들고는, 주위를 살펴봤다.

    물론 여기서 성기를 얻게 됐으니 당연히 4.5계층으로 통하는 길이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일단 확인은 하고 가야하지 않겠어?

    수컷 펭귄을 빨리 끝장낸 덕분에 다행이도 구멍이 사방팔방에 뚫리는 일은 없었고, 덕분에 열쇠구멍을 빨리 발견한 나는 일단 통로를 열어서 4.5계층의 존재를 확인만 하고는 곧장 황제 펭귄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실비아. 여기서 뭐하니?"

    "우, 우아아…! 으아아앗!"

    그리고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다리 힘만을 이용해 구멍을 미끄러지던 도중, 중간에 껴있는 실비아와 마주쳤다.

    말했다시피, 나는 기어간다는 표현보다는 미끄러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방법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렇게 이동하게 되면, 속도는 빠르지만 중간에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중간에 장애물이 없는 한 굳이 움직임을 멈출 필요도 없잖아?

    당연히 중간에 실비아가 껴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던 나는 통로가 막히기 전에 쭉쭉 미끄러져나갔다.

    덕분에 이렇게 실비아와 마주친 지금, 우리의 얼굴은 엄청나게 가까워져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얼굴 사이의 거리가 5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살짝 목을 뻗으면 키스도 가능할 것 같았다.

    던전 안인데도 실비아가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실비아?"

    "네, 네헷! 그, 그러니까! 구, 구원님이 늦으셔서! 사라님이 들어가려고 하셔서! 하지만 사라님보다는 제가 튼튼하니까! 먼저 들어가서 확인하려고 해서! 그런데 갑옷이 중간에 끼어서! 게다가 구원님의 얼굴이 가까이이이! 가까워! 가, 가깝습니다아아아…!"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진 실비아는 횡설수설 떠들어댔지만, 그래도 대충 상황은 파악했다.

    뭐, 아무리 실비아의 덩치가 나랑 비교해서 훨씬 작다고는 해도. 두꺼운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야 이런 구멍을 통과하다보면 끼겠지.

    기왕 이런 세계관이니까, 노출도=방어력인 갑옷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과연 그런 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는지, 이 세계의 갑옷들은 하나까지 현실감이 넘치는 것들뿐이었다.

    뭐, 앨리시아처럼 어느 정도 노출도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걔가 특이한 것뿐이고.

    아무튼 실비아는 중간에 끼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는 말이다.

    흠. 그럼 이제 어쩌면 좋을까.

    아니. 나도 돕고 싶어. 돕고 싶은데 말이야.

    공교롭게도 나도 지금 팔을 못 쓰는 상황이거든.

    내 쪽에서 밀어줄 수 있었더라면 그나마 조금 상황이 나았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가 저 상태로 후진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고 말이야.

    이대로 가면 둘이서 사이좋게 매장되는 결말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아니. 이런 상황이다. 하는 수 없지.

    실비아의 목숨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둘이 사이좋게 매장되는 것보단 나으니까.

    나는 다시 다리에 힘을 줘서, 몸을 앞으로 더 전진시켰다.

    "구, 구구구구구, 구원니이이임?!"

    안 그래도 가까웠던 내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실비아가 전신을 파닥파닥 거리면서 패닉 상태에 빠졌다.

    파닥거린다고 해봤자, 끼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실비아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가져다대고,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목에 힘주고 있어라. 그대로 밀 테니까."

    "으햐앗! 흐앗! 하앗! 네, 네힛! 후읏! 흐읏!"

    아무래도 거리가 너무 가깝다 보니, 말하는 도중에 내 입술이 그만 실비아의 입술에 닿고 말았다.

    하지만 실비아도 상황의 긴박함은 아는 건지, 패닉상태에 빠진 와중에도 기특하게 대답은 하면서 목에 힘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 상태에서, 나는 그대로 다리에 힘을 줘서 실비아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난폭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어보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실비아는 레벨이나 직업을 따지고 봐도 근력 스탯이 엄청 높을 테니, 이정도로 다치거나 하진 않겠지.

    "우으으읍! 으읏! 흐햣! 히으으응읍!"

    하지만 인간, 목 힘으로 버티는 게 한계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서로의 이마를 맞댄 상태에서 밀어내려고 했던 나였지만, 힘을 주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개가 조금 더 뒤로 젖혀지면서 서로의 입술까지 맞대게 되어 버렸다.

    즉, 키스를 하게 됐다.

    솔직히 키스라는 표현보다는 서로의 안면이 비벼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한 모습이었지만, 우리 실비아한테는 완전히 키스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몸이 훨씬 더 덜덜 떨리면서, 실비아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자신의 혀가 내 입술에 닿은 걸 느꼈는지 더더욱 패닉 상태에 빠졌다.

    솔직히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한 모습이었다.

    뭐, 눈은 완전히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실비아를 밀어내려고 노력하기를 수 초, 마치 걸린 게 빠지기라도 한 듯 갑작스레 우리의 몸이 쑤욱하고 앞으로 미끄러졌다.

    아니. 실비아 입장에선 뒤로 미끄러진 거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통로가 막히기 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는 거다.

    "실비아. 괜찮아?"

    통로에서 빠져나온 후, 실비아의 입술을 보자 역시나 피가 나고 있었다.

    뭐, 그렇게 밀어 붙였으니까 말이야.

    사실 내 입술에도 피가 나는 건지, 아릿하게 철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우리 귀여운 실비아한테 피가 난다는 거지.

    "레이아. 치료 좀 해줘."

    나는 혀를 내밀어서 실비아의 입술에 묻은 피를 핥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흐햐아앗! 으아아아…."

    하지만 그게 또 치명타가 터져버렸는지, 잘 버텨오던 실비아는 결국 던전 안인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원."

    "자, 잠깐만. 설명할 수 있어.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우리 애들한테 필사적으로 상황 설명을 해야 하는 꼴이 됐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 쓰면서도 뭔가 계속 하나 빠진 것 같아서 찝찝했는데 정령사를 빼먹었네요. 설마 이 중요한 걸 빼먹을 줄이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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