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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43화 (52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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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신 강림을 위하여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우리 애들의 스탯이나 스킬을 그다지 꼼꼼하게 확인하지는 않았다.

    뭔가 그런 짓을 하고 있으면, 게임 캐릭터를 만지는 것 같아서 싫었기 때문이다.

    얘들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게다가 내가 스탯이나 스킬 같은 걸 관리하지 않더라도 던전에 다닐 때는 차고 넘칠 정도로 도움이 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스탯이나 스킬 창을 그렇게까지 자주 확인하거나 꼼꼼히 살펴보진 않았지만….

    다시 한 번 레이아의 스킬 창을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대사제 전용 스킬들의 레벨이 지금의 레이아 레벨에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높았던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중에서도 치유에 관한 스킬들만.

    버프 계열 스킬들은 치유 계열 스킬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레벨이 낮았다.

    아니. 물론 레이아가 평소에도 꾸준히 빈민촌에 가면서 치유 스킬을 행사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치유 스킬 레벨들이 레이아의 지금 레벨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높았다.

    아마 저 버프 계열 스킬들의 레벨이, 지금 레이아 레벨에선 정상적인 수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레이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회복 마법의 효율이 좋았지.

    물론 우리 파티에 용사나 대마법사님까지 있다 보니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바꿔서 말하면 용사나 대마법사까지 있는 파티에서도 꿀리지 않고 힐을 넣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는 거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제인 레이아가 말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구원씨?"

    내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본 상태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레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으,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 그게 말이야. 여신 강림…지금 안 될 것 같네."

    "네, 네에?! 잠깐만요! 그게 무슨?!"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마틸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상황을 모르는 마틸다 입장에선 그야 당황스럽겠지.

    아무리 그래도 추기경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을 텐데, 레이아도 가능했던 걸 자기가 못하는 상황이니까.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이 부족하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자기 사도 임명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핑크빛 모드까지 풀리면서 그렇게 당황한 거였어? 얘 왜 이렇게 하는 짓이 귀엽냐?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보니까 여신 강림을 익히려면 대사제의…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얘들과 나는 기본적으로 스킬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나는 이렇게 스킬 창으로 보고 확인을 하고, 사용할 때도 기본적으로 게임에서 쓰던 것처럼 스킬을 쓰는 편이다.

    하지만 얘들은 자기가 어떤 스킬을 익히고, 얼마나 숙달됐는지 보이는 게 아니다.

    스킬도 마나를 어떤 식으로 순환시킨다든가, 그런 개념으로 사용하는 거다.

    그렇다보니, 얘들은 패시브 스킬이란 개념이 없다.

    물론 이렇게 스킬 창에 보이는 걸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고 있기는 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보니, 패시브 스킬 레벨이 부족하다는 개념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마틸다는 원래 성기사였잖아? 그래서 대사제 관련 스킬 레벨이 부족한 모양이야."

    결국 나는 그런 애매한 말로 마틸다를 납득시킬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럴 리가요? 원래 여신강림은 성녀가 사용하는 스킬이잖아요? 성기사도 성녀가 될 수 있는 걸요? 저 이래 봬도 원래는 성녀 후보였다고요!"

    하지만 마틸다는 자신의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는 한 편, 역시나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도 있었지.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잠깐만 기다려."

    나는 당황하면서도 다시 한 번 마틸다의 스킬 창을 꼼꼼히 살펴봤다.

    ‘대사제의 신앙심’이 확실히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레벨이 턱없이 낮았다.

    아니. 하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마틸다의 말의 요지는, 굳이 대사제의 스킬이 아니더라도 성기사 스킬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거니까.

    나는 스킬 창 위에 있는 탭 중, 대사제가 아니라 성기사 탭을 확인했다.

    그러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성기사 스킬 중에는, ‘성기사의 신앙심’ 이라고 하는 이 역시 ‘사제의 신앙심’의 상위 호환인 스킬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틸다의 말대로, 확실히 그 성기사의 스킬 루트에도 ‘여신 강림’ 스킬이 존재했다.

    익히기 위한 선행 스킬 조건은 ‘성기사의 신앙심’ 최고 레벨.

    다만 이 ‘성기사의 신앙심’ 레벨 역시도, 사도 임명 보너스로 얻은 스킬 포인트를 모조리 투자해봤자 만렙에 이를 수준은 아니었다.

    "확실히 성기사 스킬로도 조건은 만족시킬 수 있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부족해."

    "그, 그런! 하지만 그럼 레이아씨는!"

    마틸다는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레이아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레이아 역시도,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확실히.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한때 성녀 후보. 그리고 추기경이란 직책. 게다가 더 높은 레벨까지.

    솔직히 말해서 마틸다가 레이아보다 훨씬 스킬 레벨이 높아야 정상이다.

    그 증거로, 마틸다의 성기사 스킬 레벨 전반은 레이아의 버프 계열 스킬들보다 압도적으로 레벨이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레벨이 높은 레이아의 치유 계열 스킬들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역시 마틸다는 아직 여신 강림을 할 수 없다는 거야."

    "……제 성기사 스킬 레벨이 그렇게 많이 부족한가요?"

    추기경까지 올라간 독실한 여신님의 신자인 마틸다는, 스스로는 여신님을 강림시킬 수 없다는 말에 충격 받은 듯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침묵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마틸다는 어딘가 의지가 느껴지는 눈동자로 날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솔직히 대사제인 채로 여신 강림을 익히려면 많이 부족하지만, 성기사 스킬들은 상당히 높아. 아마 조금만 더 성장하면 가능해 지겠지. 하지만 넌 지금 대사제니까 이 이상 성기사 스킬을 올릴 수는…."

    "저, 다시 전직하겠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틸다가 의지 가득한 눈동자로 날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으, 응?"

    "하지만 그렇잖아요? 애초에 제가 대사제가 된 것도, 저주에 걸린 이상 더 이상 성기사로서 대외 활동을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이 저주를 완전히 치료할 방법도 찾은 거고, 계속 대사제로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저희 파티 구성을 생각해봐도, 이렇게 대사제가 둘 있는 것보단 제가 성기사가 되는 편이 더 좋지 않나요? 어차피 지금까지 제 역할도 계속 성기사가 하는 것과 다름없는 역할이었고요."

    확실히. 마틸다의 말은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마틸다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뭐 하나 아쉬울 거 없는 제안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냉정하게 그런 판단을 하다니.

    분명 평범한 사제였던 레이아에게도 뒤쳐졌단 사실에 충격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예전처럼 너무 막 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 마틸다를 얕잡아 보지 않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틈만 나면 핑크빛 모드로 변하는 것 때문인지, 난 여전히 마틸다를 조금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에 나한테 먼저 고백을 한 것도 그렇고, 얘는 진짜 해야 할 땐 든든하게 하는 성격이라니까. 너무 믿음직스럽잖아.

    교황이 말했던, 마틸다는 인망이 두터워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 확실히 네가 성기사가 돼서 스킬 레벨을 마음먹고 올리면,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신 강림이 가능해질 거야."

    "네. 기대하세요. 금방 여신님을 뵙게 해드릴 테니까요."

    "응. 그래. 난 널 믿어."

    "네에…구원씨이이…."

    아니. 야. 그러니까 왜 이렇게 되는 건데.

    방금 전 까지 있었던 듬직한 우리 마틸다 추기경님은 어디로 간 거야?! 왜 이 타이밍에 눈에서 하트나 뿅뿅 뿜어대고 있는 애가 튀어나오는 거야?!

    아니. 물론 예쁘지만 말이야!

    "하지만 신기한 얘기로구먼. 이 몸이 기억하기로는, 레이아양이 여신 강림을 했던 건 확실히 대사제가 된 직후라고 기억하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아양은 대사제 스킬의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는 겐가?"

    하지만 가만히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디아나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어려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과연 디아나. 디아나는 여신 강림을 했을 때 같이 있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또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말이 안 되네요. 레이아, 뭐 짐작 가는 일 없어요?"

    "그, 글쎄요? 딱히 그런 건…. 아 혹시…."

    사라의 질문을 받고, 레이아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흐리다가 조그맣게 뭔가 중얼거렸다.

    "응? 레이아?"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흠. 레이아양이 평범한 사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구먼. 확실히 회복 마법의 효율이 좋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네만."

    "펴,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니…그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레이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 반응도 그렇고, 지금 저 표정도 그렇고, 혹시 레이아는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건가?

    아니.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그걸 숨기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성자에 용사, 대마법사가 끼어있는 파티다.

    조금 특이한 사제가 있더라도 뭘 숨길 게 있겠어.

    게다가 유독 스킬 레벨이 높은 거니까, 그 특이하다는 게 나쁜 쪽으로 특이한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그렇게 레이아의 표정에 잠깐 위화감을 가진 나였지만, 우리 천사님이 내게 숨기는 게 있을 리도 없다는 생각에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로 했다.

    "흠. 아무튼 그러면 이제 이 몸들도 목표가 생겼구먼."

    "응? 무슨 소리야. 목표는 원래부터 있었잖아."

    "자네가 말하는 목표는 여신님이 말씀하신 대로 던전 깊은 곳에 들어가겠다는 것 아닌가. 이 몸이 말하는 것은 그런 애매모호한 목표가 아닌, 구체적인 목표를 말하는 걸세. 마틸다양의 스킬 수준을 여신 강림이 가능한 정도까지 올린다. 던전에서 사냥을 하며 다니기에는 훨씬 명확한 목표 아닌가."

    뭐, 확실히. 지금까지는 마냥 깊은 곳으로 향하기만 할 뿐, 뭔가 뚜렷한 목표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디아나의 말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던전에 다니는 것도 더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 나도 푹 쉬었으니까, 그럼 또 다시 던전에 다녀볼까! 모레부터!"

    "내일이 아닌 겐가!?"

    내 결의에 찬 외침을 듣고, 디아나가 귀엽게 딴죽을 걸었다.

    그야 그렇지. 일단 마틸다가 성기사로 다시 전직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 던전에 가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있거든.

    조난에서 구조된 이후로 할 일의 대부분을 끝마쳤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있었다.

    그렇지 실비아?

    원래는 오늘 하려고 했는데, 실비아가 성에 가버렸으니까 말이야.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자, 실비아가 본능적으로 뭔가를 감지해낸 건지 저기 구석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건 일단 내일 일이고, 오늘은 또 오늘대로 할 일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먼저 방으로 돌아와 디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두근두근 거리는 게 멈추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라고.

    할 일이 있다면서 도망갔던 디아나.

    이 타이밍에 할 일, 그것도 디아나가 부끄러워할 일이라면 역시 딱 하나밖에 없지 않겠어?

    그래. 그 일 말이야. 내가 부탁했던 그 일.

    "기, 기다렸는가…."

    그리고 드디어, 방문이 열리며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부끄러워하는 표정.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그게 아니라면, 이제 와서 디아나가 나랑 자는 것만으로 저렇게 부끄러워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디아나는 몸을 씻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마법사 로브를 두른 상태였다.

    그리고 그 로브 사이로, 힐끔하고 허리춤에 커다란 주머니를 매달고 있는 게 보였다.

    고작 주머니 주제에 저 값비싸 보이는 재질. 틀림없이 마법 주머니다.

    역시 우리 대마법사님이야.

    아무래도 내가 부탁했던 물건은 훌륭히 완성을 끝낸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거의) 정시 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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