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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42화 (52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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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신 강림을 위하여

    결국 내가 몸을 씻고 욕조를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시간이었다.

    바넷사는 역시나 오늘 쉬라는 디아나의 명령을 준수할 생각인지, 식당에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우리 애들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나, 실비아가 저기 구석에서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바넷사가 직접 디아나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보고하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바넷사 걔 성격이라면 죄책감 때문이라도 이실직고 할 성격인데 말이야. 게다가 전에도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디아나 모르게 내게 애무를 받은 적 있으니 더욱더.

    실제로 행위가 끝난 다음에 죄책감 때문에 답지 않게 풀죽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렇게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건, 마지막에 내가 한 말을 믿어준다는 뜻인 걸까?

    좋아. 그렇다면 그 믿음에 보답해주지 않으면.

    "자네 왔는가. 대체 어디 있었는가? 방에도 없었던 모양이네만."

    그리고 마침 디아나가 내게 그렇게 말하기 쉽도록 말을 걸어줬다.

    바넷사가 쉬는 날이다 보니, 저녁 식사가 준비 됐음을 알리러 누군가 직접 내 방에 찾아 왔었던 모양이다.

    "아, 바넷사랑 있었어."

    "으음? 바넷사?"

    설마 내 입에서 바넷사의 이름이 나올 줄 전혀 예상 못했는지, 디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응. 그게 말이지. 실은 전에 펠리시아 상태가 이상했다고 했잖아? 그때 얘들이 펠리시아의 기운에 당했던 거, 아무래도 내 스킬이랑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론 펠리시아 본인이 직접 풀어줘야 풀리는 거였던 모양이야. 사라랑 실비아가 풀렸던 건 그냥 내가 성자라 그런 거고."

    "……음? 그 말은 즉…."

    내 설명으로 무슨 말인지 곧장 이해한 듯, 디아나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깐! 그거 정말이야?!"

    그리고 사라 역시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아무래도 사라는 직접 펠리시아의 기운을 몸으로 겪었던 만큼, 바넷사가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운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실비아도 엄청 다급하게 날 찾아왔었지.

    실비아도 겪어본 자로서 어떤 느낌인지 알기 때문에 그렇게 당황했다는 건가.

    참고로 그 실비아는, 지금 저기 구석에서 내가 설마 바넷사와 관계를 맺은 걸 폭로할 줄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뻐끔뻐끔 벌리고 있었다. 귀엽다.

    "아, 오해하지 마. 직접 안 했어. 그냥 애무로 풀어주기만 했어."

    디아나가 오해하기 전에 나는 황급히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허벅지에 끼우고 한 것도 있어서 그냥 애무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양심이 찔렸지만…그래도 그 정도는 용서해줬으면 한다. 나 진짜 엄청 잘 참았다고.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쓸데없는 오해는 안 하네. 뭔가. 혹시 그런 맘을 먹기라도 한 겐가?"

    황급히 변명하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스웠는지, 디아나가 재미있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끝까지 가진 않았다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건데 의외로 침착하네.

    솔직히 또 토닥토닥 어택을 감행할 줄 알았는데.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을 더듬는 것이 수상하구먼."

    디아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로, 어디까지나 장난스런 어조로 그렇게 말해왔다.

    얘가 이렇게 전혀 의심이나 질투를 안 하니까 오히려 더 어색하네.

    이건 역시 그건가. 드디어 나에 대한 믿음이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런 거라면 나도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고 있었던 보람이 있다.

    만약 잘못을 범해버리고 나서 디아나가 이런 태도로 대해줬다면 진짜로 죽고 싶어졌을 거야.

    "또 그런다. 디아나야 말로, 이번엔 토닥토닥 공격을 안 하잖아. 드디어 날 믿는 거야?"

    "토닥토닥 공격?"

    내가 그렇게 반격하자, 디아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차. 실수했다. 디아나의 그 공격에 대한 명칭은 내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 아무튼. 디아나의 나에 대한 믿음이 드디어 여기까지 오다니. 크흑! 역시 디아나는 날 너무 좋아…."

    "착각하지 말게. 바넷사를 믿는 걸세. 자네가 바넷사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뭐, 뭐어…자네를 좋아하는 건 맞는 말이네만. 그것과 믿는 건 별개일세."

    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바넷사에 대한 믿음이었다.

    크흑. 젠장. 너 말이야. 그 바넷사가 오늘 이성을 잃고 어떤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아는 거냐?

    순간 질투로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지만, 나는 그 마음을 꾸욱 눌러 담았다.

    사나이 구원. 자기가 한 말에는 책임을 진다. 바넷사한테 잘 말해두겠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뭐, 뭐어…게다가 자네는 요즘 이 몸들에게 보고는 잘 하니 말일세."

    내 실망한 표정을 보고 조금 미안해졌는지, 디아나가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토닥거리면서 그렇게 말해줬다.

    디아나 할…누나아…. 역시 우리 디아나가 최고야.

    응. 나 진짜 엄청 노력했다고.

    "보고만 잘 하지, 다른 여자한테 손 뻗는 횟수는 늘어났지만요."

    하지만 옆에서 사라가 다시 내게 은근슬쩍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사라야. 그러니까 넌 왜 그렇게 언어폭력을 잘 구사하는 거냐.

    게다가 또 사실이라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며칠 사이에 대체 몇 명한테 손을 뻗은 거야.

    펠리시아랑 관계를 맺고, 레이첼 누님한테 고백하고, 마틸다한텐 사도 임명을 해주고, 바넷사까지….

    이 모든 게 단 며칠 만에 일어난 사건이다.

    응.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긴 했다.

    "읏…!"

    그리고 사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데미지를 입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서 나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던 마틸다는, 사라의 그 한 마디에 얼굴을 더더욱 새빨갛게 붉히며 움츠러들었다.

    전에는 그렇게 당당하게 날 좋아한다고 말했던 주제에, 막상 사도 임명까지 받고 나니까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주제에 벌써 반쯤 핑크빛 모드로 들어가 있는지, 가끔 힐끔힐끔 날 보는 시선이 몽롱했다.

    "하지만 그랬군요. 바넷사씨가 그런 상황이었다니…. 뭔가 평소와 좀 다른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화제를 돌려준 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천사님이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바넷사의 이상을 완전히 꿰뚫어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다니. 역시 천사님이셔. 너무 천사 같아서 이젠 말도 안 나온다.

    "음. 그렇구먼. 원래는 이 몸이 가장 먼저 눈치 챘어야 했거늘…. 화장을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네만 말일세. 설마 홍조를 가리기 위한 이유로 화장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런 레이아를 다독이듯, 디아나가 그렇게 말했다.

    아, 얘도 바넷사가 화장한 이유를 깨달은 거구나. 역시 머리 좋다니까.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니.

    "일단 바넷사가 화장한 이유는 설명해 줬었잖아?"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몸이 바넷사가 대체 얼마나 오래 같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겐가? 자네가 태어나기…코홈! 코홈! 아, 아무튼!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네!"

    디아나는 말을 하다말고 귀엽게 헛기침을 하더니, 눈을 꼭 감고 투정부리듯 내게 외쳤다.

    야. 자폭하려고 한 게 부끄러운 건 알겠는데, 괜히 나한테 화내지 마라.

    "그럼 바넷사가 한 변명을 믿지도 않았으면서 왜 아무 말 안 한 건데?"

    "이, 이 몸은 분명…아무것도 아닐세! 모르면 됐네!"

    디아나는 말을 흐리면서 내 얼굴을 힐끔힐끔 보더니, 결국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을 토닥토닥 때렸다.

    결국은 하는 거냐. 토닥토닥 공격.

    "진짜 이 바보는…아무튼 구원. 그보다 이제 할 일이 있지 않아? 마틸다도 여기 이렇게 있는 거니까."

    어째선지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날 한 번 구박한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마틸다를 쳐다봤다.

    그래. 할 일이 있었지.

    사실 아까 마틸다를 봤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고.

    "네, 네? 저요? 뭐, 뭔가요?"

    마틸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움찔하고 떨더니 뭔가 각오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마치 신고식이라도 치르려는 것 같은 표정이잖아.

    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마틸다."

    "네에…구원씨이…."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을 부르자, 방금 전 각오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바로 핑크빛 시선을 보내오는 마틸다였다.

    야. 미안한데 그쪽 얘기도 아냐.

    "여신 강림의 시간이야."

    그런 마틸다를 바라보면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네? 여신님?"

    "그래. 언젠가 말한 적 있잖아? 여신 강림은 내게 사도 임명을 받으면…."

    "…마, 말한 적 없는데요?"

    웃으면서 설명을 하는 내게, 마틸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없던가?

    아, 그러고 보니 옛날에 그냥 레이아만 가능하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던 기억이….

    아니. 그땐 맞는 말이었다고.

    사제 계열 중 사도 임명을 한 건 레이아 뿐이었고, 그 이상 다른 사람한테 사도 임명을 할 생각도 없었고. 무엇보다 괜히 사도 임명으로 여신 강림이 가능하단 걸 말하면 사제들이 다 내게 들이대서 귀찮아 질 것 같다는 생각에….

    "크, 크흠! 크흠! 아, 아무튼 가능해! 자, 드디어 다시 여신님을 강림시켜서, 이번에야말로 성자의 임무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마틸다의 스킬창을 열었다.

    전에는 성기사였다지만, 지금은 레이아와 마찬가지로 대사제로 전직한 거니, 분명 어딘가에 여신 강림 스킬이 있을 거다.

    사도 임명을 하고 아직 마틸다가 한 번도 레벨 업을 하지는 않았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사도 임명 보너스로 얻은 스킬 포인트가 있으니까 스킬을 찍을 수는 있을 거다.

    자, 어디에 있냐. 여신 강림이…여신 강림이…여기 있다!

    자, 스킬 포인트 분배를…안 되잖아….

    잠깐. 뭐야 이거. ……선행 스킬 조건 미달.

    레이아 때는 바로 여신 강림을 찍을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지만, 여신 강림을 찍는 데는 아무래도 선행 스킬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레벨이 높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성기사에서 전직한 몸이니까 레이아보다 대사제 스킬의 습득률이나 스킬 레벨이 낮은 건 어쩔 수 없지.

    무엇보다도 얜 저주에 걸려서 전진을 한 것인 만큼, 그 이후로 스킬 습득이나 스킬 레벨을 올릴 기회 같은 건 나와 던전에 다닐 때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이도 여신 강림을 찍는데 필요한 선행 스킬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대사제의 신앙심’이라는 스킬이었다.

    사제 계열 스킬들의 온갖 효율을 높여주는, 대사제의 가장 기본이 되는 패시브 스킬이다.

    하위 호환으로는 사제 때 배울 수 있는 기본 패시브 스킬, ‘사제의 신앙심’이라는 스킬이 있다.

    이 ‘사제의 신앙심’을 최고 레벨이고, 동시에 직업이 대사제라면 ‘사제의 신앙심’이 자동으로 ‘대사제의 신앙심’이라는 스킬로 강화되는 구조였다.

    뭐, 레벨은 1로 돌아가지만.

    아무튼 성기사가 되기 전에는 마틸다도 사제였기 때문에, ‘사제의 신앙심’ 레벨은 충분할 거다. 아마 찾아보면 ‘대사제의 신앙심도 익히고는 있겠지.’

    다만 문제는, 그냥 ‘대사제의 신앙심’을 찍기만 하면 ‘여신 강림’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만.

    ‘여신 강림’을 찍기 위해 필요한 ‘대사제의 신앙심’ 레벨은…만렙이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아마 마틸다의 ‘대사제의 신앙심’ 스킬 레벨은 엄청나게 부족하겠지.

    당연한 거다. 저주에 걸려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되자 대사제로 전직한 거니까.

    스킬 레벨을 올릴 틈 같은 건 전혀 없었겠지.

    물론 나와 던전을 다니면서 어느 정도 올리기는 했겠지만, 과연 만렙까지 찍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거다.

    안 그래도 던전에서 마틸다의 역할은 후위진의 호위고, 회복 마법은 웬만하면 레이아가 담당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렙이라니.

    요구 조건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었지.

    ‘여신 강림’은 성녀가 되고 나서야 쓸 수 있다고.

    설마 그거, 그냥 성녀 정도는 되어야 ‘대사제의 신앙심’의 레벨이 만렙에 도달한다는 뜻이었나?

    아니. 그렇다면 레이아는 대체….

    그때 레이아는 분명 대사제가 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는데?

    아니. 얼마 지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대사제가 되고나서 바로 신전에 찾아가서 여신 강림 찍은 거 아니었어?

    나는 황급히 레이아의 스킬 창을 열어봤다.

    대사제의 신앙심 MAX

    당연하게도 ‘대사제의 신앙심’은 최고 레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뭐야 이거.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이상한 데서 끊은 거 아니에요. 10분 정도 후에 한 편 더 올립니다.

    asfdgads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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