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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37화 (52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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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경의 고민

    아무리 레이첼 누님과의 티타임이라지만 당연히 사라를 혼자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어제의 데이트 때와는 달리 오늘은 사라도 내 옆에서 같이 차를 마시게 됐다.

    하지만 레이첼 누님은 싫은 얼굴 하나 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사라와도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사라랑 더 대화를 자주 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이 둘, 서로 가슴을 엄청 쳐다보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슴이 아니라 목걸이를 보는 거겠지만.

    레이첼 누님은 빛나고 있는 사라의 목걸이를, 사라는 레이첼 누님의 목걸이에 걸린 반지를.

    아, 그러고 보니 누님. 팔찌가 아니라 제대로 된 목걸이에 바꿔꼈구나.

    저렇게 제대로 된 목걸이에 반지를 끼고 있으니까 그냥 원래부터 저런 장신구인 것처럼 보인다.

    뭐, 모델이 좋은 탓도 있겠지만.

    "그때는 이미 저희는 수많은 개미들에게 둘러싸여있었고, 그 개미들은 일제히 저희에게 이빨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공격준비를 마치고 다가오는 걸 보고, 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우리 애들한테 성역 선포를 쓸 수밖에 없어!"

    아무튼 그런 둘 사이에 끼어서, 나는 일단 적당히 던전에서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나 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개미들에게, 말이죠?"

    "아, 네. 개미들에게. 그러니까 우리 애들이 말려들더라도 말이죠."

    "하여간 이 바보는 진짜…."

    개미굴에서 있던 무용담을 떠들다가 살짝 말실수를 한 날 보고 사라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뭘 이정도 가지고 그러냐. 사람이 살다보면 잠깐 말실수를 할 수도 있지.

    "진짜 이 바보랑 있으면 고생한다니까요."

    "어머, 그래도 사라씨는 모험가가 되고 처음 만난 게 구원씨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네에?! 전혀요!"

    "야. 그 반응은 뭐냐.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히 인정하라고. 내가 상처받잖아."

    "바, 바보! 이런 걸로 상처받지 말라고!"

    "후훗.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감사하고 있을 거예요. 사라씨를 처음 봤을 때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심지어 저한테 협박까지…."

    "레, 레이첼씨! 그 얘기는 잊어주세요!"

    레이첼 누님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자, 사라가 당황해서는 레이첼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걸 놓칠 내가 아니지.

    "뭐야. 협박이라니? 뭔데? 둘이서 내가 모르는 얘기하지 말고 좀 알려줘."

    "후훗. 그게 말이죠. 사라씨도 참. 처음 모험가 등록을 할 때 직업을 들킨 걸 알고는…."

    "그, 그러는 레이첼씨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고 하면 레이첼씨도 연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처럼 보이던데요! 이 바보가 상대라 다행이었던 거 아니에요?!"

    레이첼 누님이 뭔가 썰을 풀려고 했을 때, 사라가 큰 소리로 외치며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사라야. 너답지 않게 반격치고는 너무 어설프지 않냐.

    무슨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네, 네? 그, 그게 무슨…?"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레이첼 누님은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던 건지 당황하기 시작했다.

    "구원이 시선을 잠깐 돌릴 때마다 옷매무새를 만지거나 심호흡을 하고, 중간에 잠깐 화장실에 갔을 때는 아예 거울에 대고 예행연습까지 하던데요? ‘우후훗. 구원씨. 누나를 너무 빤히 쳐다보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누나한테 시선을 못 떼시겠어요? 너무…’"

    "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어, 어, 어, 어느새! 어느새!"

    응. 내가 사라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당황한 사라는 언제나 공격력이 엄청나구나.

    한 방 한 방이 레이첼 누님의 급소를 노리고 꽂히는 것 같다.

    하지만 레이첼 누님. 중간에 잠깐 화장실 가셨을 때 그런 것까지 하셨던 건가.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는 레이첼 누님을 미적지근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역시 이 누님. 내 앞에서만 경험 풍부하고 여유 있는 척 행동할 뿐, 실은 연애에 관해선 완전 초보인 게….

    "아, 아니니까요! 구원씨! 아니니까요!"

    "네. 그럼요. 그렇고 말구요."

    "누, 누나 말을 믿지 않는 거죠?"

    이상하다. 난 분명 긍정했는데 왜 저런 반응을 보이시지?

    "앗. 버, 벌써 시간이 아무튼 아니니까요! 구원씨, 사라씨 그럼 나중에 또 봬요!"

    휴식시간이 끝난 레이첼 누님은 결국 제대로 된 해명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뭐, 시간이 더 있었더라도 제대로 된 해명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방금 전 반응도 그렇고, 저 누님. 의외로 임기응변에 약한 건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또 이렇게 사라의 언어폭력에 의한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이래서야 앞으로는 레이첼 누님도 함부로 사라를 놀리거나 하진 못하겠네.

    사라야. 너 혹시 말싸움으로 내 본처 자리를 쟁취할 생각인 건 아니지?

    어째 하나하나 차례차례 격파해나가는 거 같다.

    "너 대체 그런 말은 어떻게 들었냐."

    "여, 엿들은 거 아니야. 내가 먼저 화장실에 있었는데 말소리가 들렸는걸."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자, 사라도 자기가 너무 폭로를 심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그건 그렇고 구원도 의외로 막 들이대지 않네. 한 번 차였으니까 더 필사적으로 달라붙을 줄 알았더니."

    그리고는 그 얘기는 더 이상 끝이라는 듯,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정말 엄청 티 나게 화제를 전환한 게 느껴졌지만, 나는 순순히 응해주기로 했다.

    마지막에 조금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오늘은 차를 마시는 내내 딱히 나와 레이첼 누님 사이를 방해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줬으니까 말이다.

    아까 길드에 갔을 때 일부러 레이첼 누님한테 날 보낸 것도 그렇고, 레이첼 누님과 내 관계에 꽤나 도움을 주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지.

    솔직히 나로선 방해해도 할 말 없는 수준인데 말이야.

    사라는 어쩌면 어제 날 놀려먹으면서 했던, ‘레이첼씨 마음에 들었으니까 꼬드겨봐.’ 라는 말에 책임감 같은 걸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본심은 아니겠지만, 날 놀린 게 미안해서 일단은 미약하게나마 협력하는 건지도.

    "그럴 리가 있냐. 이런 건 차근차근 애정을 다져나가는 거라고. 너한테 했던 것처럼."

    "그건 그것대로 왠지 싫네…."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는 사라는, 내가 레이첼 누님을 꼬드기려 드는 게 그리 탐탁치만은 않은 태도였다.

    역시나 날 도와준 건, 자기가 한 말이 있어서 그러는 것뿐인가.

    "아무튼 그럼 우리도 이만 갈까. 볼 일은 다 끝났으니까."

    "응. 그러자."

    사라는 자연스레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하지만 결국 별다른 소득은 없었네. 구원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사라랑 이렇게 돌아다니는 시간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득이지."

    "하여간 말은 잘한다니까…."

    살짝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가는 웃고있는 사라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얘도 은근히 쉽다니까. 뭐, 나한테만 한정으로 그러는 거지만.

    "그리고 이런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정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야."

    "더 큰 정보? 무슨?"

    "지금쯤이면 마틸다가 깨어나지 않았겠어?"

    "으응? 마틸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해줘도, 사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봐. 마틸다는 대사제라고. 그리고 내게 사도 임명을 받았어. 뭐 떠오르는 거 없어?"

    "응? 아, 아앗! 그, 그럼!"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는 듯,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여신님과 또 다시 대면할 시간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사도 임명 했을 당시에는 마틸다를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기분만이 머릿속에 가득해서 그만 까먹고 있었다.

    레이아의 쿨타임을 기다릴 것도 없이 여신 강림이 가능하단 걸 깨달은 건, 웃기게도 길드에 와서 정보 수집을 하는 도중이었다.

    때문에 아직 스킬창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마틸다 역시도 여신 강림을 습득 가능할 거다.

    성기사에서 직업을 옮긴 거라곤 하지만, 마틸다의 직업도 대사제인 건 마찬가지니까.

    여신과 만나면 전 같은 인사치례는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퍼부을 생각이다.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궁금한 건 모조리 대답을 듣고 말겠어.

    드디어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거다.

    솔직히 막상 이 때가 다가오니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진짜로 여신님이 흑막이고, 날 이용해먹으려는 것뿐이면 어쩌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낼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기다리라고요. 여신님.

    "구, 구, 구, 구원니이이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택으로 들어선 순간, 갑자기 실비아가 쏜살같이 내게 달려왔다.

    집에 돌아오자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드는 강아지를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

    뭐, 강아지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오, 실비아. 돌아왔네. 가족 분들이랑 얘기는 잘 했어?"

    "네, 넵! 어머니께서도 구원님께 안부 인사를…으아아앗! 그, 그런 것보다! 큰 일! 큰 일 났습니다아아!"

    내 대답에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하던 실비아는, 이내 다시 표정을 바꾸고 당황해서는 내게 외쳤다.

    심지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진동을 안 하는 걸 보면, 정말로 크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 그게! 그러니까! 그게!"

    실비아는 내게 매달린 채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내 옆에 있는 사라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만 구원님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네, 네에…그러세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실비아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사라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사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실비아는 내 손목을 붙잡고 내 방 쪽으로 달려나갔다.

    …응? 내 방? 얘 설마…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지?

    아니. 물론 전에 내가 쌓이기 전에 말하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얘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들 성격은 아닌데?

    "구, 구원, 구원님!"

    실비아는 내 방에 도착해서 문을 닫자마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금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보여서, 나는 실비아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줬다.

    "실비아. 진정해. 자, 심호흡부터 좀 할까. 쓰으읍…하아아…. 자, 따라해."

    "쓰으읍…하아아…우, 우아아아…."

    착실하게도 내 말대로 심호흡을 한 실비아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대신 현 상황을 인식했는지 진동에도 가동이 걸렸다.

    진정시킨 보람이 없잖아. 뭐, 귀엽지만.

    "알았어. 알았어. 조금 떨어질게. 자, 됐지? 말해봐."

    내가 조금 떨어진 채로 말하자, 실비아는 그제야 진동이 조금 약해지며 입을 열었다.

    "큰 일 났습니다아!"

    응. 그건 아까 들었어.

    그러니까 대체 뭐가 큰 일 났다는 건데?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내가 눈으로 재촉하자, 실비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성에 가니 펠리시아가, 펠리시아가 구원님의 장난에 당했다고!"

    "…응?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게, 그러니까. 장난은 자기가 친 줄 알았는데, 설마 구원님이 그런 장난을 치고 갔을 줄 몰랐다고 제게 불평을 늘어놨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자, 펠리시아가!"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자신이 내뿜었던 기운의 흔적이 스스로 풀리는 게 아닐 줄 몰랐다고! 덕분에 영향 받았던 모든 사람을 일일이 해소시켜주느라 혼났다면서, 저는 괜찮냐고…!"

    "…잠깐 기다려봐. 그러니까 그때 펠리시아가 내뿜었던 그 기운, 그게 다른 사람들은 계속 해소가 안 됐다고? 자위를 해도?"

    "네, 넵!"

    "일단 물어보겠는데, 넌 해소 됐지?"

    "넵!"

    이상하다. 사라도 분명 해소가 됐는데.

    아, 혹시 그건가? 성자가 서큐버스의 상위호환 같은 거니까, 굳이 펠리시아가 해소시켜주지 않더라도 내가 해소시켜준 애들은 문제가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결국 아무 문제 없다는 거잖아?

    아니. 하지만 그렇다면 실비아가 이렇게 당황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그럼 대체…아.

    "바넷사아아!"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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