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534화 (5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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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경의 고민

    "하읏…흐읏…흐아앗…."

    정신을 잃은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마틸다.

    나는 그런 마틸다의 몸을, 정확히는 왼쪽 반신에 번개 맞은 흉터처럼 검게 퍼져있는 저주의 흔적을 살펴봤다.

    엄청나게 줄어있어.

    보통은 이렇게 마틸다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하고 나면 5~10센티미터 정도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오늘은 거의 20센티미터 가까이 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좋을수록 저주 해제의 효율이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확실히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기분 좋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기분 좋았던 것처럼 마틸다 역시도 엄청나게 좋았던 모양인지라, 마틸다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설마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처음엔 팔목과 발목까지 닿고 있던 저주의 흔적은 비약적으로 줄어서, 팔 쪽의 흔적은 이제 팔꿈치까지 올라와있었고, 다리 쪽의 흔적은 종아리 중간 정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 정도라면 이제 소매가 긴 반팔이나 긴 치마 정도는 입어도 아무 문제없지 않을까?

    나중에 하나 사주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마틸다 얘는 저주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서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야.

    전신을 가리고 있는 추기경복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집에서 간편하게 입을 때조차 그런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이정도로 효율이 좋아졌다면 이주일정도 매일해대면 저주를 풀 수 있는 거 아냐?

    아니. 그건 아닌가. 팔다리는 면적이 비교적 작아서 빨리 줄어들었다고 쳐도, 몸에 있는 저주의 흔적은 넓게 퍼져있으니까 말이야.

    특히 저주의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하복부는 마치 검은 거미줄이라도 쳐진 것처럼 검은 선들이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뭐, 조바심내지 말자. 어차피 사도 임명까지 한 이상, 저주를 빨리 풀 필요도 없어졌고.

    지금도 고자가 되어서 고통받고 있을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냐고?

    내가 무슨 성자인줄 알아? 아니. 성자가 맞기는 하지만 말이야. 성자聖者가 아니라 성자性者라고. 요즘 유독 중의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본적으론 성자性者니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잠들어있는 마틸다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나는 그 입술에 다시 한 번 가볍게 키스를 해줬다.

    "으으응…당시이인…."

    꿈에서조차 내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마틸다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 꿈에 내가 나오는 건 좋은데 말이야. 너 설마 꿈속에서도 핑크빛 모드냐?

    꿈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이 저주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거야.

    나는 살짝 기가 막히면서도 마틸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방을 나왔다.

    자, 그럼. 이제는….

    마틸다와 얘기를 한다는 게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가서 사도 임명까지 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그만큼 마틸다가 빨리 기절했기 때문에 마틸다의 방을 나선 시간은 내가 아침에 예상했던 것보다 그리 늦어지지는 않았다.

    시간은 딱 점심시간. 지금쯤이면 다들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일 거다.

    아무도 식사하러 부르러 오진 않았지만, 뭐 바넷사는 오늘 휴일이고 말이다.

    게다가 나와 마틸다가 오래 동안 방안에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는 뻔한 거니까 말이다. 우리 애들도 신경 써줘서 굳이 부르러 오지 않았던 거겠지.

    아침에는 밑밥을 깐다고 레이아와 실비아에게 수영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는데, 시간이 절묘하게 이래서야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셋 다 식사중이네. 메이드씨. 제 자리도 준비 좀 해줄 수 있을까요?"

    "네, 넷! 바로!"

    바넷사가 없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메이드에게 말을 걸었던 나였지만, 메이드는 역시나 날 대하는 태도가 어색했다.

    그래도 꽤나 오래 얼굴 마주보면서 지냈잖아? 하나같이 저런 반응이면 은근히 상처받는데 말이야.

    뭐, 오래 얼굴 마주보면서 지낸 거 치고는 나도 메이드들의 이름 하나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난 항상 바넷사가 전담 마크했단 말이야.

    "으음. 자네 왔는가."

    아무튼 그렇게 말하며 식탁으로 다가가니, 디아나가 입에 있는 음식을 오물오물 씹어서 꿀꺽 삼키고는 예절바르게 냅킨으로 입가까지 닦은 후 내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조금 어색한 걸 보면, 역시나 내가 뭘 하다 왔는지 짐작을 하는 모양이다.

    내가 다른 여자와 잠을 자는 것 자체는 익숙해졌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방금 전까지 다른 여자와 행위를 하다 온 나를 대하는 건 아직도 조금 어색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꽤나 오래 걸렸네."

    뭐, 우리 용사님은 그런 거 상관없이 항상 직구를 던져오지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라가 어색해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 있는 셋 중 제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쿨한 척 하는 게 뻔히 보인다고 할까.

    하긴 그렇겠지. 사라 쟤가 제일 흥분해야 정상이니까 말이야. 성벽적인 의미로.

    "뭐, 예상외의 사건이 있었거든."

    "예상외…말인가요? 설마 마틸다 추기경님의 저주에 뭔가가…?"

    내 말에 레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긴. 마틸다의 방에 다녀와서 예상외의 사건이라고 하면, 보통 그런 생각부터 하게 되나.

    하지만 그건 그렇고 아무도 마틸다는 왜 같이 안 왔는지 안 물어보네.

    마틸다가 뻗어있는 건 너희 마음속에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거냐?

    뭐, 항상 뻗을 때까지 하는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조금 이따가 말해줄게."

    여긴 다른 사람의 귀도 있으니까 말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아에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나는 테이블을 둘러봤다.

    "그런데 실비아는? 안 보이네?"

    그래. 방금 전 내가 셋을 언급한 걸로 눈치 챈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엔 실비아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내가 없을 때도 구석에서 먹는 건가 싶어서 구석자리까지 꼼꼼히 살펴봤는데도 말이다.

    "실비아씨라면…분명 성으로 가신다고…."

    "성에? 무슨 일로?"

    아니. 평소라면 그냥 공주한테 볼 일이 있겠거니 싶겠지만, 얼마 전에 다녀온 직후잖아.

    또 공주한테 볼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든데 말이야.

    "바보. 무슨 일이겠어. 가족한테 근황도 알릴 겸 얼굴 보러 간 거지."

    내 질문에, 사라가 그런 것 정도는 신경 쓰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확실히 그걸 신경 못 쓴 건 내 잘못이지만 말이야.

    "전에 성에 갔을 때 내가 공주랑 있는 동안 연락 안 했어?"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었대. 통신 마법을 쓰려면 공주의 허락을 맡아야 하잖아? 원래는 처음 갔을 때 인사하면서 허락을 맡을 셈이었겠지만, 저번에는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아아. 과연. 그런 거라면 내가 나오고 나서라도 말했으면 됐을 텐데."

    "괜히 자기 때문에 시간 잡아먹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실비아는 그런 성격이니까. 구원이 좀 더 신경써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땐 나도 신경 못 써줬으니까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그런 건 내가 신경써주는 게 맞지. 게다가 넌 그때 정신없었을 거고."

    사라의 살짝 자조적인 말투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해줬다.

    성에 있는 초반엔 펠리시아의 그 향에 당해서 정신이 없었고, 그 후에는 펠리시아가 계속 장난을 거니까 그거에 놀아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가. 실비아는 오늘 없는 건가.

    뭐, 실비아 입장에선 어차피 내가 마틸다의 방에 있는 한 얼굴 보기도 힘드니, 일부러 그런 타이밍을 노린 거겠지만 말이다.

    진짜 타이밍이 안 맞네.

    실은 아침에 수영하지 말라고 한 거, 마틸다와 볼 일을 마친 다음에 실비아로 놀면…크흠. 실비아랑 놀면서 내게 익숙해지는 특훈이라도 하려고 그랬던 건데 말이야.

    게다가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먼저 내 곁에 있었던 실비아보다 마틸다에게 먼저 사도 임명을 해준 것도 있어서, 오늘은 반드시 진전을 보이고 싶었는데.

    하지만 가족에게 연락을 하러 갔다는데 그걸 방해하러 갈 수도 없는 일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그냥 수영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후에 같이 놀 거니까 시간 비워두라고 대놓고 말할 걸 그랬네.

    서프라이즈로 놀아주면 또 실비아가 귀여운 반응을 보일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 한 거였는데.

    "실비아씨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하는 레이아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주고,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마틸다와의 관계나 밝히기로 결심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너희, 식사 마치고 조금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어? 할 말이 있는데."

    "……."

    "……."

    "……."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셋이 동시에 침묵을 유지하고 날 빠아안히 쳐다봤다.

    뭐냐. 뭐야 그 시선은. 셋이 짜기라도 했냐?

    "바로 얼마 전에도 자네가 이 몸들을 이런 식으로 모았던 기억이 있네만. 이 몸의 기분 탓인가?"

    과, 과연. 아무래도 셋 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을 한 모양이다.

    하긴 그것도 그런가. 바로 얼마 전에 이런 식으로 레이첼 누님의 얘기를 하기도 했고, 마틸다의 방에 다녀온 타이밍에 이런 얘기를 하면, 그야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짐작이 되겠지.

    "기, 기분 탓 아닌가? 하하핫…."

    일단 그렇게 대응해봤지만, 날 바라보는 셋의 시선은 그 힘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내 방에 올 때까지도 이어졌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나? 그 할 말이란 것을 말일세."

    방 한가운데에 팔짱을 끼고 우뚝 서서는, 디아나가 그 조그만 몸으로 묘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무게를 잡았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얘들이 마틸다를 받아들일 준비는 이미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마음의 준비가 끝난 것과, 이렇게 직접 얘기를 듣는 건 별개의 얘기인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필살기를 쓰도록 할까.

    실은 뭔가 분위기 좋은 타이밍을 노려서 건네주려고 했지만, 설마 이 카드를 이런 식으로 소모하게 될 줄이야.

    "너희한테 줄 게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인벤토리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우, 우왓!"

    우선은 눈앞에 있는 디아나를 껴안듯이 그 목 뒤에 손을 뻗어서는 목걸이를 걸어줬다.

    디아나는 예상외의 기습을 받아서 놀랐던 건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읏!"

    "아아…."

    그리고 사라와 레이아에게도 차례로 목걸이를 걸어준 후에, 나는 한 발 떨어져서 셋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봤다.

    각자의 머리색에 맞춘 보석이 찬란하게 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구, 구원씨…? 이건…?"

    "아, 응. 전에 레이아가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 반경 100미터 안에 접근하면 빛나는 마법을 걸어놨어. 그리고 사라랑 디아나도. 단검이나 마석을 가지고 다니는 건 불편하잖아? 그리고 목걸이라면 던전 안에서도 옷 안에 숨겨서 빛을 없앨 수 있으니…우왓!"

    "구원씨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아가 감격한 표정으로 내 품에 안겨들었다.

    그래. 그래. 기뻐하는 것 같아서 나도 기쁘다.

    "언제 이런 걸…설마 그때?"

    사라는 짐작 가는 게 있는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레이첼 누님과의 데이트 때, 내가 장신구점에 갔던 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강렬한 기억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뭐어…그렇지."

    "바보. 그러면 어떻게 해. 데이트할 땐 상대한테 집중하는 게 매너잖아."

    내 대답을 듣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라는 기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나, 낭군님…미안하네. 이 몸은 오해를 하고 있었구먼. 이걸 건네주기 위해서 이 몸들을 부른 것이었는가?"

    디아나도 날 낭군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엄청나게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마라. 디아나. 그렇게 감격한 표정 짓지 말라고. 내 양심이 쿡쿡 쑤셔지잖아. 오해 아니야. 마틸다 얘기 하려고 부른 거 맞단 말이야.

    "무, 물론이지! 덤으로 마틸다한테 사도 임명을 했다는 말도 전하…."

    "역시 그 일이었는가아!"

    디아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곧장 내게 달려 들어와서는 옆구리에 토닥토닥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러면서도 내 가슴팍에 짓눌리고 있는 레이아의 가슴에는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꽤나 애처로웠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S.Moon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전에는 제대로 써놓고 이번엔 착각해서 반대로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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