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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때와는 다른
석양 노을이 거리 전체를 붉게 물들인 시각. 나는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점심 약속이었지만, 쇼핑에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요리도 풀코스로 시켜먹었기 때문에 식당을 나올 때는 어느덧 이런 시간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저택을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가 팔에 매달려서 걷고 있었다.
다만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낀다는 느낌보다는, 정말로 혼자 걷기 힘들어서 내 팔에 매달려있는 느낌이었다.
"흐윽…흑…하앗…흑…하아아…."
참고로 말해두지만, 얘 지금 울고 있는 거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 웃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게 웃기냐?"
"하앗, 하앗, 후우우우…. 응! 어어어엄! 청!"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말해봤지만, 사라는 숨을 고르더니 만면의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게 대체 얼마만이냐.
"저기. 저기. 지금 어떤 기분? 응? 지금 어떤 기분이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푸흡! 아하하하!"
"놀리던가 웃던가 둘 중 하나만 해라!"
"아하, 하아…미안. 미안. 그럼 웃을게. 아하하하하!"
아오! 이걸 그냥 확!
레이첼 누님과의 데이트를 따라다니게 만들었던 반동인지, 사라는 평소보다 훨씬 더 극딜을 꽂아 넣어왔다.
아니. 이건 날 놀리려는 것뿐만 아니라 진짜로 즐기고 있기도 한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서 화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따라오게 만든 내가 먼저 잘못한 거고, 사라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셈이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사라가 계속 이렇게 나오니 살짝 반격을 하고 싶어졌다.
"너 말이야…식당에 있을 때만 해도 똥 씹은 표정이었으면서…."
"미안. 미안. 하아…그런데 구원."
"또 뭔데?"
"나 레이첼씨가 엄청 좋아진 거 있지? 지금까지는 길드에서 잠깐씩 얼굴 보는 정도였으니까 잘 몰랐는데 말이야.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 꼬드겨보면? 우리 클랜에 들어오라고. 아 차였던가? 미안. 미안. 아하하하!"
"그렇게 말했겠다?! 너 두고 봐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이첼 누님만큼은 확실히 내 여자로 만든다!"
"아하하하하! 방금, 하앗, 방금 차인 사람이…푸흡!"
내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 봐도, 사라는 그냥 웃기다는 듯 웃기만 할뿐 위기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겠지.
열 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찍어도 안 넘어오는 나무가 많다.
특히 레이첼 누님같은 미인이라면 그럴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사라도 그걸 알기 때문에 이러는 거겠지.
"못할 것 같아? 할 수 있다니까?!"
"응. 해봐. 으, 후흡. 응원할게! 힘내라! 우리 성자님! 성자 전설을…쿠흡!"
얘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 네가 계속 그러면, 나도 할 말이 없을 줄 알아?!
"…야. 너 지금 하는 행동, 펠리시아랑 엄청 비슷한 거 아냐?"
"……하?"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야. 지금 실컷 자긴 놀려먹고 있는 주제에 내가 좀 반격했다고 정색하는 건 치사하지 않냐?
아무리 펠리시아가 싫어도 말이야.
"뭐어, 아무튼 재미있는 구경도 했겠다, 오늘 빚은 없던 걸로 해줄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펠리시아랑 비슷하단 말이 효과가 있기는 있었는지, 사라는 더 이상 놀리지 않겠다는 듯 빙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입 꼬리에 꾸욱하고 힘이 들어간 걸 보면, 웃음을 참기 꽤나 힘겨워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갔으면서 차이다니…후읍…! 으읍!"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사라는 다시 그렇게 말하며 빵 터지려고 했다.
물론 내가 그 전에 사라의 입술을 붙잡아서 입을 벌리지 못하게 막았지만.
사라는 항의하듯이 내 팔을 때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서부터 사라를 안은 채 계속해서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차인 것도 아니거든? 너도 반지 받은 거 봤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라가 안간힘을 써서 자기 입을 막고 있던 내 손을 내려서 자기 배 쪽에 두르도록 만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려먹은 주제에 또 끌어안고는 있으라는 거냐.
"푸하아. 미련이 너무 넘치는 거 아냐? 반지는 그냥 비싼 거 주니까 받은 거…아야! 야! 구원!"
그리고 다시 그런 말을 했던 사라였지만, 내가 손을 올려서 가슴을 꽉 쥐자 얼굴을 붉히면서 내 손을 탁탁 때려댔다.
물론 나는 그 공격에 전혀 굴하지 않고, 사라의 손에 딱 들어오는 가슴을 찌부러트릴 듯 강하게 주물렀다.
물론 진짜로 찌부러트리겠다는 건 아니다. 그러면 나만 손해니까.
"너 말이야. 자꾸 놀려봤자 좋을 거 없을 텐데? 오늘 밤이 누군 차례인지 잊은 거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서 물건을 세우고 사라의 엉덩이에 비비자, 사라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졌다.
"이, 이런데서! 미쳤어! 미쳤어! 야! 구원! 그만 안 해?!"
"아까 내가 그만하라고 했을 때, 넌 그만했던가?!"
내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사라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지면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잠, 농담이지? 정말로?! 그, 그만! 이따가 실컷 해줄 테니까!"
"약속한 거다?"
사라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나는 물건을 죽이고 사라에게서 떨어졌다.
사라는 순간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시, 심한 짓 하려는 거 아니지?"
"글쎄."
"에, 에이. 우리 오빠는 그런 쪼잔한 짓 하는 사람 아닌 거, 사라는 아는 걸."
"이제 와서 귀여운 척 해봐야 소용없다."
"오, 오빠야아…."
형세가 역전되어 내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 사라를 보며, 나는 아까 전 레이첼 누님과의 일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사라는 모르고 있겠지만, 실은 완전히 차인 게 아니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라가 모르는 뒷얘기가 조금 남아있거든.
"…네? 저, 저…지금 차인 거예요?"
그때 내가 황망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레이첼 누님이 조금 곤란하단 표정을 짓더니 힐끔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차를 뿜고 켁켁대고 있는 사라의 모습이 있었다.
사라야. 아무리 내가 차인 게 예상외라도 그렇지, 완전히 들켜버리면 어떻게 하냐.
사라의 모습을 확인한 누님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내게 향하고는 조그맣게 뭔가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손바닥 크기의 작은 바람의 정령이 튀어나와 우리 근처를 바람으로 감쌌다.
그러자 주변에서 들리던 소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로지 나와 레이첼 누님의 숨소리만이 이 공간을 지배하게 됐다.
아무래도 지금부터 할 대화 내용을 사라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지금부터라고 할까, 애초에 고백 자체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지.
"그야 당연히 차이죠.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을 정도에요. 어째서 제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그, 그야 전에 누님께서…."
"구원씨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지금도 구원씨를 좋아해요. 고백을 받아서 행복하고요."
내 중얼거림에, 누님은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해줬다.
"그럼…."
"하지만. 아무리 그런 구원씨가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첩으로 받아준 다음 똑같이 사랑해주겠다는 말은 못 믿겠어요. 당연하잖아요?"
"아…."
역시 그런 건가. 하긴. 그래.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거다.
대체 난 무슨 자신감으로 누님이 순순히 내 첩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정말로…. 방금 전까지 멋졌으면서 그런 표정 짓는 거 아니에요."
풀이 죽는 날 보고, 누님이 또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검지 끝으로 내 코끝을 톡하고 한 번 건드려준 후, 빙긋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어디 한 번 제가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봐요."
"…네? 믿을 수 있도록?"
"네. 그야 당장은 믿을 수 없지만, 구원씨가 계속해서 절 그렇게 아끼고 좋아할 거란 걸 증명해보이면…혹시 알아요? 제가 또 넘어갈지?"
누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왼손 약지에 꼈던 반지를 스르르 빼냈다.
그리고는 팔목에 몇 바퀴 감아서 두르고 있던 팔지를 풀어서 그 끈에 반지를 넣고는, 그대로 목에 둘렀다. 마치 목걸이처럼 말이다.
임시방편으로 팔찌를 목걸이로 만든 거라 그런지, 줄이 길어서 반지가 완전히 누님의 가슴골로 들어가서는 모습을 감췄다.
"그동안 이 반지를 끼는 건 보류해두도록 할게요. 뭐에요? 그 표정은? 자신 없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첼 누님은 또 다시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그 미소를 보고, 나는 뭔가 후련한 기분이 됐다.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네.
오늘 내내 날 띄웠다가 낙담시키면서 가지고 노셨으면서, 마지막에는 낙담시켰다가 띄워주는 방식으로 날 골려먹다니.
반지로 깜짝 놀래키는 건 나라고 생각했지만, 카운터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아까 전에는 의외로 풋풋하니 뭐니 하고 건방진 생각을 했었지만, 역시 난 이 누님한테 당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뇨! 전혀요! 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매일 같이 대쉬하고 대쉬하고 대쉬해서, 누님을 반드시 제 여자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내가 힘차게 그렇게 말하자, 누님이 다시 또 부끄러워졌는지 살포시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살짝 옆으로 피했다.
이 모습을 보면, 솔직히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누님도 날 엄청 좋아하는 게 맞다니까!
"그, 그래요. 어디 힘내 봐요."
하지만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누님은 다시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애써 만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너무 늦으면 또 몰라요? 저 이래 봬도 엄청나게 인기 많으니까요. 너무 늦어버리면 다른 남자가 채갈지도 몰라요?"
"그런 일은 절대로 만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누가 뭐래도 누님은 제 여자에요."
"저, 정말…그러니까 아직 아니라고요."
누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 얘기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 황급히 손을 휘저어 정령을 돌려보냈다.
당연히 주변을 감싸서 소리를 차단하고 있던 바람의 장막도 동시에 사라졌다.
힐끔 사라를 보니, 종업원을 불러서 자신이 뿜은 차의 뒤처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우리 대화가 잠시 들리지 않았던 건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후우. 잘 먹었어요. 오늘은 정말로 즐거웠어요."
"아, 아뇨. 저야말로. 누님과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후훗.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이만 갈까요?"
그렇게 말하고, 누님을 일어나서 다시 내게 팔짱을 끼고 식당을 나왔다.
그때는 이미 저녁노을이 하늘을 반쯤 물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이런 시간. 그럼 구원씨. 다음에 길드에서 봐요.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요."
"네?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요?"
왠지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워서 누님을 잡아봤지만, 누님은 내 팔에서 스르르 팔을 풀고는 내 앞에 똑바로 섰다.
"어머? 그 말은 밤까지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인가요?"
"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후훗. 안 돼요. 아직은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누님은 아직은 이란 말에 힘줘서 말하고는 빙긋 웃으며 내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밀고 발돋움을 하여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줬다.
"그럼 나중에 봐요."
그리고는 다시 내 곁에서 살며시 떨어져서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인사를 해준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나는 그런 레이첼 누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뒤처리를 끝내고 우리가 사라졌단 사실을 깨달은 사라가 황급히 식당에서 나온 다음에, 이렇게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얘기다.
사라는 내가 완전히 차였다고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아직 찬스는 충분히 있다.
물론 이미 한 번 데인 경험이 있으니까 전처럼 무조건적인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누님을 내 여자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욕은 가득했다.
사라 얘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 한 번 꼬드겨 보라고 보채기까지 했으니까, 이제 눈치도 안 보고 맘껏 꼬드겨주겠어.
뭐, 그 믿음이란 걸 어떻게 줘야 할지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지만. 그거야 앞으로 차차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보다 우선 지금은….
"오늘 밤은 긴 밤이 될 것 같군."
"오, 오빠? 구원 오빠?"
나는 필사적으로 내게 매달리는 사라를 보며 씨익 웃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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