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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25화 (50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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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때와는 다른

    "으음. 그런 거라면…."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레이첼 누님의 뒤에서, 몰래 점원을 불렀다.

    내가 조용히 손짓하는 모습에 점원들도 상황을 눈치 챘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가위 바위 보를 시작하고는 이긴 점원이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방금 전 가위 바위 보말이야. 필요 있었냐?

    무심코 딴죽을 걸고 싶어졌지만, 지금은 레이첼 누님에게 들키지 않는 게 우선이다.

    "저 여성분께 어울릴만한 반지를 찾고 있는데요. 추천할 물건은 있나요? 아, 사이즈 보정 마법이 들어간 걸로요."

    "네, 네에. 그런 거라면…."

    내가 조그맣게 속삭이자, 점원이 몸을 배배꼬면서 나를 한쪽 진열대로 안내했다.

    점원 태도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레이첼 누님은 상당히 진지하게 목걸이를 골라주고 있는 모양인지 아직 이쪽에 눈치를 채진 않은 것 같았다.

    보통 마음에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 선물을 골라달라고 하면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저 누님도 참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

    나도 이틈에 얼른 골라놓지 않으면.

    실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레이첼 누님께 고백 전에 실비아한테 먼저 반지를 주는 것까지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내 예상보다 실비아의 상태가 훨씬 심각한 바람에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반지라도 줬다간 걔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생명이 위험하니까.

    실비아한테 반지를 주는 건, 일단 사도 임명으로 죽지 않는 것부터 확인한 다음에 하도록 하자.

    "으음…. 고민되네요. 이거랑 이거…아, 이것도 어울릴 것 같네요. 세 분 모두 예쁘시니까 실은 뭘 걸어도 어울리겠지만요. 아, 그렇지. 제가 몇 가지 고른 것들 중에서 구원씨가 직접 고르시는 게 어때요? 이런 건 마음이 중요하니까요. 마지막은 역시 구원씨가 직접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역시 그런가요? 그런 것까지 조언해주시고. 누님, 감사합니다."

    "아뇨. 오늘 재밌게 같이 다녀준 보답이에요."

    내가 감사 인사를 하자, 누님은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해줬다.

    저런 미소를 보니까 또 가슴이 아파지네.

    실은 누님이 오늘 내내 날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낙담시키면서 놀려먹었으니까, 나도 비슷한 방법을 한 번 시도해본 건데 말이야.

    뭐 누님과 정반대로 난 낙담시켰다가 감동시키는 작전이지만.

    하지만 저렇게 미소 짓고 있는 누님을 보니 약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누님에게 줄 반지를 사러 왔다고 할 걸 그랬나?

    대놓고 금발 벽안의 아는 누님한테 줄 선물을 고르러 왔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해봤자 이미 늦었지만.

    어쩔 수 없지. 낙담시킨 만큼 고백할 때  최선을 다할 수밖에.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누님이 골라준 후보군들 중 고심해서 우리 애들 셋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그렇게 장신구점에서 볼 일을 마치고, 우리는 잠깐 누님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물론 엄한 짓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냥 내 인벤토리에 있는 짐을 배달해주기 위해서다.

    아무리 그래도 사라가 따라오는 와중에 그런 짓까지 할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라고.

    식당으로 가는 도중에 이 기숙사가 위치해있기도 했고 말이다.

    "자, 자아. 들어오세요."

    전에도 마찬가지 이유로 한 번 왔던 곳이지만, 다시 봐도 역시나 신기한 곳이다.

    엘프가 살고 있다고 격렬히 주장이라도 하듯, 바닥 벽 할 것 없이 전부 나무였다.

    그것도 나무 판자로 된 게 아니라, 마치 정말 나무 안쪽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이 건물 겉보기엔 평범한 건물이었는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만든 걸까?

    게다가 가구나 장식물도 뭔가 나무나 나뭇잎 관련이 많았다.

    빠른 몸놀림이나 던전에 갈 때 입는 그 노출도 높은 나뭇잎 드레스를 봤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우리 쪽에 있는 순혈 엘프보다 훨씬 엘프답단 말이야.

    "후, 후훗. 또 두리번거리고. 누, 누나 방에 들어와서 기, 긴장되나요?"

    저보다는 누님이 더 긴장한 것 같지만요.

    마치 내가 뭔 짓이라도 할 것처럼 미묘하게 허리를 뒤로 빼고 있고.

    안 잡아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네."

    물론 그런 생각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나는 순순히 그렇게 대답했다.

    "후훗. 구원씨도 참. 성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래도 되겠어요?"

    "아뇨. 성자인 거랑 관계없이 이건 어쩔 수 없어요. 다름 아닌 레이첼 누님의 방이고."

    "또. 또 그렇게. 누나를 너무 놀리면 안 돼요? 구원씨는 평소에도 그러니까 착각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겠네요. 만약 진심이 돼버리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누님은 무리해서 장난스런 태도를 유지하는 것 같은 말투로 그렇게 말하면서 가볍게 내 팔을 톡 두드렸다.

    하지만 이거, 꽤나 절호의 찬스 아니야?

    실은 고백은 식당에서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판이 깔려져 있으면 할 수밖에 없잖아.

    "어쩔 것 같아요?"

    "어, 어쩔 것 같냐니…그, 그게…그, 그래! 자, 짐은 이쪽에 놔두시면 되요!"

    아, 도망갔다.

    역시. 데이트하는 내내 느꼈던 거지만, 이 누님. 뭔가 남자 다루는데 능숙한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풋풋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다.

    혹시 누님으로서 어설픈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뭐 그런 걸까?

    뭐, 아무래도 좋지만.

    결국 누님의 방에서는 그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누님의 짐을 꺼내 하나하나 지정하는 위치에 놓았다.

    기회를 놓친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고백은 어차피 식당에서 하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누님의 방을 나서고, 우리는 드디어 전에도 같이 한 번 온 적 있는 고급 레스토랑 ‘시공의 흐름마저 느리게 흐르는 곳’에 도착했다.

    다시 봐도 이름 참 거창하단 말이야.

    시공이라니. 분식집 같은 곳에선 절대 맛볼 수 없는, 그야말로 고급 레스토랑다운 표어다.

    아무튼 레스토랑으로 들어간 우리는, 전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주문하고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혀에서 그냥 녹아내리는 것 같은 훌륭한 맛이다.

    전에는 결국 도중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나갔으니까 말이야.

    물론 우리 저택에서 하는 식사도 뒤쳐진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가끔 이렇게 외식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다음에 우리 애들도 데리고 와야지.

    "후훗. 또 테이블 밑에 숨을 준비라도 해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식사를 하면서 누님도 그 생각이 났는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장난기만 있는 표정은 또 아니었다.

    우리 애들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씁쓸해지기라도 한 걸까?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아까 분명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었잖아.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네? 하지만…."

    "괜찮아요."

    "그, 그런가요…."

    내가 생각보다 당당하게 나와서 놀랐는지, 레이첼 누님은 내게 반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괜찮다고 말해주자, 누님은 살짝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볼을 붉히면서 또 다시 말을 얼버무렸다.

    부끄러워서 얼버무리는 건 아까와 마찬가지 였지만, 아까보다 훨씬 더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점차 내 말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서 조금 심장이 오므라들었는데, 다행히 누님께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말이야.

    내가 괜찮다고 하는 순간 식당으로 사라가 들어왔단 말이야.

    사라는 레이첼 누님의 자리에서 사각에 위치하는 테이블에 앉더니 뭔가 주문을 했다.

    그리고는 날 한 순간 노려보더니, 흥하고 고개를 돌렸다.

    일단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방해를 할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고백을 할 건데 말이야.

    안 그래도 뒤에서 나랑 레이첼 누님의 데이트를 보면서 상처 받았을 텐데, 사라 쟤가 고백까지 듣게 되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지지 않을까?

    분명 이 식당에는 테이블마다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지?

    아니. 하지만 또 그러면 자기한테 숨기고 싶은 뭔가를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고민 끝에, 나는 그냥 이대로 사라가 보는 앞에서 고백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사라에게 들려주지 못할 말은 하지도 않을 거다.

    그리고 내 진심을 사라가 제대로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결심을 마치고, 나는 다시 레이첼 누님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런 때에 다른 생각을 계속하는 건 레이첼 누님한테도, 그리고 저렇게 협력해주고 있는 사라한테도 실례니까.

    누님과 두런두런 대화를 하는 사이에, 어느 샌가 메인 디시도 깔끔히 비우고 지금은 디저트 타임이 됐다.

    슬슬 식사가 끝나갈 타이밍에, 레이첼 누님이 입을 열고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늘은 이렇게 식사에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무척 즐거웠어요."

    레이첼 누님이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지금이야말로 고백을 실행할 절호의 찬스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뇨. 저야말로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훗. 이번엔 제대로 보답해줄 수 있어서요?"

    누님. 그러니까 그런 미소 짓지 말라니까요.

    역시 저번엔 그것 때문에 화났던 게 맞았구나.

    "아뇨. 누님과 데이트를 할 수 있어서요."

    "……네? 그, 그건…!"

    아마 누님도 내가 고백한다면 이 타이밍에 말할 거라고 대충은 예상했을 텐데 말이야.

    전에 구조 당했을 때, 위에서 다시 고백한다고 하기도 했고.

    설마 오늘 하루 종일 내가 고백을 안 해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건가?

    "누님. 전에 절 구해주셨을 때, 제가 고백하니까 그랬죠? 그때 전 조난 중의 외로움이 사무쳐서, 잠깐 자신의 감정을 착각한 것뿐이라고. 그러니 이렇게 멀쩡한 상태로 다시 한 번 말 할게요.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주세요. 이 감정은 절대 착각 따위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아까 사뒀던 반지를 꺼내 누님께 내밀었다.

    누님의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푸른빛으로 빛나는 보석이 빛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이 났다.

    "아, 아아…구원씨…읏. 하, 하지만…."

    역시 아까 전엔 눈치 채지 못했던 건지, 레이첼 누님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감탄사를 흘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고, 뭔가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애들이라면 걱정 마세요. 허락은 받았어요."

    "네?! 허, 허락을요?! 다른 분들이 전부 허락해주셨다고요?!"

    반쯤 그런 뉘앙스가 풍기는 말을 이미 몇 번이나 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이렇게 확실히 말하자 누님은 또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정말로 허락을 받았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네. 첩이라면 허락해 주겠다고…."

    솔직히 이 말을 할 때는 나도 조금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대뜸 첩이란 말을 꺼내는 건 어떤가 싶기도 했지만, 이건 우리 애들과의 약속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지금은 얼렁뚱땅 넘어가고, 레이첼 누님이 내 고백을 받아준 후 나중에 가서야 첩으로 받아준다고 하는 게 더 쓰레기 같은 행동이니까.

    말 할 거면 아예 처음에 말해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건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누님이라면 왠지 승낙해 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누님께 느끼한 말을 내뱉으며 대쉬했던 그때의 내가 아니다.

    나에 대한 누님의 감정도 그때와는 전혀 다를 거다.

    모든 것이 처음 그때와는 전혀 다른 거다.

    "첩…인가요?"

    그래도 역시 첩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곤혹스런 기분이 든 건지, 레이첼 누님이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첩이란 단어를 듣고도 바로 거부하지 않는다는 건, 역시 누님에게도 그럴 생각이 있다는 거였다.

    나는 좀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네. 하지만 첩이라는 건 그냥 형식상의 문제에 불과해요. 제가 누님을 좋아한다는 건 변함이 없어요. 절대 소홀히 하지 않을게요.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첩이라니…저 이래 봬도 꽤나 귀한 집 자식이에요? 그야 디아나님과 비교하면 조금 격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격이 떨어진다니! 전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레이첼 누님은 누님 그 자체만으로 존귀하세요. 첩이란 건 정말로 형식상으로 그렇다는 것에 불과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전 처첩에 관계없이, 다들 똑같이 사랑할 생각이에요. 물론 누님도 똑같이 사랑할 거라고 맹세해요."

    "그런…그런 게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네. 가능하단 걸 증명해보이겠어요. 누가 뭐라 해도 전 성자니까요. 그런 것도 불가능해서야 뭐가 성자겠어요. 누님을, 아니. 누님뿐만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모두를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보이겠어요."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겠다.

    그런 뜻을 담아서 누님에게 내 뜻을 전하자, 누님은 그제야 곤혹스런 얼굴 표정을 풀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후훗. 그랬죠. 성자님이셨죠."

    "네. 그러니까 누님. 계속해서 제 성자 전설을 지켜봐주세요. 모험가와 안내원의 관계가 아니라, 제 옆에서. 제 여자로서."

    내가 다시 한 번 반지를 내밀자, 누님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내가 내민 반지를 짚었다.

    자신의 왼손 약지를 반지 안에 천천히 밀어 넣은 후, 누님은 마치 잘 어울리냐고 말하듯이 손가락을 곧게 펴고는 손등을 내게 보여주듯 손을 얼굴 옆으로 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누님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거절할게요."

    언젠가 한 번 들은 적 있는 대사를.

    "…네?"

    누님. 지금 반지 왼손 약지에 스스로 끼신 거 맞죠?

    정말로 예상외의 대답에, 나는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기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 사라가 마시던 차를 내뿜는 게 보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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