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524화 (50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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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때와는 다른

"누님.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초대하고 나서 이런 말 하는 건 조금 이상할지 모르지만, 식사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쇼핑부터 조금 하는 게 어떨까요?"

"흐으응?"

내가 그렇게 말하자, 누님이 내 팔에 그 거대한 가슴을 더욱 밀착시키면서 뭔가 가늠해보듯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누님은 또 오랜만에 휴가를 쓰신 거죠? 모처럼 휴일이니까 조금 돌아다니자고요."

"어머, 신경 써주는 건가요? 좋아요. 그러면 그럴까요?"

내가 전에 누님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해주자, 누님이 쿡하고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이런 말을 하는 내 의도를 누님도 이해해준 모양이었다.

전에 누님은 분명 나랑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녔을 텐데, 나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자면 데이트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번엔 내 쪽에서 확실히 데이트라고 인식을 한 상태에서 쇼핑을 즐기는 거다.

하는 행동은 저번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행위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크게 변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조금 걷고 싶다고 쇼핑이라니. 구원씨 쇼핑 싫어하시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뭐 살 거라도 있는 건가요?"

자연스레 상점가로 향하면서, 누님은 내게 이상하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이런 질문을 하시다니.

전에 같이 쇼핑했을 때 내가 그렇게 쇼핑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뭐, 누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스킨십의 강도가 꽤나 강해서 이도저도 못하고 당황했던 건 기억하고 있지만.

"네? 아뇨. 그다지. 그냥 누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어머. 그래 보이나요? 후훗. 그래도 다행이에요. 슬슬 생필품도 떨어져 가거든요."

"누님…. 적어도 쉬실 때는 좀 쉬시지 않으면…."

생필품이 떨어져간다니.

그야 쉬는 날도 없이 매일같이 일을 나가면 그런 거 살 시간이 없기도 하겠지.

이 도시는 모험가들의 생활에 맞춰 기본적으로 밤에도 문을 열고 있는 가게가 많기는 하지만, 이 누님은 거의 자는 시간만 빼고 항상 길드에 있는 것 같은 이미지니까 말이야.

그러고 보니 보통 이렇게까지 워커홀릭이면 뭔가 일에 찌들려 푸석푸석한 느낌이 날 법도 한데 말이야. 이 누님은 그런 게 전혀 없단 말이지.

뭐, 단순히 누님이 미인이라서 그렇게 보일 뿐인 건지도 모르지만.

"후훗. 구원씨가 다음부터는 언제 던전에 들어가고 언제 나오는지 확실히 일정을 말해주시면 생각해볼게요. 구원씨는 언제나 부정기적으로 던전을 오가니까요."

워커홀릭인 누님에게 조금 질린 느낌으로 그렇게 말하자, 누님이 내게 카운터 펀치를 날려왔다.

뭐, 뭐라고? 그럼 누님이 지금까지 쭉 하루도 안 쉬고 길드에 있었던 게 나 때문이라는 뜻인가?

날 만나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서 매일같이 그렇게 일하고 계셨다는 뜻이야?

이건 그런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거지?

크윽. 누님. 제가 바보였습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누님의 마음을 몰랐….

"그렇게 계획도 없이 즉흥적으로 던전에 다니니까 전과 같은 사고가 발생하는 거예요. 모험가분들이 그렇게 던전에서 사고를 당할 때마다 안내원들이 얼마나 속이 타는지 아세요?"

"아, 그런 뜻…."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이 누님은 가끔 이렇게 그럴듯한 말을 해놓고는 낙담시킨다니까.

혹시 날 놀려먹으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

"응? 그런 뜻이라뇨? 무슨 뜻인데요?"

"아, 아뇨. 아무것도."

"에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뭔데요? 누나한테 말해 봐요."

누님은 내 팔에 팔짱낀 손과는 반대 손으로 내 옆구리를 간지럽히듯 콕콕 찌르면서 미소 지었다.

역시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

누님. 남자 다루는 게 너무 능숙하신 거 아닙니까?

뭐, 팔에 닿은 가슴 너머로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지는 걸 보니, 누님도 전혀 두근거리지 않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지금 누님이 입고 있는 원피스가 비교적 얇은 소재라고는 하나, 누님도 상당한 크기의 가슴을 자랑하신다.

이 가슴 너머로 고동이 느껴진다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라고.

"하핫. 그냥 제…읏!"

누님의 옆구리 공격에 간지럼을 타면서 미소 지었을 때, 갑자기 목덜미에 찌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서 성자의 파동을 날리려고 자세를 잡았을 때, 거기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사라야. 너냐? 어떻게 따라오고 있나 싶었더니….

그야 사라도 눈에 띠니까 말이야.

일단 성자랑 항상 같이 다니는 여자들 중 하나로 유명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 미모다.

미인이 많은 이 도시에도 유독 눈에 띠는 미모의 주인.

걷고 있으면 남녀 불문하고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뒤돌아보게 만드는 미인이라는 거다.

그야 조용히 따라오려면 로브라도 써야겠지.

아무튼 조용히 따라오던 사라였지만, 나랑 레이첼 누님이 너무 사이가 좋아 보이니 조금 질투하게 된 모양이었다.

깜짝 놀라라. 그만 반사적으로 성자 스킬을 쓸 뻔 했잖아.

여러 의미로 큰일 날 뻔 했다.

하지만 나도 반사적으로 성자 스킬을 쓰려고 하다니. 역시 조난 당시의 후유증이 조금 남아있는 건가?

"구원씨? 왜 그러세요?"

갑자기 뒤를 돌아본 내게 놀랐는지, 레이첼 누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 쳐다봤다.

누님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건가?

즉, 살기를 완벽히 컨트롤해서 나한테만 날렸다는 건가.

그럼 고의로 그랬다는 거 아냐!

용사의 재능을 쓸데없는 데에 십분 발휘하고 말이야.

야. 이왕 도와주는 거니까 조금 장난치는 것 정도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줘라.

나는 속으로 사라에게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레이첼 누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아뇨. 아무것도. 뭔가 시선이 느껴졌는데, 기분 탓이었나 봐요."

"시선이라니. 그런 건 계속 받고 있잖아요. 아직 익숙해지지 않으신 건가요? 성자님?"

다행히 누님은 내 말뜻을 그런 의미로 해석해주신 건지, 빙긋 웃으면서 다시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시선만큼은 평생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네요."

"에이. 그래서야 성자 전설은 어떻게 보여주시려고요? 보여주시는 거죠? 성자와 안내원 사이로서."

…안내원이란 단어를 유독 강조하는 지금의 발언으로, 누님이 나한테 왜 그렇게 장난을 치는 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아졌다.

설마 누님,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아니, 하지만 누님도 전에 분명…! 내가 먼저 말했구나. 죄송합니다. 둔해빠져서.

"어머, 벌써 도착했네요. 후훗. 각오하세요. 전에는 구원씨한테 미안해서 적당히 했지만, 오늘은 구원씨가 먼저 꼬드긴 거니까 철저하게 할 거에요. 도중에 그만 하자고 말하기 없기에요?"

그리고 상점가에 도착하자마자, 누님은 내게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훗. 누님. 설마 그 정도로 협박을 할 셈이신가요? 누님이 얼굴만 보고 있어도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 빠른데, 제가 도중에 항복할 리 없잖아요?"

"그, 그 말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나 한 번 보죠!"

좋아! 드디어 한 방 먹였다!

역시 이 누님은 직구에 약해!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완전히 남자를 손아귀에 쥐고 가지고 노는 데에 능숙한 누님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또 얼굴을 붉히고 풋풋한 반응을 보여주신다.

아까 전에 내가 허리에 팔을 감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 누님 설마 생각 외로 남자랑 이렇게 진지하게 만난 적은 없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전에 식당에서 우리 애들한테 변명을 했을 때도, 그 비슷한 말을 했던가?

후훗. 누님도 참. 왜 이렇게 귀여우실까.

오늘 처음으로 누님에게 한 방 먹였다는 성취감에 취해서, 나는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누님. 생필품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가게 구석의 의자에 앉아서, 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당연하다.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걸 누가 듣기라도 해봐라. 큰일 나지.

"구원씨! 이 옷은 어떤가요?"

"네! 음. 노출도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그야 물론 전 보기 좋지만, 다른 남자들한테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 모습이네요."

그리고 누님이 손에 옷 하나를 들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지을 수 있는 최고로 멋진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어, 어머. 지금 이 누나를 꼬드기는 건가요?"

레이첼 누님은 기분 좋으면서도 부끄럽다는 듯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볼을 붉혔다.

"안 되나요?"

"구원씨는 항상 그렇게…디아나님한테 이를 거예요?"

"그러세요."

아차. 지금은 이 말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허락받았다는 건 이따가 식사 중에 고백을 하고 나서 밝힐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거의 허락 받았다고 말해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읏. 아, 아무튼 이 옷은 아니란 거죠? 그럼 다른 옷을 골라볼게요."

역시 누님도 그걸 깨달았는지, 아까처럼 여유로운 반응을 보여주지 못하고 당황해서는 다시 옷이 진열되어있는 장소로 돌아갔다.

그래. 여기는 지금 옷가게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벌써 한 시간 넘게 이 가게에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점심시간은 이미 진즉에 지났다.

누님, 배고프시지 않은 걸까?

아니. 물론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야. 그럼. 당연히 아니지.

난 그냥 누님의 몸이 걱정되어서 말이야….

큭. 그래. 젠장. 아까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걸 조금 후회하고 있어.

여자들이 옷가게에만 오면 이렇다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고.

요즘엔 이런 데 올 때 다 같이 몰려오니까, 서로 얘기를 주고받느라 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만 해도 돼서 조금 편했다고.

우읏. 과거의 악몽이…사라야 그만둬. 디아나 너도 거들지마. 난 옷 갈아입히기 인형이 아니야! 너흰 뭘 입어도 예뻐!

"후우. 조금 과하게 샀는지도 모르겠네요. 구원씨처럼 편리한 짐꾼이 있으니까 그만 저도 모르게…미안해요."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겨우 쇼핑을 마친 누님은 내게 귀엽게 혀를 내밀면서 사과를 해왔다.

"아뇨. 전 누님의 다양한 차림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런 누님의 미소에 치유되면서, 나는 힘껏 그렇게 대답했다.

게다가 과정이 어찌됐든, 이미 다 끝난 일이고 말이야!

"어머, 그래요? 그럼 조금 더…에, 에이. 구원씨도 참. 장난이에요.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누님은 활짝 웃으면서 말하다가, 도중에 말을 바꾸면서 내 코끝을 검지로 가볍게 톡 쳤다.

그, 그렇죠! 당연히 농담이죠! 누님의 말투가 왠지 엄청나게 진심처럼 보였지만, 당연히 농담이죠!

"그럼 식당으로 갈까요?"

"넵! 아, 그 전에…."

"응? 설마 구원씨도 살 게 있었나요?"

"아, 네. 실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레이첼 누님을 데려간 곳은, 바로 언젠가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장신구 가게였다.

음. 옷가게에 들어올 때도 조금 그랬지만, 여기 들어오니까 뒤통수에 느껴지는 살기가 또 강해졌군.

너무 그러지 마라. 이번엔 레이첼 누님만을 위한 게 아니니까.

"여, 여기는…."

설마 내가 이런 가게로 올줄은 몰랐는지, 누님이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내 팔에 닿은 누님의 가슴에서 고동소리가 조금 더 크게 느껴졌다.

"목걸이를 좀 사고 싶은데요. 조언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제, 제게 말인가요?"

"네. 우리 애들한테 사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제가 이런 쪽에는 그다지 센스가 없어서…부탁드립니다."

"아, 아아! 그렇죠! 애인 분들께 말이죠! 알겠어요! 맡겨주세요!"

내 대답을 들은 누님은 실망스런 표정을 차마 다 숨기지 못하면서, 그래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목걸이들을 바라보면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사라씨와 디아나님, 레이아씨 것을 고르면 되는 건가요?"

"네. 아, 이왕이면 보석은 마법 세공이 가능한 것으로요."

사라 녀석. 가게에 따라 들어오진 않았으니, 아마 내가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겠지?

실은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깜짝 선물이다. 레이첼 누님과의 데이트 도중에 이런 걸 사는 건 조금 미안하지만, 지금 아니면 몰래 살 틈이 없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레이첼 누님께 줄 것도 필요하고.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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