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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23화 (50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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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때와는 다른

    "그럼 뭐하고 놀까?"

    "뭐?"

    저택을 나오자마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라가 지금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야. 먼저 기뻐해야 정상 아니냐? 그야 갑자기 이런 말하면 헛소리처럼 들리는 것도 인정은 하지만 말이다.

    "아니. 레이첼 누님하고 약속 잡은 시간은 점심시간이니까. 아직 한참 멀었잖아."

    그래. 레이첼 누님에게는 전과 비슷한 시간에 마중하러 간다고 했었다.

    즉, 점심시간대에 약속을 잡았다는 말이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나온 지금으로서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저번과는 다르게 길도 알고 있으니, 길 찾느라 시간 걸릴 일도 없고 말이다.

    "뭐? 그럼 왜 이렇게 일찍 나온 건데?"

    ‘그렇게 레이첼씨와의 데이트가 기대됐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매도하는 시선으로 사라가 날 노려봤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사라는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너랑 놀려고."

    "……뭐?"

    내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자, 사라는 순식간에 눈꼬리가 내려가면서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너랑 놀려고."

    "…흥.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고 있으니까 그쯤이야 당연한 거지. 이걸로 내 화가 다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다시 한 번 대답하자, 사라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팔을 더더욱 꽉 끌어안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만약 얘도 레이아처럼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엄청 맹렬히 좌우로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지금부터 같이 논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기에는 또 조금 애매한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의 화를 조금이라도 달래주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제대로 된 데이트도 나중에 다시 잡아야겠지.

    "사라는 뭐하고 싶은 거 없어?"

    "응? 그러네. 갑자기 그런 말을 해도…."

    "과연 나랑 있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다고."

    "맞아. 점심시간부턴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하러 가는 못된 놈이지만."

    "…죄송합니다."

    장난 좀 쳐봤던 건데, 카운터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사라가 순순히 인정하기에 웬일인가 싶었더니.

    "그러고 보니 어제 마차타고 지나가다 봤을 때 조금 시끄럽던 곳이 있던데. 보니까 뭔가 하고 있던 모양이더라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한 번 가볼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카운터 데미지에 해롱거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제 신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 광장을 생각해내고 말했다.

    아니. 바넷사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셋다 신경 건드리지 않도록 쥐 죽은 듯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덕분에 경치구경만 실컷 하다가 목격하게 됐다.

    천막까지 쳐놓고 뭔가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대체 뭘까?

    "좋아. 어차피 나하고 하는 데이트는 계획도 안 짜고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모양이니까."

    "…죄송합니다."

    사라 얘는 가끔 데미지가 너무 살벌하게 들어와서 문제야.

    요즘 얘랑 말싸움만 하면 거의 대부분 지게 된 디아나의 기분을 잘 알 것 같아.

    아니. 물론 내가 잘못한 거지만 말이야.

    "연극?"

    사라와 팔짱을 끼고 광장에 가보니, 거기에는 평소엔 못보던 커다란 천막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호객 행위가 한창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유랑 연극단이라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래? 한 번 봐 볼래?"

    "연극…난 그런 것보다 구원이랑 더 있고 싶은데. 앗! 잠깐!"

    내가 질문에 사라는 별 생각 없이 본심을 내뱉어버렸는지, 대답하고 나서 혼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귀여운 녀석.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연극 본다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 옆에서 보면 되지. 내가 살던 곳에선 오히려 데이트 코스의 정석 같은 느낌이었는데."

    "흐응? 그래? 그럼 한 번 시험 삼아서 봐볼까?"

    사라는 별로 흥미 없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이 어울려준다는 느낌으로 중얼거리고는 나와 같이 연극을 보게 됐다.

    연극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영화보다는 뮤지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게다가 데이트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비극.

    심지어 내용도 커플이 주변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갈라지게 되는, 그 거장 셰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너프된 버전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원래 세계에서 이런 건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일까? 솔직히 말해서 크게 감흥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뭔가 얘기가 빠진 구석이 많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빼낼 부분은 빼내다 못해, 너무 과감하게 살까지 툭툭 쳐낸 느낌이라고 할까?

    뭐, 대충 보니 영화보다 훨씬 편 당 시간이 짧은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말이야.

    다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옆에서는….

    "흐윽…흑…흐으윽…구워어언…."

    우리 사라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저거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무대를 가리키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내 이름을 부르는 와중에도 시선은 무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와아. 엄청나게 울고 있어.

    사라야. 너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선 쿨한 표정을 유지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야 다른 사람들도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쪽을 볼 여유 같은 건 없어 보이지만 말이야.

    "으, 응. 슬프네."

    "흐윽…후응…흐윽."

    내가 인벤토리에서 적당한 크기의 천 가지를 건네주자, 사라가 그걸로 코를 횅하고 풀더니 눈물을 닦으며 무대를 바라봤다.

    코를 풀거나 하면 다른 사람한테 민폐 아니냐고? 걱정 마. 이 세계의 관객 매너는 왠지 원래 세계랑 상당히 다른 모양이니까.

    사람들은 마음 놓고 소리 내어 울고 있었고, 심지어 무대를 향해 응원의 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꽤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도는 영화관에서 사람들이 다 같이 춤을 추면서 본다는데. 그게 이런 느낌인 걸까?

    뭐, 이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곳은 이곳대로, 무대와 관객들의 반응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어서 연극의 감성을 극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무튼 내가 알던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다르게, 이곳의 연극은 결국 커플들이 온갖 곤경을 이겨내고 마지막엔 이어지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저런 건 새드엔딩으로 끝나야 비장미가 더해지는 거라고 개인적으론 생각하는데 말이야.

    나는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하면서도, 물론 옆에 있는 사라에겐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흐윽…이 냉혈한…진짜 믿을 수 없어…어떻게 저걸 보고 안 울어…?"

    연극이 끝난 후에도, 사라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건지 눈물을 흘리면서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비슷한 걸 이미 몇 번이나 봐서…그보다 너야 말로 의외네. 혹시 이런 거 보는 거 처음이야?"

    "흑, 어,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살던 곳엔 이런 거 안 왔단 말이야."

    오랜만에 시골 처녀다운 발언을 하는 사라였다.

    아무튼 그런 사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사라를 데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갔다.

    그리고 연극이 얼마나 슬펐는지 구구절절 늘어놓는 사라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감성적이 된 사라도 귀엽고 예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후우…왠지 데이트의 정석이라는 말, 조금 알 것 같아."

    그리고 겨우 진정되어서 달콤한 케이크를 한 입 먹은 사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같이 연극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극의 감상 같은 걸 서로 얘기하는 시간이 좋은 거라고."

    "얘기라고 해봤자 내가 일방적으로 했을 뿐이잖아. 이 냉혈한."

    "아니. 그러니까 난 익숙해져서 그런 것뿐이라니까. 애초에 내가 냉혈한이면 세상사람 대부분은 냉혈한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흥. 그거야 모르는 거지. 평소 모습은 연기일수도."

    사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수상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야. 오늘 태어나서 처음 연극을 봤다고 해서, 너무 상상력이 폭발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따지면 넌 그 냉혈남이 연기하는 모습에 반한 애가 되는 건데?"

    "그야 난 순진하니까."

    "…그러세요."

    이 뻔뻔한 녀석.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저런 말을.

    아니. 보기와 다르게 순진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사라와 노닥거리면서 카페에 앉아있자,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시간이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때까지 열심히 떠들던 사라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리고는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지금까지 꽤나 기분 풀어주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이렇게 막상 코앞에 닥치게 되니 또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아니. 물론 헛수고였단 생각은 안 하지만 말이야.

    이렇게 사라랑 있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으니까.

    "흥! 그럼 얼른 가버리면?"

    "그래. 이따가 보자. 100미터에서 안 떨어지게 잘 쫓아와야한다?"

    "말 안 해도 알고 있거든?! 진짜 믿을 수 없어."

    "그럼 갈게."

    "확 차여버려라!"

    내가 자리를 일어나자, 사라가 메롱하고 혀를 내밀면서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헤헹. 이미 누님이 날 좋아한다는 말은 들은 상…우왓! 너 지금 진짜로 공격하려고 했지?!"

    그 저주의 말을 부정하려고 하자, 사라가 갑자기 날 공격해왔다.

    진짜 아슬아슬했다. 방심하지 않고 사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어서 간신히 피할 수 있었어.

    "쳇. 얼른 가버려!"

    "넵."

    쳇이라니. 너 지금 공격 실패해서 혀 찬 거냐?!

    물론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수 있을 리도 없었고, 나는 황급히 레이첼 누님이 사는 기숙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길드의 여성 직원들이 살고 있는 그 기숙사는 여전히 철통같은 경비로 지켜지고 있었다.

    다만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조금 더 유명해졌다는 점일까?

    "꺄악! 서, 성자니임?"

    여전히 거기엔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지키고 있었지만, 저번과는 상당히 반응이 달랐다.

    애초에 이젠 나랑 레이첼 누님이 아는 사이란 걸 알 테니 그냥 보내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반응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냐?

    전에는 귀찮아 죽겠다는 태도로 얼른 꺼지라고 말했으면서 말이야.

    역시 그건가. 이것도 영상의 파급효과인가.

    아니면 전에 했던 미남계가 아직도 먹혀들고 있는 건…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아, 네. 레이첼 누님을 뵈러 왔는데요."

    "그, 그런 거라면 제가 방까지 안내…."

    아뇨. 댁은 여기 지키고 있어야 하는 입장 아닌가요?

    금남의 구역에서 남자를 방까지 안내까지 해주는 건 좀…그냥 레이첼 누님한테 연락이나 해주시죠?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때,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레이첼 누님이었다.

    어쩜 이리도 타이밍이 좋게 등장하실까.

    혹시 내가 올 때까지 어딘가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든가?

    하핫. 설마 레이첼 누님이 그렇게까지 할 리가.

    그렇다면 역시 우리는 운명의 실로 연결된 사이라는 건가?

    운명이 우리의 데이트를 도와주고 있어?

    "안녕하세요. 구원씨. 어머, 오늘은 근사하게 차려입으셨네요?"

    내가 누님의 이름을 부르자, 누님이 살짝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핫. 네. 조금…누님도 멋지세요."

    얼핏 보기엔 그다지 노출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평소와 달리 길게 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은근히 목 부분이나 등 부분이 살짝 파여 있는 것이 보이는 원피스 차림.

    평소에는 그야말로 지적으로 생겼다는 느낌을 주는 누님이 이런 차림을 하시니까 뭔가 그 섹시함이 배가 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후훗. 고마워요."

    내 칭찬에 누님은 생긋 웃어보이고는 자연스럽게 내 팔에 팔짱을 껴서는 달라붙었다.

    뭔가 반응이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 너무 여유가 넘치신다.

    아니. 물론 레이첼 누님은 평소에도 이런 성격이기는 했다.

    내 장난을 여유롭게 넘기기도 하시고, 날 조금 동생 대하듯이 대하기도 하시고 말이다.

    다만 전에 내가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엄청나게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오늘도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어져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누님. 내가 누님을 너무 얕봤다는 얘기인가.

    "그럼 가실까요?"

    "넷, 후훗. 그러죠."

    …지금 제가 허리에 팔 둘렀을 때 움찔거린 거 아니겠죠, 누님?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 이전에 제가 후기에 남겼던 말은 레이아의 인격이 얼마나 변하냐에 초점을 두고 답변을 드린 것이 아니라, 레이아 안에 구미호라는 다른 인격이나 영혼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남긴 거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요.

    술에 취하면 그냥 조금 이성만 잃은 것 같은 사람이 있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성격이 변하는 사람도 있죠. 레이아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레이아가 저렇게 되는 이유는 나중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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