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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때와는 다른
드디어 레이아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회복되고 난 후, 우리는 사이좋게 식당으로 향했다.
사라와 레이아는 수영 연습을 완전히 파하고 난 후에 내 상태를 보기 위해 온 거라고 했다.
즉, 바넷사는 이미 식사 준비를 하러 간 상황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가는 사이에 대충 끝날 거라는 계산이었다.
굳이 바넷사가 부르러 오게 만들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먼저 움직인 우리였지만, 식당으로 가는 도중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는 바넷사와 딱 마주치게 됐다.
"……흠."
"…뭡니까?"
내가 빤히 바넷사의 얼굴을 바라보자, 살짝 거슬린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아직도 화장하고 있구나 싶어서."
그랬다. 어째선지 바넷사는 아직도 풀 메이크 상태였던 거다.
욕실에 있었던 거잖아? 지워져야 정상 아니야?
그것도 잠깐 들어가 있다 나온 게 아니라, 아침부터 밥 먹는 시간만 제외하면 계속 있었을 텐데?
심지어 오늘은 아마 잠수 상태로 헤엄치는 연습을 했을 텐데?
"어느새…바넷사, 엄청 부지런하네요."
"그러고 보니 점심에도 하고 계셨죠?"
사라와 레이아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수영 연습 당시에는 확실히 화장을 지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점심시간에는 또 확실히 화장을 하고 있었고.
뭔가 냄새가 나는데?
아침에 화장한 모습을 봤을 때부터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수상해도 너무 수상해.
"바넷사, 자네 혹시 어디서 누군가에게 한 소리 듣기라도 한 겐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던 건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면서 바넷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보통 이렇게 화장한 모습을 보면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바넷사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거다.
아침에 내가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부정하기도 했고, 애초에 바넷사는 오늘 하루 종일 저택에만 있었던 거다.
그리고 저택에 있는 남자는 나 하나뿐.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전에 내가 대놓고 물어봤는데 제정신이냐고 말했던 애니까.
아니. 그 이전에 내가 기절해있었던 점심시간조차도 화장을 하고 있었다는 모양이니까.
그렇다면 바넷사가 저렇게 화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라고 생각한 끝에 디아나는 그렇게 결론 낸 모양이었다.
확실히. 시중을 드는 사람의 겉모습은 때로는 그 주인의 평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바넷사도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하지만 성에서 본 메이드들이나 아라크네의 클랜 하우스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옷차림뿐만 아니라 화장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너무 눈에 띄게 화려한 화장을 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옅은 색 위주로 은은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화장기 전혀 없이 다녔던 바넷사가 조금 이질적인 것이긴 했겠지.
물론 그래봤자 맨얼굴의 바넷사가 더 예쁘긴 했지만, 그거랑은 조금 다른 문제니까 말이다.
역시 우리 디아나야. 날카로운 추리력이다.
"아뇨. 그런 일은. 가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필요할 때 할 수 없게 되어서 곤란해질 것 같았기에 해보는 것뿐입니다. 마침 좋은 화장품을 선물 받았기에."
내가 디아나의 추리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바넷사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디아나의 질문을 부정했다.
"뭐? 선물? 거짓말! 어제 하루 종일 나랑 있었고, 오늘은 저택에서 수영만 했으면서 대체 누구한테?!"
디아나의 추리에 속으로 탄복하고 있었던 나는, 바넷사가 너무 그렇게 깔끔히 부정해버리자 조금 부끄러워져서 그렇게 외쳤다.
"……메이드한테 받았습니다만."
그러자 바넷사가 조금 떫은 표정을 짓고는 대답했다.
뭐? 메이드?
"바넷사는 상당히 인기가 있다네."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 챘는지, 디아나가 납득했단 얼굴로 조그맣게 속삭여줬다.
아니. 생긴 거 보면 인기 있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메이드라니. 같은 여자잖아? 같은 여자한테 인기 있다는 거야?
나는 그제야 바넷사가 떫은 표정을 지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내 황당한 표정을 깔끔히 무시하고, 바넷사는 발걸음을 돌려서 식당으로 향했다.
"뭐, 여자밖에 없는 직장 아닌가."
그런 바넷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디아나가
아니. 저기 말이지. 일단 난 남잔데요?
남자인 나도 메이드들한테 선물 같은 건 한 번도 못 받아 봤는데, 같은 여자인 바넷사는 저렇게 선물까지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설마 나…바넷사한테 남자로서 지고 있어?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나도 길가에 나가면 돌아보는 여자들이 줄을 잇는다고.
이건 그거야. 내가 너무 잘 생겨서 다가오기 힘들다든가, 주인님의 남자라서 다가오기 힘들다든가. 분명 그런 이유 때문에 메이드들이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인 거야.
암. 그럼. 그렇고말고. 아니면 내가 여자인 바넷사한테 밀릴 요소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전에 바넷사랑 욕조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분명 메이드 둘이서 가위 치기를 한 적도 있었지?
그냥 여기 메이드들이 그런 취향일지도 몰라.
그래. 너무 여자만 있는 곳에 오래 있다 보니, 다들 취향이 그런 쪽으로 변해버린 거야. 분명 그런 거야.
"얘들아…나 인기 많지…?"
아무리 그렇게 정신승리를 시전 해봐도 여자한테 남자로서 졌다는 사실을 용납하기 힘들어서, 나는 우리 애들한테 확인까지 해봤다.
"네? 후훗. 그럼요."
"…내일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 약속까지 잡아놓은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해?"
레이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으면서 대답해줬고, 사라는 살짝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사라의 반응조차도 지금은 큰 위안이 됐다.
그래. 맞아. 얘네도 그렇고 레이첼 누님도 그렇고, 하나같이 남자 보는 눈은 엄청 높을 것 같은 사람들이 날 좋아해주는 거잖아. 내가 바넷사보다 인기 없을 리가 없어!
"흠. 그야 인기야 많다고 생각하네만, 바넷사보다 많은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디아나아…."
하지만 디아나의 장난스런 한 마디에, 내 정신승리는 다시 깨지고 말았다.
이 녀석. 다 알고 일부러 이런 말 한 거야!
어젯밤에 져주는 게 아니었는데! 나중에 두고 보자!
"실비아! 마틸다!"
"히야아앗!"
"뭐, 뭔가요, 갑자기?!"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실비아에게 돌진해서 그 몸을 붙잡고는 마틸다에게 다가갔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을 당한 실비아는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내게 잡혀버렸고, 그대로 내 품안에 안긴 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 이 진동. 내가 인기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진동이야.
"마틸다."
"네, 네에…."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마틸다의 이름을 속삭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마틸다의 표정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인기 없을 리가…!
"작작 하지?!"
"끄아악!"
결국 보다 못 한 사라가 내 옆구리를 꼬집는 걸로, 내 소란은 강제로 진정됐다.
"아직도 아픈 것 같아. 레이아. 좀 더 문질러줘."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레이아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사라한테 꼬집힌 부위를 어루만지면서 레이아에게 어리광을 피우자, 레이아가 꼬리로 내 옆구리를 찰싹하고 가볍게 한 대 때리더니 곱게 눈을 흘겼다.
"치료는 다 했잖아요. 그리고 아까 그건 구원씨가 잘못했어요. 사라씨는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황이니까요. 너무 자극하시면 안 돼요."
역시 레이아한테 치료를 받은 다음에 계속 문질러달라고 하는 건 무리수가 있었나.
아니. 그래도 평소 레이아라면 해줬을 텐데.
레이아는 사라가 상당히 불쌍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뭐, 하기야. 내 데이트를 멀리서 따라와야 하는 입장이니까. 나 같아도 짜증날 것 같기는 하다.
하물며 그런 놈이 자기 인기를 확인한다면서 여자들한테 막무가내로 집적댔으니…응. 스스로 매를 벌었다.
오죽하면 아까 내 등을 보고 엄청 미안한 표정을 지었던 사라가 다시 내 몸에 손을 댔을까.
그게 아니었으면 분명 그냥 꼬집히는 걸로 끝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구원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조금 반성하고 있자, 레이아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내게 질문을 했다.
"응? 뭐가?"
"뭐가라니. 사라씨 말이에요. 차라리 오늘 제가 순서를 바꿔드릴까요?"
레이아는 사라가 정말로 안쓰러운 건지, 자신이 먼저 나서서 그런 제안까지 해왔다.
하여간 우리 천사님은 마음씨가 너무 곱다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아니. 괜찮아. 오늘은 레이아랑 있을래."
"…정말로 정말로요?"
"응. 그리고 오늘 같이 지내고 내일 기분이 나빠지는 것보다, 내일 낮에 기분이 나빠지고 밤에 풀어주는 게 사라한테도 더 좋을 것 같고."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레이아에게, 나는 내 생각을 전해줬다.
사라의 특수 성벽까지 더 해져서 의외로 쉽게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쏙 빼놓고 말이다.
뭐, 애초에 레이첼 누님과 관계까지 가질 생각은 아니니까, 사라의 그 특수 성벽이 발동될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건…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내 대답에 겨우 납득해준 건지, 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라만 달래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꺄악!"
나는 레이아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아 들고는 그대로 같이 침대로 넘어졌다.
"레이아도 실은 아직 조금 화났지?"
"저는…구원씨가 계속 지금처럼만 해주시면…저한테 소홀해지지만 않으시면…."
내가 지근거리에서 레이아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하자, 레이아가 고개를 살랑살랑 사로저으며 대답했다.
레이아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으니, 지금 레이아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마 사실일 거다.
하지만 사람이란 가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때도 있는 거니까 말이야.
아마 레이아의 가슴 한편에는 희미한 불안감이나 초조감 같은 것이 남아있을 거다.
그 대화 이후로 묘하게 사라 편을 드는 거나, 내가 응석부렸을 때의 반응이 평소와는 미묘하게 조금 달라진 걸 보면 말이다.
"고작 하룻밤으로 얼버무릴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레이아한테 절대 소홀하지 않을 거란 걸 밤새 느끼게 해줄게."
"구원씨도 참…엉큼하세요…으응."
레이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키스를 그대로 받아줬다.
이젠 키스 정도로 구미호 상태가 되지는 않게 됐지만, 여전히 키스를 하면 미약하게나마 몸이 달아오르기는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기습적으로 레이첼 누님을 받아들인다고 한 것 때문에, 레이아의 위기감이 증폭돼서 자신도 조금 적극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키스를 나누는 레이아의 숨결이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칠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구미호 하면…전 분명 레이아가 제정신인 채로 꼬리와 안광을 유지하고 있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힌트라면 있다.
그때는 내가 오랜만에 스킬을 썼다는 점이다.
만약 오늘도 스킬을 쓴다면, 레이아는 또 완전히 제정신인 채로 꼬리와 안광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레이아. 스킬 써도 될까?"
"…네? 구원씨, 그렇게 까지 하지 않으셔도 저는 이렇게 구원씨에게 안기는 걸로 충분히…."
내가 그렇게 확인을 하자, 레이아는 곤란한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 스킬까지 써서 레이아를 기쁘게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실은 말이지…."
나는 레이아에게 내 가설을 설명했다.
어쩌면 전에 레이아는 분명 내 스킬에 당하는 도중 완전히 정기가 채워졌다고 했는데, 꼬리와 안광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어쩌면 스킬을 통해 그 상태가 또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게 정말인가요?"
내 말을 듣고 나자, 레이아는 정말 깜짝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달라붙어왔다.
"응."
"네! 해주세요!"
내가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아는 힘차게 그렇게 말했다.
요즘 구미호의 특징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는 아예 없어졌지만, 그래도 역시 레이아는 구미호 상태를 완전히 컨트롤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곤란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기 상태를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건 불안….
"구미호 상태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면, 분명 저도 구원씨에게 좀 더 도움이…그리고 언젠간 아이도…."
아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냥 천사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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