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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18화 (50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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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때와는 다른

    인간의 감정이란 덧없는 것이다.

    아무리 기쁘더라도,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그 감정이 최고점을 찍은 채로 계속 유지되는 일은 거의 없다.

    감정은 진정되고, 어느새 풍화된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물이다.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소리냐고?

    무슨 소리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 애들의 분노도 겨우 진정되기 시작했다는 얘기지.

    길었다. 등짝에 더 이상 감각이 없어.

    그렇게 간곡히 타임을 요청했는데도 무자비하게 때려대다니.

    뭐, 맞을 짓을 한 거니까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겨우 등짝 스매시가 멈추고 나서 일시적으로 상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금까지의 경과를 순차적으로 설명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영원히 기회는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먼저 저번에 레이첼 누님과 식사를 했을 때부터.

    그때는 정말로 퇴근하는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디아나를 찾는 걸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식사를 가진 것뿐이었다.

    다만 둘이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셋이 갑자기 들어오니까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숨어버렸다.

    레이첼 누님이 그때 한 변명들은, 누님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면서 되는 대로 말한 거다. 적어도 그때의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너희를 배신할 순 없었기에 난 누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누님과는 이전과 달리 서먹한 태도로 서로를 대하며 지내게 됐다.

    하지만 조난에서 구조 된 후, 나는 계속 누님의 마음을 무시한 채로 있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잠들어 있는 날 발견한 누님이 울면서 필사적으로 섹스를 하는 모습을 보고 말이다.

    이렇게나 날 좋아하시는 분을 모르는 척 하는 건, 내겐 불가능하다.

    내가 그렇게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하자,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사라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뭐야? 구원은 자길 그렇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도 계속 받아주겠다.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냐!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나는 황급히 사라의 말을 부정했지만, 이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게 됐다.

    확실히. 지금까지 한 설명만 듣고 보면 얘기가 그렇게 되어버린다.

    내가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레이첼 누님이 날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사라한테 저런 질문을 듣고 나서야 그걸 깨닫다니. 이런 바보 같은 놈이.

    결코 의도한 건 아니었다. 결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무의식적으로 나는 내가 더 이상 책망당하는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드니, 조금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고작 이정도 근성으로 다른 여자를 더 들이겠다고 한 거였나.

    우리 애들에게 이렇게 기분 나쁜 경험을 하게 하면서까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 잘못을 되돌릴 찬스는 남아있다.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전달하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나도 처음부터 레이첼 누님에게는 마음이 있는지도 몰라. 내 곁에는 항상 너희들이 있으니까 나 자신의 마음에 쉽게 눈치 채지 못했을 뿐. 때문에 너희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누님께 서먹하게 대하면서도 계속 마음이 아팠던 것도 분명 그 때문일 거야. 하지만 조난에서 날 구조해줄 당시의 누님을 보고, 나는 스스로 레이첼 누님을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어. 그리고 그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됐다는 것도. 누님이 날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싶어. 그래서 너희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미안해."

    자기 애인이라는 놈이 다른 여자를 이렇게나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상당히 가혹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레이첼 누님에게도 그리고 다른 여자를 첩으로 들여도 된다고 허락해준 우리 애들에게도 실례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우리 애들의 책망하는 것 같은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읏…!"

    사라는 주먹을 꽉 쥐었고, 디아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레이아는 스스로의 입술을 깨물었다.

    저마다 각자 다른 표정의, 하지만 같은 감정을 표현하면서 셋은 조용히 날 내려다봤다.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네. 좋네. 그렇게 하게."

    그리고 그 기나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다름 아닌 디아나였다.

    어젯밤을 나와 보내고, 아침까지 나와 노닥거리다가 식사가 끝나자마자 이런 얘기를 들은 거다.

    실은 셋 중에서 제일 화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나는 제일 먼저 레이첼 누님을 받아들이는 걸 허락해줬다.

    결국 제일 중요할 때, 연장자로서 가장 어른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건 언제나 디아나란 말이지.

    정말로 디아나한테는 몇 번을 감사해도 부족하다.

    "디아나?!"

    설마 디아나가 이렇게 쉽게 허락해줄 줄 몰랐는지 사라가 납득할 수 없단 표정으로 디아나의 이름을 외쳤지만, 디아나는 두 눈을 살며시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라양도 그만하게. 이미 이 몸들이 허락한 일 아닌가."

    "하지만…!"

    "게다가 이 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세. 이 몸들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일세. 사라양도 이 자가 이 몸들보다 레이첼양을 더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는 건,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을 확실히 내렸다는 걸세. 그렇다면 이 몸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은 없네."

    "……읏."

    디아나의 설득에 넘어간 듯, 사라도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눈가에 살짝 눈물을 고이고 날 노려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구원씨. 혹시, 혹시 저희보다…."

    그리고 조용히 날 노려보던 레이아는 무릎을 짚고 상체를 숙여서 내 얼굴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조용하게 그런 말을 건네 왔다.

    가슴이 엄청나게 강조되는 포즈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천사님이 날 노려보고 계신 거다.

    지금 내게는 천사님의 표정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희보다…흑."

    말하길 주저하는 레이아를 보고, 나는 레이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겨우 눈치 챘다.

    디아나가 당연하게 가정한 그 말. 만약 그 하나의 가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디아나의 말은 설득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레이아는 지금 그걸 확인해보려고 하고 있는 거다.

    그런 가정, 입에 담기조차 힘들어서 울려고 하는 주제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나도 전에 허락을 받았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만약 너희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싫다고 하면 이 마음은 확실히 접을 게! 물론 레이첼 누님을 좋아하는 건 맞아. 하지만 내겐 어디까지나 너희에 대한 마음이 최우선이야. 그 사실만큼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레이첼 누님께 제대로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허락을 받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행여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줘. 날 믿어줘!"

    나는 레이아의 두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는,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담아서 말했다.

    내 진지한 눈동자와, 눈물을 머금은 레이아의 눈동자가 잠시 동안 서로 시선을 교차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레이아는 겨우 쿡하고 가련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믿어요."

    눈가에 눈물을 고인 채로 저런 미소라니. 결국 천사님은 천사님이라는 얘기였다.

    "고마워. 정말 사랑해."

    "네. 저도 사랑해요."

    레이아에게서 그렇게 허락을 받아내고는, 나는 아직 허락의 말을 해주지 않은 사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라는 미워죽겠다는 듯이 날 찌릿하고 한 번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한 번 푹 쉬고는 말했다.

    "…만약 레이첼씨랑 노닥거린다고 나한테 소홀해지기만 해봐. 진짜 가만 안 놔둘 거야."

    "걱정 마. 귀찮다고 생각 될 정도로 달라붙어 다녀 줄 테니까."

    "하여간 말은. 그만 일어나. 언제까지 그렇고 있을 거야? 이러면 마치 우리가 자기 남자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악녀 같잖아. 하여간 괜히 쿵 소리 나게 무릎이나 꿇고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라는 다시 한 번 미워죽겠다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내 팔을 잡아서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그 팔에 이끌려 겨우 무릎을 꿇고 있던 다리를 펴자, 사라는 몸을 숙이고 손을 아래로 뻗어서 툭툭하고 털어줬다.

    …내 무릎이 아니라 내가 무릎 꿇고 있던 바닥을.

    "바닥 안 망가졌나? 응. 괜찮은 것 같네."

    "…야. 그럴 땐 내 무릎을 먼저 걱정해야 되는 거 아니냐?"

    "뭐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진짜 쓸데없이 튼튼한 주제에."

    나는 황당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한 마디 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라는 그런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혀를 살짝 내밀어서 메롱하는 표정을 짓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 응.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기는 한데 말이야.

    "쓸데없다니! 이렇게 튼튼하니까 4계층에서 조난당했을 때도 무사히 생환해온 거거든?!"

    "아, 응. 그래. 그래. 쓸데 있게 튼튼해서는."

    "너 말이야…."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 고맙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사라 나름대로 농담을 하면서 무거웠던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사라양. 걱정 할 것 없네. 저택을 만들 때 이 몸이 엄선한 최고급 자제를 사용하여 최고의 건축가에게 부탁했으니 말일세. 이 자가 아무리 무식하게 튼튼하더라도, 그리 쉽게 망가지지는 않을 걸세."

    "저런 농담, 너까지 안 받아줘도 되거든?!"

    무식하게 튼튼하다니 뭐야?! 맞는 말이지만!

    애초에 디아나 너랑 비교하면 안 무식한 사람이 있기는 하냐?!

    "어머, 농담이라니. 난 농담 아닌데?"

    "그럼 더 심해! 아무리 나라도 운다?!"

    게다가 사라는 옆에서 추가타 까지 넣어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해봤지만, 사라는 콧방귀를 뀌면서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흥. 울던지."

    "이, 이 녀석…자기가 울었다고 남까지 울리려고 하다니."

    "아, 안 울었거든?!"

    "안 울었기는!"

    나는 두 손을 사라의 얼굴에 뻗어서 그 옆을 단단히 감싸고는, 엄지를 뻗어서 각각의 여전히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을 훔쳐냈다.

    "자! 봐라! 이건…우왓!"

    그리고 눈물이 묻은 두 손의 엄지를 사라에게 들이밀면서 말하자, 갑자기 사라가 내 엄지 두 개를 한꺼번에 입으로 넣고는 빨기 시작했다.

    야. 그냥 빨기만 하면 되지 왜 혀까지 쓰는 거냐?!

    아니. 무척 기분 좋지만요!

    "쪽. 뭘 보라는 거야?"

    사라는 마지막으로 쪽 소리를 내면서 내 엄지를 빨아들이며 빼내고는, 다시 쿨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뇨. 감사합니다."

    "뭐, 뭐가 말야?! 진짜 바보 아니야!?"

    아니. 너도 짐작 가는 게 있으니까 고작 감사하단 말에 얼굴 붉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 애초에 혀까지 안 썼으면 됐을 텐데.

    "후훗. 두 분도 참…. 하지만 구원씨 레이첼씨에게 제대로 고백을 안 하셨다고요?"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옆에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던 레이아가, 내 얼굴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 날 올려다보면서 그런 질문을 해왔다.

    "아, 응."

    정확히 말하자면, 고백을 하기는 했었다.

    레이첼 누님이 내가 오랜 조난 끝에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대답을 보류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고백이라고 할 수 없다뿐이지.

    "그렇다면 레이첼씨는 저희한테 허락받았다는 걸 모르시는 게…."

    아무래도 레이아는 혼자서 여전히 마음고생하고 있을 레이첼이 살짝 걱정된 모양이었다.

    어쩜 이리 천사 같으실까. 이쯤 되면 레이아가 천사의 환생이란 설을 진지하게 검토해 봐도 될 수준 아니야? 다음에 여신님이 강림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그것부터 물어보자.

    "아아. 그거 말인데."

    아무튼 그런 레이아의 질문 덕분에, 나는 현재 자신이 위기를 완전히 넘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한 고비 넘긴 덕분에 잊고 잠깐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제일 큰 고비가 하나 더 남아 있었어.

    레이첼 누님을 받아들이는 건 그나마 전에 첩을 허용한다는 걸로 허락을 받은 적이 있으니까 결국 허락해줄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솔직히 제대로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인 만큼 어떤 의미로는 아까보다도 더 큰 고비였다.

    "…저기 사라님?"

    나는 최대한 비굴한 미소를 띠며 사라를 쳐다봤다.

    "뭐, 뭐야? 갑자기."

    갑자기 변한 내 태도에 당황하는 사라. 그런 사라에게 나는 두 손을 모아서 싹싹 비비며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내일 레이첼 누님과 데이트 약속을 잡았는데 말이죠."

    "읏! 흥! 그걸 왜 나한테…아."

    처음엔 그냥 질투로 화내는 것 같은 사라였지만, 말하는 도중에 뭔가 깨달을 표정을 지었다.

    사라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 챈 모양이다.

    "헤헷. 실은 사라님께 긴히 부탁할 것이…쿠허헉!"

    "죽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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