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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517화 (50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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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때와는 다른

    "후후흥! 자네 일어났는가!"

    다음 날 아침. 디아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어젯밤은 그 이후로 내가 괴롭히는 일도 없었고, 결국 끝까지 디아나가 주도권을 잡은 채로 행위를 리드했으니까 말이다.

    나한테 이긴 기분이 된 건지도 모른다.

    너무 저렇게 좋아하니까 또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네.

    지금 저렇게 완전히 기분 좋아진 디아나를, 스킬까지 이용해서 철저하게 무너뜨려버리면 아마도 엄청 재미있겠지.

    디아나는 아직 강해진 내 스킬을 한 번도 맛보지 않았으니까 더욱더.

    뭐, 그래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줄까.

    기고만장해진 디아나도 제법 귀여웠다.

    "응. 잘 잤어? 기분 좋아 보이네."

    "후흥! 그래 보이는가?!"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말라고. 괴롭혀주고 싶어지잖아.

    "응. 역시 다음에 영상 찍을 생각을 해서 그런 건가?"

    "그렇…!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아아! 영상은 또 뭔가! 영상은!"

    기분 좋아보였던 디아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콩콩 내리쳤다. 효과음이 뭔가 귀여운 건 디아나니까 신경 쓰지 말자.

    "어제 찍겠다고 했잖아."

    "웃…! 그건 말일세! 그건…!"

    "어제 같은 모습도 기록에 남기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럴 지도 모르…크흠. 자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어쩔 수 없구먼."

    얼굴을 붉히며 반박하려고 했던 디아나였지만, 내 조용한 중얼거림에 순식간에 쿨다운 하더니 나 때문에 마지못해 승낙해 준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잠자리에서 나한테 이긴 모습을 찍을 생각만만이잖아.

    설마 또 나한테서 그런 식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애초에 어제도 딱히 이긴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럼 디아나. 마법구를 조금 더 개량해줬으면 좋겠는데."

    "으음? 개량?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있는 겐가?"

    "한 두 개가 아니지. 줌 기능도 없어서 특정 부위를 강조할 수도 없고, 들고 있을 수도 없어서 고정된 각도로밖에 찍을 수 없고, 또…."

    "자, 잠깐! 어딜 강조하겠다는 겐가?! 대체 어떤 각도로 찍겠다는 겐가?!"

    내가 어제 영상을 보면서 받았던 느꼈던 점을 피드백으로 빠르게 전달하자, 디아나가 당황해서는 손사래를 쳤다.

    "날 위해서, 해줄 거지?"

    "우긋…그, 그러니까 그런 말투는 치사하지 않은가아…."

    "사랑해."

    "우우우…여하튼 아침부터 이 변태 낭군님은…."

    아무튼 그렇게 디아나와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는 바넷사가 찾아온 후에 방을 나섰다.

    자, 그럼. 디아나와 무사히 일도 치렀으니, 이제는 할 일을 해야 할 때다.

    레이첼 누님과의 데이트가 당장 내일로 다가온 만큼, 오늘은 상당히 바쁜 하루가 될 거다.

    그렇게 마음가짐을 바로잡으며 방문을 열었던 나였지만, 문을 열고 눈앞에 서있는 인물을 본 순간 다잡았던 표정이 빠르게 허물어져 내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뭡니까."

    원래는 내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너무 빤히 쳐다보니 어쩔 수 없이 물어봐준다는 느낌으로 바넷사가 짧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 너…화장했냐?"

    그랬다. 우리 철혈집사가, 어찌된 일인지 화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풀 메이크.

    집사인 자신으로 인해 디아나의 평판이 저하될 수 있다는 생각인 건지 항상 몸가짐에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은 바넷사였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화장을 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게다가 이 녀석, 아침부터 뭔가 할 말 있단 표정으로 날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데.

    "오오! 그렇구먼! 바넷사. 자네가 대체 무슨 일인가?"

    디아나조차도 바넷사가 화장한 모습은 좀처럼 보지 못했는지, 뭔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바넷사를 쳐다봤다.

    "…뭐 문제 있…아뇨. 딱히 별 일은 없습니다. 그냥 기분 전환으로 가볍게 해봤습니다."

    내 물음에는 차가운 눈빛으로 반응하던 바넷사였지만, 디아나가 질문하자 바로 말을 바꿔서는 평범히 대답했다.

    이 녀석, 여전히 날 대할 때만 뭔가 태도가 살짝 불성실하단 말이야.

    "기분전환으로 화장이라니. 바넷사도 그런 걸 하는구나. 혹시 어제 밖에 나갔을 때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만났다든가?"

    하지만 난 그런 태도에 굴하지 않고,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바넷사에게 다시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바넷사가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까지 노려보고 그러냐.

    "모시겠습니다."

    내가 살짝 디아나를 앞세우자, 바넷사는 찌릿하고 눈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성큼성큼 식당을 향해 걸어나갔다.

    하지만 역시 수상하단 말이야.

    쟤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화장 같은 걸 할 성격이 아닌데.

    게다가 앞서나가는 걸음 걸이 역시, 뭔가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나한테 화나서 그런 건가?

    아니. 내가 그렇게까지 화날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흠."

    디아나 역시도 바넷사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손으로 턱을 짚고는 바넷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면서 뭔가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그렇게 아침의 시작부터 뭔가 평소와 다르지 않다보니, 나는 괜히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면 더욱더 말이야.

    해야 할 일은 많지만, 나는 우선 행동의 우선순위부터 정하고 차례대로 해결하기로 했다.

    우선은 우리 애들한테 레이첼 누님을 맞이하는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사라한테 데이트의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틸다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다.

    이 우선 순위는 딱히 레이첼 누님이 마틸다보다 더 중요해서 이렇게 정한 게 아니다.

    나한텐 레이첼 누님을 맞이하는 거나, 마틸다의 교황청 귀환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거나 똑같이 중요한 일이었다.

    다만 레이첼 누님과의 데이트는 바로 내일이니까 말이야.

    마틸다와 대화할 기회는 저주가 풀리지 않은 이상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만큼, 지금은 우선 레이첼 누님에 관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자, 그럼 수영 말인데."

    "자네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 소리인가."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난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렇게 운을 뗐고, 곧바로 디아나가 볼멘소리를 냈다.

    어쩌면 어제 내가 욕실에 가려고 하면서 가슴 얘기를 했던 걸 아직까지 조금 신경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걱정 마라. 오늘은 수영 연습에 나도 끼겠다는 얘기가 아니니까.

    "바넷사. 미안한데 오늘은 혼자서 실비아랑 마틸다 좀 봐줄 수 없을까?"

    나는 디아나의 뒤에 서있는 우리의 풀 메이크업 집사님께 그렇게 부탁했다.

    "…네?"

    바넷사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의외였는지, 무슨 꿍꿍이냐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얜 왜 이렇게 일일이 내가 하는 일에 의심을 가질까. 꿍꿍이 같은 거 없거든?

    그리고 거기. 구석에 있는 실비아.

    나한테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벌벌 떠는 주제에 쓸쓸한 표정 짓지 마라.

    그런 표정 지으려면 적어도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안긴 다음에 해라.

    뭐, 그러려면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우린 조금 할 얘기가 있어서."

    "우리라니…저희 셋과 말인가요?"

    아까 내가 실비아와 마틸다만 부탁한 데에서 그렇게 유추해낸 듯, 레이아가 머리 위에 솟은 세모난 귀를 파닥이면서 질문했다.

    우리 천사님은 똑똑하기까지 하다니까.

    "응. 조금 할 말이 있어."

    "읏…그, 그런가요…."

    내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와 디아나, 레이아의 표정이 동시에 조금 어두워졌다.

    설마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는 건가?

    하긴, 전에도 셋을 모아두고 하렘 선언을 했었으니. 또 바보 같은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하지만 들켰다고 해서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잠깐 방으로 갈까. 바넷사.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대로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서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바닥에 무릎을 쿵하고 꿇고는 고개를 숙여 사과부터 했다.

    이런 건 처음부터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시작하는 게 좋아.

    "구, 구원씨?! 왜 그러세요? 일어나세요."

    "그래서, 또 뭘 저질렀는데?"

    "……."

    어쩜 이리도 반응이 극과 극이냐.

    레이아는 일단 당황해서 날 일으켜 세우려고 했고, 사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그리고 디아나는 일단 들어보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첩을 하나 또 들여야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본처 세분께 첩을 하나 더 들여야겠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서 힐끔 셋의 표정을 살펴보자…셋 다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어라? 설마 진짜로 완전히 예상하고 있었어?

    그런 것 치고는 뭔가 반응이 생각보다 약하지 않아?

    그야 물론 너희가 허락해주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좀 더 화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화 안내?"

    "…이 몸들이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자네가 그렇게 결정한 걸세. 그것도 이 몸들이 허락한지 얼마나 됐다고 말일세. 자네는 꼭 필요한 상황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디아나가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디아나 할머…누님….

    "…응."

    "구원씨. 그렇다면 저희도 더 할 말은 없어요."

    그리고 옆에서 레이아가 날 바라보면서 이제 그만 일어서라는 듯 내 팔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순순히 허락해주는 우리 애들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곧바로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얘들을 너무 얕보고 있었던 거 아닐까?

    이렇게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대천사 세 분이 이미 허락했던 일로 내게 화를 낸다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너, 너희들…."

    "하아…. 뭘 바보 같은 표정 짓고 있는 거야. 그래서, 실비아 다음은 마틸다라고?"

    내가 감격에 벅차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사라가 푸욱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응? 아니. 레이첼 누님인데."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하? 누구?"

    저, 저기. 사라님. 표정이 무서운데요. 농담 아니라 진짜로.

    "이 몸이 지금 잘못 들은 겐가? 지금 레이첼양의 이름이 들렸던 것 같네만."

    아까부터 고요하게 누님모드를 유지하던 디아나도, 그 예쁜 이마에 힘줄을 세우고는 중얼거렸다.

    "구원씨…. 전에 그런 거 아니라고 하셨죠?"

    심지어 방금 전까지 화조차 내지 않고 한결같이 천사 같던 레이아조차도, 살짝 어두운 오라가 몸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레이아한테는 예전에 레이첼 누님이랑 식사한 걸 들켰었지.

    그리고 그때 분명히 난 레이첼 누님과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확실히 말했었다.

    아니. 진짜였다고. 거짓말 아니었다고. 그땐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식사한 건 아니었어.

    아니. 그보다 너희들 전부 마틸다 얘기라고 생각했던 거야?!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화를 안 낸다 싶었더니, 그런 거였냐?!

    마틸다는 같이 오래 있었으니까 그만큼 마음의 준비도 해놓고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그런 얘들 마음에 내가 본의 아니게 기습을 날리는 형태가 되어버렸고, 그 반동으로 셋은 지금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다는 말이었다.

    "저, 저기. 여러분? 일단 진정하고 제 얘기를 들어 보심이…야! 사라야! 그 손 뭐야?! 너 언제부터 마나가 그렇게 검었냐?! 잠깐! 진짜로?! 폭력 반대! 폭력 반…크헉!"

    "어제 그건 뭔데?! 뭐? 보이면 안 될 짓은 안 해?!"

    "아니. 그러니까 그건, 이렇게 말할 거니까 너한테 보이면 안 될 짓은 아니었다는…잠깐! 야! 뼈 맞았어!"

    "변명하지 마!"

    변명 아닌데….

    "애초에 레이첼양이라니. 자네의 일방적인 생각 아닌가? 레이첼양은 이미 진지하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네만?"

    사라가 워낙 호쾌하게 내 등짝을 때리는지라, 그걸 보면서 조금 진정된 건지 디아나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왔다.

    "아, 예전에 레스토랑에서 한 얘기라면 그때 상대가 바로 나…끄아아악! 잠깐! 설명할 수 있어! 진짜 타임! 타임! 탭하잖아! 심판!"

    "그런 거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사라양! 더 하게! 더!"

    "네!"

    물론 내가 아무리 외쳐봤자 상황을 중재해줄 심판 같은 건 지금 이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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