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511화 (49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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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그때와는 다른

    "아뇨. 오늘은 그런 게 아니라,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하러 왔어요."

    "네? 아, 그, 그러고 보니 오늘은 다른 분들이 안 계시네요. 하지만 감사라니. 그런. 굳이 이렇게 다시 찾아오시지 않으셔도 괜찮았는데요. 전 어차피 그게 일인 거고…."

    레이첼 누님은 내 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더니, 착각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참고로 사라와 실비아, 바넷사는 마차에 대기시켜놨다.

    괜히 우르르 몰려가서 감사 인사를 하면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게 될 테니, 레이첼 누님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일…인가요?"

    "앗……."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레이첼 누님은 부끄러움과 어색함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일일 리가 없지. 안내원의 일은 모험가들에게 공지를 하는 걸로 끝이다.

    굳이 솔선수범해서 찾을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다.

    하물며 다친 것 같으니 치료를 하겠다면서 섹스를 하다니. 아무리 우리 애들이 사전에 부탁을 했다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다. 이런 세계라도 말이다.

    게다가 저렇게 어색해하는 걸 보니, 내 분위기로 이전에 내가 했던 말이 다시 기억난 모양이다.

    다음에 위에서 만났을 때, 다시 내가 제정신으로 고백하면 그땐 받아줄 거냐고 말했던 걸 말이다.

    나로선 날 보자마자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슬펐지만 말이다.

    나란 놈은 그렇게 신용이 없는 걸까?

    정말 그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 그냥 분위기 타서 고백하고 키스까지 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누님도 날 좋아하신다고 했으니까, 날 그런 놈으로 보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내가 던전에 가는 줄 알고 놀라서 반사적으로 안내원으로서의 대응이 먼저 튀어나오는 바람에 타이밍이 어색해할 타이밍이 조금 어긋난 것뿐일 거야. 그런 거라고 믿자.

    "아, 저, 저기…."

    누님은 내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누님이 이렇게 할 말을 못 찾고 있으니, 여기선 내가 대화를 이어나가줄까.

    "아무튼 인사하러 안 올 순 없죠. 뭐니 뭐니 해도 생명의 은인이시니까요."

    "…생명의 은인이라니. 과장이 심하세요. 어차피 구원씨는 안전하셨잖아요. 게다가 마을 근처에 계시기도 했고."

    내 말을 듣고, 레이첼 누님은 한순간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렇게 대답해줬다.

    내가 바로 고백이라도 할 거라고,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걸까?

    죄송해요, 누님. 고백은 반드시 할 거지만, 지금 여기서 할 건 아니에요.

    누님께 고백을 하기 전에, 나는 두 가지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하나는 먼저 우리 애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허락을 받을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실비아를 먼저 받아들일 것.

    사실 실비아에 더해 마틸다도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마틸다는 저주가 풀리지 않는 이상 진심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저주를 단기간에 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마틸다까지 받아들이는 건 포기했다.

    아무튼 그 두 가지 목표 중, 우선 한 가지는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실비아와 키스도 했고,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받아들여준다고 얘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우리 애들한테 허락을 아직 안 받았다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생황하고 나서 아직 디아나하고는 단둘이 같이 밤을 보낸 적도 없단 말이지.

    그런 상태에서 또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적어도 셋과 한 번씩 둘이서 밤을 보내고, 그 후에야 레이첼 누님에 관한 일을 얘기하려고 했던 거다.

    뭐, 그 결과 이렇게 먼저 레이첼 누님을 만나러 오는 상황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목표를 전부 달성하지 못했으니, 아직 레이첼 누님께 고백하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누님께 제대로 고백하기 전에 먼저 허락을 받는 거야 말로, 내게 다른 여자를 들여도 된다고 허락해준 우리 애들에게 내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원래부터 이렇게 길드 안에서, 일하고 있는 누님 상대로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고로, 나는 고백을 하는 대신 고백을 할 날을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뇨. 마을 근처라고 해도, 전 전혀 몰랐으니까요. 그대로라면 계속 입구를 향해 헤엄쳐갔을 거고, 그 사이에 정신이 이상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에요. 누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다시 한 번,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구원씨가 무사하다면 그걸로. 자, 고개를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누님."

    "네?"

    내가 고백하지 않을 거라고 직감적으로 눈치 챈 건지, 누님의 대답은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었다.

    계속 이대로 둘 순 없지.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만난 여성의 아름다운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구해주신 보답…이라고 하기엔 너무 변변찮은 보답이라 죄송합니다만, 적어도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누님이 허를 찔렸다는 듯 깜짝하고 놀랐다.

    "실은 이전에 알고 지내던 멋진 여성 한 분께 근사한 식당을 소개받아서요. 사실 그때는 일이 좀 생겨서 제대로 먹지는 못했지만, 음식은 무척이나 맛있었거든요. 어떠신가요? 분명 누님도 마음에 드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구, 구원씨…그, 그건…그럼 정말로…."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드디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챈 듯, 누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금뻐금 움직였다.

    "분명 전에 휴가가 쌓여있다고 하셨죠? 하루만 더, 저를 위해서 휴가를 써주실 수 없을까요?"

    그래. 이왕 누님께 고백하는 거라면, 나는 저번 실패의 만회도 겸하기로 했다.

    전에는 말 그대로 그저 누님에게 대접하는 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이번에는 나도 제대로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누님과 같이 하루를 보내고, 같이 식사를 해주겠어.

    "네, 네에…. 가능해요…."

    누님은 마치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것처럼, 어딘지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언제쯤 가능할까요?"

    "내, 내일…아니! 모레! 모레에요!"

    이 누님 또 이러시네.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랬었지.

    남자를 만나기 위한 준비에 하루를 꼬박 투자하다니. 엄청난 정성이시다.

    누님이 이렇게까지 했는데 난 대체 왜 그걸 눈치를 못 채고 멍청하게 데이트가 아니라는 둥, 그저 보답이라는 둥 바보 같은 소리만 해댔을까.

    "알겠어요. 그럼 모레에. 전과 같은 시간에 전처럼 누님이 사는 곳으로 직접 모시러 갈게요. 그걸로 괜찮나요?"

    "네, 넷. 아, 저기, 주소는…."

    "괜찮아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누님이 사는 곳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 그런가요…."

    내 대답에 누님은 얼굴을 붉히고 움츠러들었다.

    아까부터 하는 행동이 뭔가 풋풋하시다. 분명 평소에는 내가 누님한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그럼 누님. 오늘은 이걸로. 모레 뵐게요."

    "네, 네에. 안녕히 가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누님도 안내원으로서의 습관인 건지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좋아. 이걸로 일단 밑그림은 다 그렸어. 이제 당일에 얼마나 제대로 하냐에 달려있어.

    뭐, 그 전에 우리 애들한테 허락부터 받아야겠지만.

    나는 성공적으로 누님과 약속을 잡아낸 사실에 흡족해하면서,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아직도 살짝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누님을 뒤로 했다.

    "…왠지 상당히 기뻐 보이네."

    그리고 그런 날 보고, 길드 입구에 서있던 사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사, 사라?! 마차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

    "뭘 그렇게 놀라? 왜? 나한테 보이면 안 될 짓이라도 했어?"

    안내 데스크와는 멀리 떨어진데다가, 길드 안은 언제나 모험가들로 붐비고 소란스러우니 대화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안 그래도 감이 좋은 사라다. 나와 레이첼 누님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눈치 챈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짓은 안 했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줄게. 자, 다음은 신전에 가야지."

    정말로 사라한테 보이면 안 될 짓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내일 당장이라도 사라한테 말할 거니까.

    "으응? 으, 응…."

    하지만 내가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자, 사라는 반대로 자기가 당황해서는 날 따라왔다.

    분명 바람피우는 현장을 검거한 기분이었는데, 내가 이렇게 떳떳하니 자신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길드 앞에 계속 마차를 멈추고 있기는 곤란했는지, 마차는 조금 떨어진 길의 한 구석에 있었다.

    안 그래도 성에 가려고 저택에서 제일 화려한 마차를 타고 왔으니까 말이다.

    아, 그래서 사라가 여기까지 와있었던 건가.

    저기라면 확실히 100미터를 넘을 지도…어? 잠깐만.

    그리고 그제야, 나는 자신이 저지른 중대한 실책을 깨달았다.

    사라랑 나랑 100미터 이상 떨어지지 못하는데…레이첼 누님이랑 데이트는 어떻게 하지?

    그러고 보니 얘 아직 완치된 게 아니었잖아!

    나 스스로는 태연할 셈이었지만, 역시 은연중에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젠장! 이런 중요한 일을 생각해내지 못하다니!

    어쩌지? 어쩌면 좋지? 이미 약속은 다 잡아버렸다고.

    그런 식으로 약속을 잡아놓고, 다시 가서 누님께 "누님. 죄송한데 일이 생겨서 약속은 좀 미루죠." 라고 말해봐라.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짓을 했다가는, 자신과의 약속은 고작 그 정도였냐고 생각할 거 아냐!

    그럼 차라리 사라한테 나랑 레이첼 누님이 데이트하는 동안 멀리서 따라오라고 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맞아 죽는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는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느꼈다.

    "구원?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내 표정이 상당히 심상치 않았던 건지, 아까까지 레이첼 누님과 내 사이를 의심하던 사라가 순식간에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는 내게 달라붙어왔다.

    "뭐야, 이거! 땀에 완전히 절었잖아! 정말 괜찮아?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사라야. 제발. 그러지 마. 내 양심을 후벼 파는 것 같은 행위는 그만둬.

    갑자기 죄책감이 물밀 듯 밀려오잖아.

    "아, 아하하. 아니. 괜찮아. 응. 그게, 실은 조금 긴장 돼서."

    "긴장?"

    "으, 응. 신전에서 사람을 파견하려고 했다는 건, 이곳의 대사제님뿐만 아니라 교황님도 관련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혹시 교황님과 대화도 나눠야하는 건가 해서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긴장되네."

    나는 일단 그렇게 최대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공주나 추기경하고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주제에. 역시 성자인 만큼 교황님 상대론 조금 긴장돼?"

    "하하. 뭐, 그렇지."

    그러자 사라도 겨우 피식 웃더니, 뭘 그런 걸로 긴장하고 그러냐는 것처럼 내 등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물론 그 손바닥에 힘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떨렸다.

    만약 레이첼 누님과의 데이트를 멀리서 따라오라고 했다간, 이거의 수천 배는 강한 스매시가 내 뺨에 작렬하겠지?

    그런 공포에 떨면서, 나는 마차를 타고 신전에 향하게 됐다.

    신전에는 바넷사만 마차에 대기시키고, 사라와 실비아와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이 근처로 오니 날 경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아서 부담감이 장난 아니었다.

    게다가 영상 교육의 인기는 여전한지, 신전 안은 엄청나게 성황이었다.

    물론 내가 가는 길은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지만, 나는 둘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사라와 실비아를 각각 옆구리에 꽉 끼고 소피아 대사제의 방으로 향했다.

    "흐, 흐야아…구, 구언니임…저, 전 마차에서…."

    "그 다리로 저길 뚫고 간다고? 괜히 사람들 물살에 휩쓸려서 방황하지 말고 내 옆에 붙어있어라."

    "…실비아, 정말로 상태가 더 심각해졌네."

    그리고 그동안 실비아는 몇 번이나 천국을 오갔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는 벌써부터 제정신이 아니게 됐다.

    얘 이래서야 정말로 사도 임명 같은 거 할 수 있게 되기는 할까?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소피아 대사제를 만나서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마틸다가 말하기를 4계층에서 탐험하는 사제들 모두가 내 탐색에 힘을 보태줬다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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