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87화 (471/1,205)
  • 487====================

    후폭풍

    그 이후에도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해 봐도 사라는 내 몸에서 손을 놓자마자 엉엉 울어댔다.

    결국 그렇게 전혀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로 저녁 시간이 와버렸다.

    이거 좀 심각한데.

    어차피 날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난 거니까, 하루정도 붙어있으면서 안심시켜주면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되고 나니, 나도 슬슬 사라가 심각한 상황이란 걸 인지하게 됐다.

    게다가 이래서야….

    힐끔 옆을 쳐다보니, 디아나와 레이아도 사라를 바라보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계속 딱 붙어있는 모습에 평소 같으면 질투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질투하기도 애매한 상황.

    사라도 너무 날 독점하고 있으니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평소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조금 약해진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지만, 나는 일단 그 고민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저녁 식사 후에 보통 내가 뭘 하는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조금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잖아. 딱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니까.

    바넷사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가니, 이번엔 제대로 실비아와 마틸다가 자리에 앉아있었다.

    뭐, 실비아는 언제나처럼 구석 자리에 있었지만.

    "오, 실비아. 마틸다. 낮엔 뭐하고 있었어? 점심도 거르고."

    "딱히 당신한테 말할만한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점심에 빠진 건 미안해요. 그냥 조금 바빴거든요."

    "그런가."

    그렇게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마틸다였지만, 나는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마틸다의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던 거다.

    물론 마틸다뿐만 아니라, 실비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뭐지? 점심에도 욕실에 있었다고 했는데, 설마 지금까지 씻은 것도 아닐 테고.

    "실비아?"

    "네, 넵?!"

    "솔직히 말해. 너 어디서 뭘…."

    "자, 잠깐만요! 여자의 비밀을 그렇게 억지로 캐내려고 하는 건 매너 위반이라고요!"

    아무래도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내게 절대 거역하지 못하는 실비아를 통해 알아내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마틸다가 황급히 내가 질문하는 걸 저지했다.

    역시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확실하군.

    솔직히 마틸다 상대로도 캐물어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야.

    그냥 핑크빛 모드에 빠지게만 만들면 알아서 술술 말해줄 테지만…나는 일단은 그냥 물러나주기로 했다.

    매너 위반이라는 마틸다의 주장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비아와 마틸다 둘이서 행한 여자의 비밀이라니…엄청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후우. 홍차가 맛있네요."

    "그, 그러네."

    그리고 결국. 이 시간이 오고 말았다.

    저녁을 다 먹고, 우리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택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보통 그날 차례인 애랑 흐뭇한 시간이 시작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 차례는 레이아.

    레이아는 보통 자기 차례인 날에는 큰 욕실에서 씻지 않고 나랑 같이 씻는 만큼, 평소 같았으면 곧장 레이아와 방으로 돌아갔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사라의 상태가 이래서야….

    나는 여전히 한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사라를 힐끔 쳐다봤다.

    사라도 레이아한테 미안한 걸 알긴 아는지, 제대로 레이아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찻잔에만 시선을 집중시킨 채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아마 평소 같았으면, 일단 사라와 레이아의 차례를 바꾸는 걸로 하루를 넘겼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상황이 특수했다.

    오랜만에 날 만나서 오랜만에 관계를 가지는 날.

    아무리 마음이 넓고 양보를 잘 하는 레이아라고 하더라도, 이런 날까지 선뜻 양보할 기분이 들지는 않을 거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분명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데, 미묘하게 긴장된 공기가 식당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 디아나 넌 그런 분위기 풍기고 있을 필요 있냐? 아직 네 차례는 멀었잖아.

    하지만 아마 이대로라면, 레이아가 사라에게 차례를 양보하는 걸로 결론이 나겠지.

    선뜻 말을 꺼내고 있지 못할 뿐, 결국 우리 마음씨 착한 천사님은 그런 성격이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그냥 레이아가 희생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식사를 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로 했다.

    "아…그, 오늘 밤은 말인데."

    "읏…! 네에…."

    내가 입을 열자, 레이아의 어깨가 깜짝하고 떨렸다.

    표정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나는 그 미소 속에 숨겨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머리위의 두 귀도 앞으로 축 처지듯 접혀있었고 말이다.

    아마 내가 사라와 차례를 바꿔주길 부탁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천사님. 제가 그런 일방적으로 천사님이 슬퍼할만한 부탁을 할 리가 없잖아요?

    "오늘 밤은 다 같이 자자."

    "네. 알겠……네에?"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아가 깜짝하고 얼굴을 들더니 자기가 잘못 들은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름다우시면서 귀엽다니. 역시나 천사님은 최고야.

    그리고 천사님.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푸우우웁!"

    그리고 옆에서는 디아나가 성대하게 차를 뿜었다.

    "우왓! 디아나! 너 갑자기 뭐하냐?!"

    "콜록! 콜록! 그, 그건 이 몸이 할 말일세! 변태다 변태다 생각은 하고 있었네마는! 사라양이 저렇게 된 걸 핑계로 그런 계획을 꾸미다니! 자네란 남자는! 자네란 남자는! 부끄럽지도 않은 겐가아!"

    "진짜 미쳤어! 미쳤어! 진지한 얼굴로 무슨 말 하나 했더니!"

    디아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 달려들어서 무자비한 토닥토닥 공격을 내 가슴에 퍼부어댔고, 사라 역시도 깜짝 놀라서 내 팔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아니. 나 지금 엄청 좋은 제안 한 거 같은데.

    괜히 순서를 바꾸면 사라도 괜히 레이아한테 미안할 테고, 레이아도 이런 때마저 날 양보해야한다는 사실에 씁쓸할 거다.

    그러니 다 같이 자는 거다. 엄청 좋은 제안이잖아.

    그런데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거지?

    게다가 사라. 난 지금 널 커버 쳐주고 있는 거라고.

    "너희들 무슨 말 하는 거냐. 어제처럼 그냥 다 같이 자자고. 다 같이 섹스 하자는 게 아니라. 이 변태들아."

    "아, 아, 아아아…."

    그러자 내 가슴을 토닥토닥 때리던 디아나가 동작을 우뚝 멈추더니,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을 더더욱 새빨갛게 물들이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소프라노로 높아지는 것을 보아, 상당히 부끄러운 모양이다.

    "벼, 변태…이 변태한테 변태란 소리를 들었어…."

    아니. 그러니까 사라 넌 뭘 그런 걸로 충격 받고 있는 건데.

    너 요즘 은근슬쩍 바보나 변태라고 말한 다음에 오빠라고는 안 하더라?

    "과, 과연…! 그, 그렇군요! 네. 전 믿고 있었어요."

    …천사님. 천사님마저 제가 ‘사라가 이런 상태니까 어쩔 수 없군! 오늘은 다 같이 난교 파티다! 이얏호!’ 같은 말을 한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아니라고 믿을 게요.

    원래는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런지 어제 하루만으론 부족해. 오늘 밤도 너희 모두와 같이 있고 싶어.’ 같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사라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거란 티도 내지 않고, 그러면서 레이아도 배려하는 멋진 남자잖아?

    하지만 얘들 반응을 보니까 뭔가 다 허무해졌다.

    그래. 난 변태다.

    "그래. 하지만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야…이얏호! 오늘은 다 같이 난교 파티…!"

    "하, 할리 가 없잖아!"

    …농담이니까 손에 마나 싣고 때리지 마라.

    슬슬 방어력 뚫리려고 한다.

    "…이 유아퇴행 변태가 이래서야 레이아랑 같이 잘 수도 없으니까. 오늘도 차례는 하루 미루는 걸로 하고, 그냥 다 같이 자자."

    "으읏…. 또 변태라고."

    사라는 또 다시 데미지를 입은 모습이었지만, 이번엔 자기도 할 말이 없는지 딱히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같이 자잔 걸로 난교 파티를 떠올린 넌 변태로 충분하다. 그렇지 디아나?"

    그런 사라에게 추격타를 날리면서, 나는 제일 먼저 반응을 보였던 디아나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꼬,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아닐까하고 이 몸은 생각하네만 말일세!"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금 전까지 토닥토닥 때리던 내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마치 자기가 잘못했으니 봐달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너도 엄청 필사적이구나. 디아나.

    그렇게 나한테서 변태란 소리 듣는 게 충격적인가?

    "뭐, 아무튼 다들 동의하는 거지?"

    "네! 후훗. 구원씨. 사랑해요."

    레이아는 내가 자기를 신경 써서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걸 잘 아는지, 활짝 웃으면서 내게 가볍게 키스를 해왔다.

    부드러우면서 탄력 있는 입술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감미로운 홍차 맛까지 감도는, 훌륭한 키스다.

    역시 천사님이 최고야.

    "응. 나도 사랑해. 그럼 씻고 와. 난 먼저 방에 가있을게."

    그렇게 말해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먼저 방으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오는 사라와 함께.

    "자암깐 기다리게에!"

    하지만 식당을 나서려는 우리를, 디아나가 큰 소리로 부르며 막아섰다.

    "응? 또 뭐야?"

    "사라양은 자네와 함께 가지 않나!"

    "그야 그렇지. 뭣 때문에 오늘도 다 같이 자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네도 씻을 것 아닌가!"

    "그야 그렇지. 안 씻고 잘 수도 없잖아."

    "사라양하고만 함께 말인가?!"

    아, 과연.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다 같이 자자고 해놓고, 사라하고만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는 건 조금 불공평한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사라는 지금 나랑 떨어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같이 씻을 수밖에.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 같이 씻을 수도…어? 잠깐만. 이거 엄청난 기회 아니야?

    "하, 하긴. 그래선 불공평하네. 그, 그럼…다 같이 씻을까?"

    나는 자연스레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최대한 냉정을 가장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 그건…."

    디아나도 일단 질투심에 우릴 막아서긴 했지만,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우물쭈물하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능성이 있어. 이건 가능성이 있어! 전부터 계속 꿈꿔왔던 유토피아가!

    원래부터 내가 큰 욕실에서 같이 씻는 걸 반대하는 건 사라와 디아나였다.

    천사님도 딱히 찬성하는 입장을 보인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즉, 사라와 디아나만 어떻게 설득하면, 내가 큰 욕실에서 다 같이 씻는 것도 꿈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제일 난적인 사라는 이미 자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입장 상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태.

    한 마디로 말해 지금은 디아나만 설득하면 된다는 얘기다!

    "왜 그래? 사라만 나랑 같이 씻는 게 불공평한 거잖아? 그럼 다 같이 씻으면 되잖아."

    "그, 그건 그렇네마는…그래도…."

    하지만 디아나는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좀처럼 넘어와주지 않았다.

    대체 뭐가 부끄럽다는 거지? 너희들 평소에도 다 같이 씻잖아.

    거기에 그냥 나 하나만 더 추가되는 것뿐이라고.

    게다가 나랑 디아나랑 같이 씻은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부끄러운 거야?

    아, 혹시 내가 욕실에서 뭔가 장난을 칠까봐 경계하고 있는 건가?

    만약 다들 보는 앞에서 내가 야한 장난을 치면, 조금 위험한 성벽을 가지고 있는 디아나로서는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좋아. 그렇다면.

    "경계할 필요 없어.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는 거니까. 나도 원래는 레이아 차례인 날에 사라하고만 같이 씻는 건 미안하고. 그냥 다 같이 씻기만 하자는 거야. 괜찮잖아?"

    나는 장난 같은 거 절대 안 치겠다는 순수한 표정으로 디아나를 바라보면서 설득을 계속했다.

    "저, 정말로 그냥 씻기만 하는 겐가?"

    역시나 디아나는 이걸 경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연하지. 그럼 욕실에서 씻기만 하지 또 뭘 하겠어? 그리고 나도 가끔은 큰 욕실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씻고 싶다고. 결국 전에 딱 한 번 이용해본 게 전부였잖아. 너희만 그런 사치를 하다니 치사해. 미궁에서 겨우 생환해온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도…."

    "아, 알겠네. 알겠으니까 그렇게 얼굴 들이밀면서 말하지 말게!"

    "디아나?!"

    내 끈질김에 결국 디아나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사라는 디아나가 꺾일 줄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럼 갈까! 사라도 괜찮지? 치사하게 그런 상태가 된 걸 이용해서 혼자 날 독점할 셈은 아니겠지?"

    "으으읏…그, 그거야…."

    내 한 마디에 사라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날 사이에 두고 매일 투닥거리는 사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서로 페어플레이가 가능할 때나 그러는 거지. 사라는 결국 그런 약삭빠른 짓을 할 성격이 못 되니까 말이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엔텔드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