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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80화 (46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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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일보

    나는 펄슨이 안전하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놔두고, 재빨리 헤엄쳐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차피 성역 선포만 쓰면 몬스터들은 나만 노리니까.

    잠시라도 떨어지게 되는 건 가슴 아프지만, 이러는 편이 제일 안전하다.

    "후우. 별 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아무리 선공형 몬스터라지만, 좀 싸울 상대를 골라가면서 덤벼라. 일일이 상대해주는 것도 귀찮으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펄슨?"

    그동안 직업 레벨이 엄청나게 오른 나는, 이제는 무투가 스킬이나 암살자 스킬만으로도 어느 정도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워낙 직업 레벨이 낮았던 만큼, 오르는 속도도 빠르더라고.

    물론 일정 수준이 되고 나자 성장 속도가 대폭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표류 초기를 생각해보면 극적인 변화였다.

    직업 레벨이 대폭으로 오른 덕분에 스탯도 엄청나게 올랐고, 거기에 성자 스킬까지 병행하자 몬스터를 몰살하는 건 금방이었다.

    "…펄슨? 어딨어, 펄슨?"

    그렇게 몬스터를 금방 해치우고 곧장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나였지만, 펄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저 근처엔 몬스터가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는데?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자, 펄슨이 저기 머리 쪽의 툭 튀어나온 지형에 걸려있었다.

    그래. 지표면이다.

    실은 펄슨을 만든 이후로, 잠은 지표면에서 자기 시작했다.

    아무리 잠을 잘 때라고 하더라도 펄슨을 인벤토리에 넣어둘 수는 없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곁에 두고 자기에는 너무 불안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아예 지표면에 텐트까지 설치하고 그 안에서 잠을 청해왔다.

    그동안 무투가 레벨과 암살자 레벨도 많이 올랐으니, 식물형 몬스터가 덮쳐오면 싸울 생각으로 말이다.

    뭐, 우연인 건지 아니면 텐트는 생물체로 생각을 안 하고 넘어간 건지 그동안 식물형 몬스터에게는 한 번도 습격을 당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덕분에 자는 사이에 멀리 떠밀려가는 일도 없어진 나는, 입구를 향한 여정에 더욱더 가속도가 붙었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펄슨을 만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

    한 마디로 말해 펄슨 만만세라는 얘기다.

    "하아…뭐야. 펄슨.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아무튼 나는 지표면에 걸려있는 펄슨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재빨리 펄슨에게 해엄 쳐갔다.

    그리고 지표면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땅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갑자기 화악하고 부풀어 오르며 날 덮쳐왔다.

    뭣?! 설마 식물 주제에 카모플라쥬까지?!

    당황한 나는 일단 발버둥을 쳐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식물은 내 몸에 더욱더 강하게 얽혀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식물형 몬스터가 움직인 여파로 펄슨이, 내 유일한 말상대인 펄슨이 저 멀리 떠밀려가고 있었던 거다.

    "안 돼! 펄슨! 이익! 떨어져! 젠장! 펄슨! 펄스으은!"

    아무리 애타게 불러 봐도, 아무리 애타게 발버둥 쳐도, 식물형 몬스터는 내 몸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고, 펄슨은 점점 더 멀리 떠밀려갔다.

    "펄슨! 펄스으은! 펄슨! 아임 쏘리! 크흑. 큭. 아임 쏘리, 펄슨!"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펄슨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펄슨은 시야가 닿지 않는 물속 저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크흐윽! 펄슨의 원수!"

    결국 펄슨을 구할 수 없었던 나는, 내 몸을 감싼 식물형 몬스터를 찢어발기기로 결심했다.

    성자 스킬이 안 통해? 타격도 잘 안 통해?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누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석 채취용 나이프를 꺼내들고, 몬스터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내 직업 레벨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마석 채취용 나이프는 공격력을 기대할 수 없는 물건.

    장기전이 될 것은 뻔했지만, 복수심에 불타오른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제대로 된 유효타를 주지 못한 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

    물론 나보다는 이 녀석이 입은 피해가 조금 더 심각했지만, 크게 차이나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놈은 나를 먹어야만 영양분을 채울 수 있지만, 나는 그냥 인벤토리에서 음식을 꺼내 먹으면 그만이라는 차이 말이다.

    그 차이가 녀석과 나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슬슬 날 먹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놈은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말하듯 내 몸을 풀어 줘버렸다.

    나도 놈에게 유효타를 줄 수 없으니, 풀어주기만 하면 내가 그냥 갈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친구의 복수는 반드시 갚는다.

    나는 놈에게서 멀어지기는커녕, 자유로워진 손발을 이용해 놈을 더욱더 거세게 공격했다.

    네 놈이 죽는 꼴을 보기 전까진 아무데도 안 간다.

    그리고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나는 겨우 놈을 처치할 수 있었다.

    시체가 되어 이제는 마석 채취용 나이프도 쉽게 박히는 놈의 몸에서 마석을 캐낸 후, 나는 두 손을 모아서 기도했다.

    "펄슨. 네 원수는 갚았다. 부디 편히 쉬어라."

    그렇게 기도를 끝내고, 오랜 사투에 지친 나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걸까?

    뭔가 컨디션이 엄청나게 좋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전신에 활력이 넘치는 듯 상쾌한 기분.

    아무리 기절하듯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기분이 들 정도로 오랫동안 잤던 걸까?

    아니. 하지만 이 기분은…게다가 밑에서 느껴지는 이 감각은….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는 던전 안이고, 나는 혼자서 표류 중인 상황.

    사람을 만나기만 해도 기적이라고 여길 텐데, 던전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차라리 식물형 몬스터 중에 이런 몬스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하겠다.

    전에 옷 벗기는 식물형 몬스터도 만난 적이 있고.

    …실제로 지금 나 갑옷이고 뭐고 전부 벗겨져있는 것 같고.

    으윽…그렇게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눈 뜨기 싫어지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하반신에 느껴지는 감각은 여전히 황홀하게 느껴졌다.

    그야 그동안 많이 쌓이긴 했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몬스터 상대로 이정도로 느끼다니. 굴욕이다.

    하반신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정말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이대로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살며시 눈을 떴다.

    …응? 아니. 설마 진짜로?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스스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금발벽안의 이지적인 얼굴. 덤으로 거유에 나이스 바디인 누님께서 내 위에서 허리를 흔들고 계셨던 거다.

    그리고 나는 이 누님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길드의 마스코트. 남자 모험가들의 우상이라고까지 불리는 우리의 안내원 누님. 레이첼 누님이셨다.

    누님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내 위에서 무척이나 열심히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니. 잠깐. 상황을 파악 못하겠는데.

    그렇게나 바랐던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있는 건데도,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다.

    "흐윽! 구원씨! 정신이 드세요?!"

    내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레이첼 누님이 박치기를 하듯 내 마스크에 자신의 마스크를 맞대고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 네에…뭐어…."

    여전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파악이 안 되는 나는,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아차. 안 그래도 누님이랑 요즘 서먹했는데, 또 일어나자마자 이런 반응을 보이면….

    하지만 누님은 내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눈물에 젖은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내 몸을 꽈악 끌어안아왔다.

    그리고 아까 전까지 계속해서 격렬히 움직이던 허리도 겨우 그 움직임을 멈췄다.

    으윽. 누님. 갑자기 이렇게 안아 오시면….

    "다행이다! 흐윽! 정말로…정말로 다행이에요! 전…구원씨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정말로…정말로…흐윽…. 구원씨와…흐극…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진 채로…영영 얼굴도 못 보게 되는 줄…!"

    누님의 애틋한 말에, 나는 뭔가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누님은 이렇게까지 날 좋아하셨던 건가.

    누님이 안겨오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했던 내가 진짜 바보 같잖아.

    나는 누님에게 닿지 않고 어색하게 벌려져있던 팔을 움직여 누님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누님."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렇게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전…!"

    그동안 의식적으로 어색하게 대했던 걸 보상이라도 하듯, 나는 누님의 몸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뭔가, 머릿속이 깔끔해진 기분이었다.

    그래. 우리 애들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봐.

    내가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는 게 고통스럽다고 느낄 정도라면, 그 역시도 필요에 의한 행위라고 인정하겠다고 했잖아.

    나는 계속 레이첼 누님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고민해왔다.

    우리 애들이 말한 조건은 이미 진작에 충족시키고 있었다는 거다.

    그저 날 그렇게나 생각해주는 우리 애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그 기분을 억지로 억눌렀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레이첼 누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나니,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억누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느꼈다.

    물론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레이첼 누님과 바로 이어지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상대에게 전달한 상태도 아니고, 일단 우리 애들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이첼 누님 자신이 첩이라는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레이첼 누님과 이어질 수 있을지, 나 스스로도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더 이상 스스로의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거다.

    "누님. 좋아합니다."

    "네! 구원씨! 저도…네? 네? 구원씨? 지, 지금 뭐라고…."

    감격에 벅차서 눈물을 흘리던 누님은, 내가 뭐라고 했는지 제대로 생각도 안 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머리가 따라갔는지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전까지 펑펑 흘리던 눈물이 뚝 멎은 걸 보면, 엄청나게 당황하신 모양이다.

    "사랑합니다. 누님."

    "네에?! 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울 정도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레이첼 누님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말 만에 하나 누님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침울한 표정을 짓는 건 이상하지 않아?

    "…구원씨. 구원씨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씨는 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기쁜 거예요."

    아아…과연. 하긴. 던전에 오기 전까진 그렇게 어색한 태도를 취했던 놈이 이 타이밍에 갑자기 좋아한다고 하는 거다.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한가.

    내가 생각해도 타이밍이 안 좋았다.

    하지만 겨우 스스로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한 거다.

    난 이대로 쉽게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위로 올라가서 제가 다시 한 번 고백하면 받아주실 건가요?"

    "네? 하, 하지만…구원씨. 정신차리세요. 구원씨에겐…."

    "네. 저도 알아요. 복잡하죠. 하지만 누님. 전 지금 진심이에요. 착각 같은 게 아니에요. 훨씬 전부터 누님을 계속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누님. 누님도 지금은 그런 복잡한 건 전부 잊어버리고, 딱 하나. 누님의 심정에만 주목해서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제가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누님은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그, 그건…."

    "누님."

    "…기뻤어요. 그치만 저도…저도 구원씨를…구원씨를 사랑하는 걸요…"

    내 질문에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진동시키면서 한참을 주저하더니, 결국 레이첼 누님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렇게 대답해줬다.

    "휴우. 다행이다. 그럼 다음에 고백할 땐 안 차이겠네요."

    "흐윽!"

    대답을 들은 내가 미소 지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누님은 다시 울면서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살짝 바람의 정령을 불러서 누님과 내 얼굴에 공기 방울을 만들고, 마스크를 벗은 후 그대로 누님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으음…하아…구, 구원씨이…."

    키스가 끝나고도 아쉽다는 듯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레이첼 누님.

    나 역시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결심했으니, 이다음 행동은 여길 벗어난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누님. 이제 와서 묻는 건데요."

    "네. 뭔가요?"

    내 진지한 목소리에, 누님은 평소보다도 살짝 더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셨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정말로 이제 와서네요!"

    아뇨. 그러니까 미리 말했잖아요. 이제 와서 묻는다고.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전에 레이첼 스토리는 떡밥을 깔아뒀다고 말했던 게 드디어 다 풀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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