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76화 (46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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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보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니 귓가에 조그맣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인가. 요즘 우리 애들이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경우가 꽤나 많단 말이지.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말이야.

이건 즉, 우리 애들도 내 기상 시간에 익숙해졌다는 건가.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그동안 얘들과의 인연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실감이 돼서 조금 기뻤다.

아무튼 디아나가 뭔가 중얼거리고 있는 모양인데, 내용을 듣지 않아도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아마 어젯밤에도 결국 날 이길 순 없어서 침울해져 있는 거겠지.

불쌍하니까 조금 달래줄까.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음. 확실해. 이건 가능성이 있어!"

아니. 조금만 더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듣고 나서 행동하자.

"어젯밤에도 그 타이밍에 폴리모프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이 몸의 승리였을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

아니. 디아나. 너 그때 폴리모프 안 풀렸으면 나한테 훨씬 엉망진창으로 당했을걸.

"그런 굴욕까지 감내해가며 레이아양에게 비법을 전수받은 보람이 있었구먼."

그런 굴욕이라니. 아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이 몸이 당하고 있었던 게 이상한 일이었네. 성자가 뭐가 어쨌단 말인가! 이 몸이 조금 어른의 매력을 보여주면 우리 낭군님이 넘어오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낭군님은 이 몸에게 홀딱 반해있으니 말일세!"

…아니. 뭐, 그야 그렇긴 한데 말이야.

너 어제 겨우 조금 이길 뻔 한 거 가지고 자신감 엄청 붙었구나.

풀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우리 대마법사님한테 이정도 시행착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젠 디아나가 풀죽을 이유가 딱히 없었다.

결국 내가 주도권을 뺏어왔다곤 하더라도, 말 그대로 순수하게 주도적으로 움직이기만 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노출증 같은 걸 자극하면서 놀지도 않았고, 딱히 괴롭히지도 않았고.

원래는 한껏 들어 올렸다가 완전히 절망에 빠뜨려버릴 작정이었지만….

아무리 날 이기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디아나가 그렇게 예쁘게 유혹해 온 거다.

과연 나도 너무 심한 짓은 할 수 없더라고.

그래서 오랜만에 그냥 평범하게 즐겼다.

애초에 디아나가 날 이기려는 이유도 내가 틈만 나면 장난쳐서 그런 거였으니, 풀죽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거다.

오히려 반쯤은 목적을 이뤘다고 볼 수도 있는 건가?

"다음엔 폴리모프 시간을 제대로 조절해서…아니.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도 없지 않은가. 요는 어른의 매력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우리 낭군님은 이 몸이 굳이 폴리모프를 하지 않아도 이 몸에게 홀딱 빠져있으니, 차라리 그냥 이대로…."

뭐, 디아나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다음엔 반드시 날 이겨볼 속셈인 것 같지만.

그래. 디아나. 네 말이 전부 맞아.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게 홀딱 빠져있는 상태고, 아마 네가 진심으로 날 유혹하면 절대 버티지 못할 거야.

…내가 네 계획을 전부 다 듣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디아나. 넌 대체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거니.

아니. 애초에 그런 계획을 짤 거면 그냥 혼자 생각만 할 것이지, 왜 그렇게 중얼중얼 말하고 있는 거니.

마법 연구할 때의 버릇 같은 건가?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고 하더라도, 내 귓가에 대고 그렇게 재잘재잘 떠들면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잖아.

너 내가 자고 있다고 너무 방심한 거 아니냐?

이쯤 되니 디아나가 나한테 당하는 게 운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냥 하늘이 평생 넌 나한테 이기지 못하도록 운명이든 뭐든 조작하고 있는 거 아니냐?

뭐, 아무튼 한동안은 꿈이라도 꾸고 있게 해주자.

"으으음…디아나…?"

나는 지금 막 이러난 척 잠긴 목소리로 디아나의 이름을 부르며 살며시 눈을 떴다.

"우오옷! 자, 자네 언제 일어났는가?!"

"언제라니…그야 지금인데…."

"으, 음! 하, 하긴 그렇겠구먼! 잘 잤는가."

"응. 디아나도. 잘 잤어?"

"음!"

그래. 아까 말 하는 거 보니까 풀죽지도 않고 푹 잘 잔 거 같더라.

나는 아까 전 말은 전혀 못 들은 척을 하면서 디아나와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앞으로도 더더욱 디아나에겐 져줄 수 없다는 생각이….

"으응! 후훗. 자네는 그렇게 하고도 항상 이렇구먼. 어디, 바넷사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구먼."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디아나는, 웬일로 내가 말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물건은 여전히 디아나의 안에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가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던 것도, 굳이 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생각을 중얼거리는 습관은 둘째 치고, 삽입을 풀고 떨어져있었으면 적어도 귓가에 중얼거리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디아나가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뭐, 한 번쯤은 일부러 져주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

"이게 미끄럼방지를 위한 장비야?"

"그래. 그냥 평지를 걸을 땐 빼면 되니까, 장비에 직접 처리를 하는 것보다 편하잖아?"

"확실히…."

그리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곧장 한나의 대장간으로 왔다.

주문했던 아이젠을 바라보고 사라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구원씨는 대단하세요. 이거라면 양산해서 파는 것도 가능한 거 아닌가요?"

"아니. 적어도 여기선 아니야. 수요가 너무 적어."

"네? 하지만 3계층에서 매우 유용해 보이는데요?"

확실히. 얼음 동굴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3계층도 눈으로 뒤덮인 만큼 발밑이 미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뭐, 우리는 대책 없이 그냥 다니기는 했지만,

3계층은 조금 조심하면 미끄러질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우리 수준이 너무 높아서 3계층 몬스터는 그냥 쓸어버리고 다녔으니까 말이다.

"3계층에 다니는 모험가들 중 미끄럼 방지가 필요한 사람은 직접 신발 장비에 직접 설치하니까. 너희처럼 그렇게 빨리빨리 계층을 넘어가는 모험가는 그리 없다고."

과연. 하긴 그런가.

계속 3계층에서 있을 거면 매번 귀찮게 아이젠을 끼고 하는 것보다 그냥 신발에 박아두는 게 편하겠지.

"아무튼 이걸 끼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탐험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좋아. 가자."

나는 한나에게 보수를 지불하고, 곧장 길드로 향했다.

뭐, 던전에 가기 전에 넘어야할 또 하나의 난관이 아직 존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구원씨. 저번에 막 돌아오신 참인데 벌써 또 던전에 가시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누님. 네. 뭐어…."

날 보고 인사를 해오는 레이첼 누님은, 척 보기에는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나는 누님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실감하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갔다가 며칠 안 돼서 금방 나오고, 또 며칠 안 돼서 금방 다시 던전에 가는 거다.

즉, 길드를 엄청나게 왕복하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의 레이첼 누님이었다면 분명 "후훗. 혹시 제 얼굴을 자주 보려고 일부러 계속 들락날락하시는 건 아니죠?" 같은 말을 해오기에 충분한 상황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애매모호하게 말을 흐려도, 레이첼 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날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게, 새로 발견한 곳도 빨리 탐험하고 길드에 보고하고 싶으니까요."

"그런가요. 일부러 길드를 위해서. 고마워요. 길드를 대표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릴게요."

…역시 거리감이 느껴져.

게다가 이게 전부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해지자, 뭔가가 가슴 안쪽을 쿡쿡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파티는 언제나의 멤버로. 다녀오세요."

방긋하고 영업 스마일을 지으며 인사하는 레이첼 누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던전으로 향했다.

우울하다. 레이첼 누님과 이렇게 접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아질 날이 언젠가 오긴 하는 걸까?

답지 않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울해졌다.

"이거 봐. 구원! 얼음 위에서도 이렇게 안정감 있게…!"

"드디어 가슴에서 해방이구먼!"

"디, 디아나씨. 가슴이라니…."

하지만 던전 안에서까지 우울하게 행동할 수는 없는 일었다.

나는 파티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최전선에 서는 방패 역할이니까. 내가 방심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우선 얼음 동굴 답파에 집중하기로 했다.

"응. 이거라면 좀 뛰거나 해도 아무 문제없겠네. 실비아나 마틸다도 어때? 괜찮은 것 같지?"

우리 파티에서 여차할 때 제일 발을 많이 움직여야할 셋을 꼽자면 바로 나와 실비아, 마틸다다.

나와 실비아는 전위에서, 마틸다는 후위를 지키는 마지막 방패로서 말이다.

사라도 여차하면 회피하면서 화살을 날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후위에서 안전하게 자리 잡고 활만 쏘는 역할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실비아와 마틸다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하는 나였다.

"네, 네헷!"

"……."

조금 혀를 씹긴 했어도 기운차게 대답한 실비아였지만, 어째선지 마틸다는 대답이 없었다.

"마틸다? 무슨 문제 있어? 아, 혹시 던전에 온 주기가 짧아서 힘들다든가…."

"네, 넷?! 아, 아뇨! 괜찮아요! 미안해요!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괜찮아요. 발밑은 아무 문제없어요. 거,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당신…."

내가 조금 걱정스럽게 말을 하자, 그제야 마틸다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벌써부터 던전의 마력에 버티기 힘든 건 아닌 모양이다. 마지막엔 조금 핑크빛 모드까지 됐었고. 아마 아무 문제없겠지.

하지만 마틸다 녀석. 어제 신전에서 돌아온 이후로 조용히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가 많단 말이야.

저 모습을 봐선 아마 교황과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한 모양이지만, 내가 함부로 캐물어도 좋은  일인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이상 어떻게 손 쓸 방법도 없고….

어제 그냥 모르는 척하고 물어볼 걸 그랬나?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지만, 되도록 던전 안에서는 딴 생각은 하지 말아줘."

스스로도 레이첼 누님의 건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나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 그렇게 말했다.

"네. 미안해요. 조심할게요."

"그리고 만약 그 고민이란 게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말해. 힘이 되 줄 테니까."

"당신…고마워요오…. 저도 언제든 당신의 힘이…."

"아니. 그러니까 던전에서 그 상태가 되는 건 그만두라니까."

다시 핑크빛 모드가 되려고 하는 마틸다의 이마위에,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만으로도 마틸다의 핑크빛 시선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요즘 점점 얘 취급…이라고 할까, 저주의 취급에 익숙해져가고 있단 말이야.

"아읏! 그, 그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거 알잖아요. 아무튼 괜찮아요. 그냥 교단 내부의 일로 조금 생각에 빠졌던 것뿐이에요. 그런 것보다, 벌써 한 마리 나타났네요."

마틸다는 살며시 이마를 감싸 쥐고 그렇게 말한 후, 정신 차리겠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고 전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 별 일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만약 별 일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아까 스스로 말했던 대로 일단은 던전에 집중하기로 했다.

"정말 편리하네. 이거. 바닥만 미끄럽지 않으면 상당히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네."

"그렇구먼. 4계층의 몬스터들을 상회하는 공격력에만 주의하면, 사냥 속도로 빠르고 말일세. 이곳이 공개되면 그동안 3계층에서 멈춰있던 모험가들 중 많은 수가 4계층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되겠구먼."

"너흰 좋겠다. 편해서."

"음? 무슨 말인가. 자네도 꽤나 편해지지 않았나?"

"그거야 그렇지만 설마 암살이 안 먹히게 될 줄이야…."

그래. 아이젠 덕분에 얼음동굴 탐색에 안정감도 생겼고, 전투도 한결 편해졌다.

다만 이전처럼 내가 은신으로 다가가서 한 마리 처리하는 방식은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젠을 신은 신발이 너무 시끄러워서 은신을 써도 펭귄한테 들켜버리는 거다.

"암살자 레벨을 올리는 것도 꽤나 쏠쏠했는데…."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않나. 애초에 자네 암살자 레벨은 여기 몬스터들을 상대하기엔 조금 부족한 수준이니 말일세."

"하아…애초에 이상하다고. 이 세계의 암살자 레벨이 오르는 방식. 암살을 하면 올라야 정상이잖아? 그동안 우리는 항상 몬스터들을 암살로 처리했는데."

"네에?! 그,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저희가 암살로 처리를 했다니요?"

레이아는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마냥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물어봤다.

하긴. 암살이라는 말 자체가 그다지 어감이 좋은 말은 아니니까.

천사님은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몬스터들을 상대로 그냥 사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된 모양이다.

"잘 들어. 내가 살던 세계에는 이런 말이 있어. 목격자를 모두 죽이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암살이다. 우린 지금까지 보이는 몬스터는 전부 잡아왔잖아? 그런데 어째서 암살자 레벨은…."

"뭐야. 그 바보 같은 말은…."

내 탄식에, 사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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