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74화 (458/1,205)

474====================

파급효과

"히에엣…하엣…흐아아우우…."

뭐, 내성이 약해진 실비아는 그냥 포커를 해도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이번엔 전처럼 일부러 눈을 많이 마주친다든가, 방긋 웃어준다든가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꼴이 되어버렸다.

혼자서 멍하니 날 쳐다보더니 혼자서 ‘핫!’ 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다시 멍하니 얼굴을 바라보고. 그러다가 점점 호흡이 가빠져가고, 몸은 점점  소파에 파묻히듯 드러눕게 되고.

그래서 결국 저 모습이 완성됐다.

그래가지고 던전 안에서는 대체 어떻게 버텼니.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카드를 쥘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실비아를 관찰하고 있자, 옆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바넷사였다.

바넷사는 나와 실비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평소처럼…아니. 평소 이상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말해두는데 아무 짓도 안 했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아니. 입만 안 열었다 뿐이지 표정으로 격렬하게 경멸하고 있었잖아.

뭐, 됐어. 그보단 우선 할 일이 있지.

나는 바넷사의 팔을 덥석 잡았다.

실비아가 저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남한테 들려줄만한 얘기도 아니고.

"흡…!"

나는 바넷사를 근처에 사람이 없을만한 장소로 끌고 갔다.

한껏 경계하면서 몸을 딱딱하게 굳힌 것에 비해, 바넷사는 의외로 간단히 내게 끌려왔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 나는 바넷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바넷사."

"……뭡니까."

"미안. 내가 좀 과했다."

"……네?"

내가 살짝 머리를 숙여서 사과하자, 바넷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정도면 바넷사치고는 상당히 리액션이 큰 편이었다.

하지만 얘는 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거지?

부끄러워서 반나절 동안 모습도 안 보인 주제에.

"아니.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심했던 것 같아서."

"…여자애…."

"아, 그래. 그래. 또 미안. 그럼…레이디?"

"……."

"바넷사? 바넷사씨?"

얘는 또 왜 정지하는 거지? 아, 혹시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런 거야?

바넷사의 표정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된 나는, 바넷사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확실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긴 매일같이 저택에 처박혀있는 바넷사다. 게다가 이 저택은 나를 제외하면 여성밖에 없는 곳. 그야 레이디란 말을 들을 기회 같은 건 전혀 없었겠지.

즉, 내성이 없는 거다.

이 철벽녀도 내성이 약한, 게임으로 치면 약점 속성 같은 건 존재 했다는 말이로군.

"쓰으읍. 후우…사과하실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잊기로 했던 일을 먼저 입에 올린 건 접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주인의 치태를 그런 장소에서 입에 담다니. 몇 번을 사죄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바넷사가 정지했던 건 아주 잠깐이었고, 바넷사는 이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내게 사과를 해왔다.

"아, 응. 그래. 괜찮아. 주위에 아무도 없었고. 용서할게."

너무 극단적인 행동에 오히려 당황해버린 나는 부끄러워하는 바넷사를 놀릴 생각도 못하고, 그만 반사적으로 깔끔히 사과를 받아주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시죠. 식사가 식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바넷사는 허리를 숙인 채 몸을 반 바퀴 빙글 돌려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바넷사 답지 않게 너무 대놓고 의도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바넷사. 그렇게 얼굴이 안 보여주더라도, 넌 머리카락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으니까 뒤에서도 살짝 붉어진 귀는 확실히 보이거든?

나는 나름 신선한 바넷사의 태도에 흡족한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바넷사의 귀도 완전히 원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스스로가 범한 중대한 실수를 하나 깨달았다.

…어? 혹시 방금…바넷사를 울릴 수 있었던 절호의 찬스였던 거 아냐?

젠자아아앙! 두 번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그 좋은 기회를 그냥 놓쳐버리다니이이이!

"후훙! 자네 왔는가!"

그리고 식당에는 뭔가 평소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디아나가 날 반겨줬다.

물론 디아나 말고도 사라나 레이아도 제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저 반응을 봐서는, 아무래도 레이아가 뭔가 말하긴 말한 모양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어차피 비법 같은 건 없을 텐데.

"아, 구원씨. 저 대신 마틸다씨와 신전에 가주셨다면서요? 정말 감사해요."

"아니. 어차피 나도 볼 일이 있었으니까. 감사 인사를 받을 건 아냐."

"후훗. 그래도요."

레이아는 기분 좋은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다.

저 반응을 봐서는, 그래도 사라나 디아나가 심한 짓을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기분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상당히 신경 쓰이지만, 그걸 물어보면 내가 엿들었다는 게 들켜버리니까 말이야.

별로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이왕이면 오늘 밤은 넘겨야하지 않겠어?

디아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저렇게 자신감이 넘쳐흐르다 못해 반짝반짝 거리기까지 하는 디아나의 표정이 서서히 절망으로 바뀌는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크흠. 아무튼.

"그런데 실비아는? 같이 있었던 거 아니야?"

자기 차례는 어제 막 지나갔기 때문인지, 그나마 사라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같이 있기는 했는데, 식사는 못할 것 같아."

"또오?"

"아니. 이번엔 진짜 순수하게 포커 게임만 했는데 말이야. 딱히 이상한 짓도 안하고. 그런데 걔 요즘 내성이 너무 낮아졌단 말이야. 언제 한 번 충격요법이라도 써보는 게 좋을지도."

"그만둬. 실비아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래도 실비아가 언제나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건 얘들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비아. 파티의 전위로서 언제나 든든한 방패 역할이 되어주는 네 평가가 점점 더 불쌍해지고 있는데.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내성은 붙여야할 것 같지 않니?

아무튼 그런 하릴없는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실비아를 빼고 식사를 마쳤다.

참고로 실비아는 바넷사가 날 식당까지 안내한 후에 방으로 옮기고, 식사도 따로 챙겼다는 모양이다.

역시 우리 슈퍼 집사님은 유능하다니까.

가끔 날 대하는 태도가 이상해지는 것만 빼면 완벽한데 말이야.

"음후훗. 기다리게 했구먼."

식사를 마치고 내 방의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언제나처럼 큰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온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그 차림은 평소와는 좀 달랐는데, 디아나는 목욕 가운을 그대로 걸치고 방까지 왔던 거다.

설마 레이아한테 전수받은 게 고작 이거?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디아나의 모습이 꽤나 파괴력이 있었다.

디아나는 무려 성인 버전으로 변해서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원래 모습일 때 입는 목욕가운을 그대로 입은 건지, 사이즈가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위쪽은 커다란 가슴 때문에 제대로 닫히질 않아서, 가슴이 절반정도 그래도 보이고 있는 상황.

아래에 이르러서는 목욕가운의 밑단이 디아나의 음부를 정말 아슬아슬하게 가릴 수준까지밖에 내려와 있지 않았다.

얌전히 걷기만 하면 아슬아슬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아마 조금이라도 뛰면 바로 속옷이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서, 끝내줍니다. 디아나 누님.

식사 때 그렇게 자신감에 넘쳐흘렀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건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지.

세상에 어떤 남자가 저 모습이 안 넘어가겠어.

…날 제외하면 말이야.

아니. 물론 나도 넘어갈 정도로 예뻐. 평소 같으면 그냥 디아나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줬을 거야.

다만 말이지. 난 오늘 낮에 결심했단 말이지.

밤에 디아나가 뭔 짓을 해와도 절대 져주지 말자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라도, 난 약속은 지키는 남자니까 말이야.

이대로 굴할 수는 없다는 거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디아나의 유혹을 이겨내기로 했다.

"디아나. 뭐야. 그 차림은? 설마 너 노출증이 더 심해…."

"아, 아닐세! 그게 무슨 소린가! 애초에 이 몸은 노출증이 아닐세!"

내 한 마디에 디아나의 고혹적인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음. 역시 디아나는 이렇지 않으면.

아무리 외모가 누님 버전이라도 결국 디아나는 디아나라는 거다.

"코홈. 하여간 자네는…앗, 그런가. 자네. 부끄러워하는 게로구먼?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야."

하지만 디아나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말을 자기 입맛 좋게 해석하기까지 했다.

사실 부끄러움을 숨기려 한다는 게 반쯤은 정답이기도 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쿡쿡하고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평소보다 더 요염하게 보이기까지 해서 더더욱.

역시 저 외모에 저 차림은 반칙이잖아.

"후훗. 부끄러워 할 것 없네. 자, 오늘 밤은 이 누님께 온 몸을 맡기게나. 이 누님이 천국으로 보내주겠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디아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귀엽다는 표정을 날 바라보면서 천천히 내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침대에 무릎을 꿇고 올라와서는 그대로 네발로 기어왔다.

얼굴이 내 가슴에 맞닿을 정도까지 기어온 디아나는 내 가슴에 살며시 손을 얹더니, 그대로 부드럽게 밀어서 날 침대에 눕혔다.

…이거 좀 위험할지도. 오늘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져주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이대로 가면 완전히 디아나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 분위기를 깰 수단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누님이라고 한 것에 딴죽을 걸어볼까?

누님이라니. 넌 할머…응. 아니지. 이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져주는 게 낫지.

젠장.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 거지?

레이아 누님. 비법 전수를 너무 완벽하게 했잖아요.

설마 디아나가 이렇게까지 천사님 같은 분위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줄이야…응? 천사님 같은 분위기? 그래! 그거다!

"디아나. 잠깐."

침대에 날 눕히고 완전히 내 위에 올라온 디아나의 어깨를, 나는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아서 일단 디아나의 행동이 계속되는 걸 막았다.

"음? 후훗. 왜 그러나?"

하지만 디아나는 당황하지 않고, 내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귀여워 죽겠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나, 전에 분명히 말했지?"

"음? 뭐가 말인가?"

"디아나는 디아나 자체로 좋다고. 왜 이렇게 레이아 흉내를 내려고 하는 거야?"

"음? 레이아양의 흉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먼."

하지만 내 시도는 디아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이렇게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먹힐 리가 있나.

그래도 나는 여기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디아나에게 정말로 져주게 되어버려. 그래선 안 된단 말이다!

이건 나와 디아나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다.

"시치미 떼지 않아도 돼. 디아나는 이런 성격이 아니잖아?"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이 몸은 원래 이런 성격일세. 이 정도 포용력이 없으면 모든 마법사들의…."

"그야 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렇겠지. 하지만 나랑 있을 땐 아니잖아? 가끔 떼도 쓰고, 감정적이 되기도 하고, 난 나랑 있을 때 보여주는 디아나의 모습을 나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어?"

"웃…."

내가 정열적으로 말하자, 디아나의 말문이 막혔다.

좋아. 먹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후하핫. 디아나야. 네가 날 밤에 이기는 아직 10년…아니. 3천살 가까이 먹고도 못 이기는 거니까 3천년은 이르다!

넌 영원히 밤에 나한테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하아. 그렇구먼. 자네가 말하는 대로일세. 이 몸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자네 앞이기 때문일세."

결국 디아나는 레이아 같은 행동을 하는 걸 포기한 모양이었다.

"응. 응. 그렇지. 우리 디아나는 귀여운 모습이 최고니까 말이야."

"후훗. 고맙네. 아, 그러고 보니 자네."

"응?"

"슬슬 피임 마법을 다시 걸 때가 됐구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가?"

"음. 기다리게. 이 몸이 다시 걸어주겠네."

디아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한 손을 아래로 내려서 내 물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왔다.

"…저기. 디아나. 원래 피임 마법이란 게 그렇게 쓰다듬을 필요가 있었던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경험해왔지만, 매번 그냥 만져서 마법 걸고 끝이었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는 이 누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으면 된다네."

하지만 디아나는 역시 평소보다 조금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날 내려다봤다.

아까 했던 말 정정하자. 이 녀석, 전혀 포기하지 않았어.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번 화 후기에 못 썼네요.

영상에 대한 얘기가 생각보다 좀 길어져서 그냥 소제목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다음 파트가 레이첼 파트가 되겠습니다.

그래도 2, 3화 이내에 다음 파트로 넘어가니 안심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