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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72화 (45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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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급효과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바로 마틸다의 방이었다.

    레이아가 저기 있다는 얘기는 즉, 마틸다는 어디 나간 게 아니라는 말이니까 말이다.

    설마하니 마틸다가 혼자서 밖에 나갔을 리도 없고.

    "마틸다 들어간다."

    고로 나는 노크를 하자마자 바로 방에 들어갔다.

    그러자 어머나 세상에. 마틸다가 또 다시 반라의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 던전에서 돌아온 직후라 힘들었는지, 아침에는 비교적 간단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추기경복이라는 거, 일반 사제복보다 장식이 주렁주렁 달려있어서 입기 귀찮을 것 같으니 이해는 한다.

    그 차림으로 던전을 다니고 있다는 게 존경스러울 정도로.

    "꺄악! 또 당신인가요?! 그러니까 노크를 하면 대답을 듣고 들어오라고요?! 뭘 위해서 노크를 하는 건데요?!"

    "…매너 있는 척을 하기 위해서?"

    "척이 아니라 매너 있게 행동하세요! 애초에 이래선 척 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잖아요…그러니까 왜 계속 들어오시는 건데요?!"

    "왜라니. …내용은 전과 같습니다."

    "생략하지 마세요! 제대로 말하라고요! 그리고 안 할 거니까요!"

    "뭐? 저주를 안 푼다고? 설마 저주가 풀리면 날 좋아하는 감정도 사라질까 두려워 아예 저주를 안 풀기로…."

    "아, 아니거든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럴 리 없잖아요! 지금도 저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저주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거라고요!"

    "아, 응. 그렇네. 미안. 방금 건 말이 좀 심했다."

    "하아…정말로. 당신 무슨 일 있어요? 평소에도 이상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이상한데요?"

    미안. 실은 레이첼 누님 때문에 조금 심란해서 억지로 밝은 척을…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미안. 심심해서 그래. 좀 놀아줘."

    "당신은 몇 살 먹은 애인가요…. 하아. 지금은 안 돼요."

    "그러고 보니 저주 풀기도 안 한다고 했지. 갈아입는 중이기도 하고. 혼자서 어디 나가려고?"

    "그럴 리가 있나요. 레이아씨와 함께 신전에 가기로 했어요."

    레이아는 사라와 디아나랑 있으니까 당연히 틀린 줄 알았던 내 첫 예상은 아무래도 정확히 적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레이아랑?"

    "네. 왜 그러시죠?"

    …으음. 아마 레이아는 사라와 디아나에게 성벽을 고백하는 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아마 고백하고 금방 준비해서 마틸다와 신전에 가려는 생각이었겠지.

    레이아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허투루 여기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아까 전 사라와 디아나의 모습을 봐서는, 레이아를 쉽게 놔줄 것 같지가 않았는데.

    있지도 않은 비법을 레이아에게서 캐내지 않는 이상은 하루 종일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모습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여긴 레이아의 남자로서 내 여자의 일을 대신 처리해줘야겠지.

    뭐, 마틸다조차도 안 되면 진짜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니 그런 점도 있지만.

    "아니. 레이아는 갑자기 볼 일이 좀 생긴 모양이더라고."

    "네? 그런가요?"

    "응. 그러니까 내가 대신 가줄게. 어차피 영상에 관한 얘기도 좀 들어두고 싶었고."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응. 빨리 준비해."

    "……."

    얘기를 마친 나는 레이아를 도와준 스스로의 대견한 행동에 흡족해하면서 기다렸지만, 마틸다는 계속해서 날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옷을 입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그 얼굴을 바라봤지만, 핑크빛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뭐해? 안 입고."

    "…좀 나가시죠?"

    "입기 힘들어 보이는 옷인데 좀 도와줄까?"

    "나. 가. 시. 죠! 정말! 당신 설마 일부러 제가 갈아입을 때만 노려서 들어오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며 노려보는 마틸다에게, 나는 오히려 당당하게 다가가며 말했다.

    다른 애들 상대였으면 필사적으로 부정했겠지만, 굳이 마틸다 상대로 그럴 필요는 없지.

    오히려 부정하는 게 더 귀찮아질 거다.

    "네, 넷? 뭐, 뭐라고요?"

    "네. 예쁜 몸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싫어?"

    "시, 싫지…싫지 않아요…."

    "나 계속 여기 있어도 돼지?"

    "네에…."

    봤지? 이쪽이 해결이 더 빠르다니까.

    게다가 타이밍 노려서 일부러 들어왔다는 것만 빼면, 거짓말도 아니고.

    마틸다의 예쁜 몸을 보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것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안 나가고 이렇게 마틸다가 옷 입는 모습을 차분히 관찰하고 있지.

    하지만 언제 봐도 몸매가 끝내준다니까.

    다른 애들에 비해서 뭔가 특징적인 면은 없지만, 그만큼 밸런스가 확실히 잡혀있는 몸매다.

    이런 몸을 펑퍼짐한 추기경 복으로 가려놓고 있다는 것이 죄악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뭐, 아무리 그래도 추기경 복을 맘대로 개조할 정도의 배짱은 없지만.

    "…당신 말이죠. 제 저주를 이용하는 건 그만둬 주시겠어요?"

    신전에 가는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도 꽤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핑크빛 모드가 풀린 마틸다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고는 그렇게 말했다.

    "응? 무슨 소리야? 이용한 적 없는데?"

    "시치미를 떼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뻔뻔하잖아요?! 방금 전 일이라고! 방금 전!"

    "아니. 진짜로 이용한 적 없어. 저주는."

    "저주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그도 그럴게. 너 저주 아니라도 날 좋아한다면서. 아냐?"

    그래.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행동한 거다.

    아무리 나라도 마틸다의 저주를 알몸 보는데 사용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하지만 마틸다가 날 좋아한다면 얘기는 다르지.

    난 마틸다의 저주를 이용한 게 아니라, 마틸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한 거다!

    …이렇게 말하니까 왠지 더 쓰레기 같잖아.

    아니. 아니니까. 그런 뜻이 아니니까.

    내말은 그러니까, 어차피 마틸다가 진짜로 날 좋아하는 거면, 나도 아마 그때는 마틸다를….

    우리 애들과의 의리를 위해서라도 정말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여자와 그런 관계가 되는 건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실비아와 마틸다만큼은 이미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알몸 정도는 봐도 괜찮잖아? 라는 뜻이다.

    게다가 어차피 볼 거 못 볼 거 전부 본 사인데 뭐.

    "그, 그건…네에…좋아해요…."

    …논리적으로 설득할 셈이었는데 다시 혼자서 핑크빛 모드가 되어버린 마틸다였다.

    뭐, 이해해준 것 같으니 됐나.

    "그럼 전 교황님과 얘기를 나누고 오도록 하죠. 당신은 소피아 대사제와 함께 있을 거죠?"

    신전에 도착하고 나서, 마틸다는 곧장 교황과 대화부터 나눌 생각인지 혼자 다른 길로 빠지려고 했다.

    "응. 하지만 같이 안 가도 괜찮아?"

    "괜찮아요. 통신마법진이 설치된 곳은 신전 안에서도 특히 가장 깊은 곳에 있으니까요. 다른 남성분들은 안 계실 거예요. 아, 하지만 교황님이 당신을…."

    "그럼 소피아 대사제가 계신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도망치듯 황급히 마틸다와 헤어졌다.

    아니. 교황님이 싫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통신 마법 너머로 딱 한  번 본 게 전부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따뜻해 보이는 분이셨고, 영상을 허가해주신 걸 보면 머리도 굳지 않으신 좋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역시 위치가 위치니만큼 조금 부담되는 건 어쩔 수 없단 말이지.

    세계 최고의 마법사 디아나나 공주님인 펠리시아도 막 대하면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둘의 경우와는 얘기가 전혀 다르다.

    그도 그럴게, 외모가 완전히 할머니라고?

    이 세계에서 레벨이 높으면서 외모가 정말로 노인인 사람은 처음 봤다.

    그렇기 때문인지, 연륜에서 오는 묘한 위압감 같은 게 느껴진단 말이지.

    게다가 날 여신님의 사자로 인정까지 했다고 하잖아.

    그런 위치에서 교황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뭔가 내가 교단의 높으신 분이 된 것 같아서 뭔가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아니. 일단 높으신 분이 맞기는 한 거겠지만.

    전에 마틸다가 말한 대로, 나는 내 위치를 확실히 자각하지 못하고 행동한 감이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내가 그렇게 높으신 분이라고 하면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그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하거나 책무를  지거나 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조금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마틸다와 헤어진 나는, 곧장 소피아 대사제에게 향하…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소피아 대사제에게는 아까 말한 대로 영상에 대한 평가를 물어볼 셈이었지만, 그 전에 내가 먼저 현장의 분위기를 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발걸음을 돌려서 일단 예배당 쪽에 가보기로 했다.

    전에 겪었던 바에 따르면, 신자들은 일단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육장으로 향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예배당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선 순간, 나는 영상이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지 자연히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배를 온 신자들이 엄청나게 많았던 거다.

    언제나 신전은 붐볐지만, 오늘은 특히 굉장했다.

    복도부터 출퇴근길의 만원 지하철이 생각날 정도로 빡빡하게 사람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고, 까치발을 들고 바라 본 예배당은 그 넓은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신자들이 빽빽이 들어차있었던 거다.

    덕분에 나도 복도에 발을 디디자마자 사람들의 물결에 그대로 휩쓸리고 말았다.

    "저, 저기…호, 혹시…성자님이십니까?"

    내가 끊임없이 밀려드는 인파에 질려하고 있었을 때, 옆에서 나와 같이 인파에 휩쓸리고 있었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마 대 용모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지만, 옷이 평범한 천 옷이다 보니 확신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그런데요."

    전 같았으면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겠지만, 오늘은 한 번 순순히 인정해봤다.

    뭐라고 말할지 신경도 쓰이고 말이다.

    "서, 성자님이다아아!"

    그리고 그 순간, 내 주변 반경 2미터 이내에 사람이 사라졌다.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남자들은 발끝으로 서서 조금이라도 내게 멀어지려고 필사적으로 등으로 뒷사람을 누르고 있었다.

    아마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있으니 2미터 정도로 끝났지, 그게 아니었으면 10미터 정도는 멀어졌을 기세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자님 덕분에 어젯밤 처음으로 그 마누라를…!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남자들은 내게 고개를 숙여가며 필사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나랑 비교당하고 싶지 않아서 멀어진 것과는 별개로, 일단 고맙기는 한 모양이다.

    "아뇨.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하핫. 그리고 감사는 여신님께 드려야죠. 전 그 분께서 주신 힘을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떨어져서 감사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니 엄청나게 미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정치인처럼 손을 들어서 감사 인사를 받아줬다.

    이렇게 말하는 거 맞겠지? 일단 성자란 위치답게 그럴듯한 말을 해봤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했다.

    역시 난 이런 거랑 안 어울린다니까.

    …뭐, 어쨌든 이걸로 영상의 효과는 확인했다. 이제 그만 소피아 대사제한테 가자.

    나는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는 천천히 왔던 길을 역주행했다.

    그리고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빽빽이 들어차있던 사람의 물결이 그대로 갈라져 나갔다.

    그야 말로 모세의…아니. 구원의 기적.

    손에 지팡이라도 있었다면 땅을 찍으면서 ‘갈라져라!’라고 외쳐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모처럼 성자다운 이미지를 남겼는데 그랬다가는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니 안 하는 게 좋겠지만.

    예배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빠져나와 사제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도, 날 향하는 시선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까보다는 훨씬 시선이 조금 느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다다.

    가는 곳마다 사제들이 날 바라보면서 뭔가 쑥덕이고 있었던 거다.

    "꺄아아악!"

    여럿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는 사제들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사제의 입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과 눈이라도 마주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영상은 사제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 모양이다.

    뭐, 그야 그런가. 교육장에서 틀어준다는 건, 다시 말해 사제들도 같이 본다는 얘기니까.

    뭐, 기분 나쁜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 같았으면 으쓱해졌을 시선이었다.

    여기 사제들은 특히 미인들이 많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레이첼 누님 때문에 속이 쓰린데, 또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날 향해 호의를 보내온다고 생각하니….

    얼른 소피아 대사제한테 가자.

    "소피아 대사제님. 저 왔…우왓."

    "죄, 죄송합니다!"

    내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웬 사제가 한 명 황급히 튀어나와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쪼르르 사라졌다.

    …뭐야 저거?

    "어머. 어서오세요. 성자님."

    그리고 안에서 소피아 대사제가 날 따뜻한 미소로 맞아줬다.

    처음 봤을 때의 깐깐한 인상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천지차이의 미소였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설마 3연참은 예상 못했겠지?

    실은 레이첼 파트라고 말해놨는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레이첼의 등장이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한 편 더 써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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