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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68화 (45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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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바뀐 관계

    …레이첼 누님은 오늘도 기분이 무척이나 좋으시구나.

    이젠 뭐라고 할까…‘난 언제든 네 고백을 받을 준비가 됐으니까, 어서 대시해! 어서!’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누님, 저에 대한 호감도가 그렇게 높았던가요?

    한 번 눈치 채고 나니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데, 난 왜 그동안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

    생각해 보면 식사하러 가기 전에 쇼핑한 것도 완전히 데이트였다.

    그걸 눈치 못 채다니…내가 얼마나 우리 애들 이외에는 연애 대상으로 생각 안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니. 지금도 우리 애들 이외에는 연애 대상으로 생각 안 하지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난 신난 레이첼 누님의 태도에 애매모호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핫. 뭐, 그, 그렇죠?"

    "…역시 아니군요. 아, 아핫. 하긴 그렇죠? 알고 있어요. 그럴 리 없다는 거."

    아, 들켰다. 레이첼 누님은 살짝, 스쳐지나가듯 아주 살짝 쓸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조금…아니 많이 가슴이 죄이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금의 나로선 그런 레이첼 누님을 달래줄 수 있는 수단도 자격도 없었다.

    "사실 조금 진행이 막혀서 일찍 돌아왔어요. 장비를 정비할 필요가 있어 보여서요."

    "네? 하지만 구원씨는…아, 설마…!"

    "네. 뭐어…. 그래도 보고는 나중에 할게요. 제일 먼저 찾았으니까 조금 특권을 누려보려고요."

    "아, 네. 그러세요."

    "어라? 의외로 간단히 승낙하시네요. 길드로선 괜찮은 건가요?"

    레이첼 누님의 뭔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승낙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런 질문을 던졌다.

    길드로서는 얼른 우리가 얼음 동굴을 공개해서 많은 모험가들의 성장의 발판을 더 마련하는 게 좋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길드가 공개를 강요할 정도의 권한은 없지만, 적어도 설득 정도는 해올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네. 길드 입장으론 물론 빨리 공개해주시는 게 좋지만요."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아까 같은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원래는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지만…후훗. 구원씨니까 특별히 넘어가드릴게요. 저한테 빚 한 번 진 거예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레이첼 누님은 전혀 그런 분위기조차 풍기지 않고 쉽게 긍정해버렸다.

    …이 반응. 설마 내가 그럴 맘이 없다는 걸 눈치 채신 건가?

    하긴. 그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티를 냈으니까. 누님이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아니. 어쩌면 지금 눈치 챈 게 아닌지도 모른다.

    아까 전의 첫 인사, 생각해보면 너무 노골적이었다.

    어쩌면 레이첼 누님도 마지막으로 확인 차 그런 태도를 취해본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가 애매한 대답을 하자마자 역시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고.

    그렇다면….

    스스로 초래한 일이면서, 막상 누님이 눈치챘다고 생각하자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나였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마석 정산도 나중에 한꺼번에 할 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결국 레이첼 누님과 헤어질 때까지 살짝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게 된 나였다.

    누님의 화를 푼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그야 화났을 때만큼 냉랭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아니.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게 더 안 좋은 걸지도 모른다.

    영원히 이렇게 어색한 태도를 지속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뭔가, 쉽지 않네.

    차라리 누님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 텐데.

    이거야 말로 인기남의 비애라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길드를 뒤로했다.

    이런 기분일 때는 차라리 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게 기분이 나아질 수도 있는 법이다.

    길드를 나온 나는 곧장 한나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물론 얼음 동굴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리 오너라."

    "네. 어서 오세…우왓! 서, 성자님?!"

    그리고 안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나는 그 정체를 들켜버렸다.

    저 멍청한 요한 녀석. 내가 대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있는데.

    "야! 너 진짜 오냐오냐하니까!"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오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방금 일부러 성자라고 외쳤지?!"

    "그, 그게 아니라! 이제 괜찮아요!"

    "뭐?! 뭐가 괜…아, 설마."

    나는 황급히 주을 둘러봤다.

    확실히 내가 성자라는 말을 듣고 다들 이쪽에 시선을 보낸 채 술렁이고 있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내게 다가오려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이곳의 손님의 대부분은 모험가들이다.

    실제로 지금 있는 손님은 나를 제외하곤 전부 여자였고.

    그러니 달려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건 이상했다.

    내가 살며시 로브를 벗어보자, 날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말이야.

    뭔가 미지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 나는 황급히 요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방금까지 던전에 있다가 와서 그런데. 설명 좀 해줄 수 있냐? 아니. 그 전에 좀 숨겨줘."

    "앗, 네, 넷! 이쪽이에요!"

    요한은 날 데리고 공방 쪽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신전 쪽에서 이번에 새롭게 영상 교육을 실시하게 되어서요. 그게 무척이나 인기를 끌고 지금 급속도로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라…."

    "즉, 효과는 있었다고."

    "네! 저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본 사람들의 입에서는 전부 성자님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어요!"

    "후훗. 그렇겠지. 그렇겠지! …응? 그럼 아까 그 시선들은 뭐야?"

    "그게…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도 지금 소문이 돌고 있는 중이라…."

    "소문? 무슨 소문?"

    "그, 그러니까…성자님이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굉장하다는 소문이요."

    그렇게 말하면서, 요한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정확히는 내 고간 쪽으로.

    "…아니아니아니. 언제 봤다고 소문이 나?! 영상에 나온 거 나 아니거든?!"

    내가 뭣 때문에 털까지 밀었는데!

    요즘 다시 자라나기 시작해서 따끔따끔하단 말이다!

    "네에?! 성자님 본인이 아니신 건가요?!"

    "당연하잖아! 영상 제일 처음에 나오잖아! 성자님의 조언을 들은 모험가가 실연하는 거라고!"

    "아뇨. 전 직접 본 게 아니라 거기까지는…하, 하지만 다들 그 크기는 성자님이 아니면 불가능할 거라고…."

    "뭣이?!"

    "같이 찍은 여성분이 성자님 곁에 계시는 여성분들과 체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상의 남성도 성자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소수 있었지만요."

    "정확하잖아! 왜 걔들 주장이 묻힌 건데?!"

    "위대하신 성자님께 질투하는 꼴사나운 무리라는 이유로요."

    …진짜냐. 아니. 존경해주는 건 그래. 응. 뭐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방향성이 너무 심각하게 엇나갔잖아.

    "그러니까 저 밖의 여자들은, 내 대물을 탐내고 눈을 빛냈다 이 말이지? 아니. 영상에 나온 건 내가 아니지만."

    "네. 아, 아마도…그렇지 않을까요?"

    그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들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던 건 그 때문이었군.

    원래 세계에서 AV여배우가 느끼는 시선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아니. 이 세계는 성적으로 훨씬 개방된 세계인만큼, 조금 느낌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여성 모험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남자, 즉 인기스타에 더 가까운 느낌인가?

    설마 레이첼 누님이 날 대하는 태도가 조금 이상했던 것도…아니. 그건 너무 희망적인 관측인가.

    뭐, 누님도 일단 소식을 들어서 알고는 계셨겠지만.

    아무튼 이래선 다른 의미로 얼굴을 내놓고 다닐 수가 없잖아.

    그럼 굳이 영상을 찍은 의미가…아니.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 오히려 영상의 남자가 나라고 티를 내는 꼴인가.

    차라리 당당해지자. 얼굴에 철판을 깔고 주장하는 거야. 영상에 나온 건 내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분명 언젠가는 날 향해 쏠리는 시선도 점점 줄어들 거다.

    …줄어들겠지?

    "…뭐, 좋아. 아무튼 오늘은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온 거였으니까. 한나 좀 불러와봐."

    나는 결국 더 깊이 생각하길 포기하고 원래 용무나 마치기로 했다.

    "과연. 그런 구조로 말이지…."

    "그래. 어때? 만들 수 있겠어?"

    내가 한나에게 한 요구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원래 있던 세계의 등산용품 중 하나인 아이젠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거다.

    그냥 아예 신발의 바닥 부분에 뾰족뾰족한 철을 박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또 얼음 동굴을 나와서 평지를 걸을 때 곤란해질 우려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아이젠이다.

    "당연하지, 하지만 구조는 간단하더라도 값이 꽤나 나가겠는데. 3계층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파손되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야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적어도 3계층을 다니는 모험가들이 입고 다니는 방어구 수준으로 튼튼하게 만들지 않으면…."

    "아니. 이왕이면 4계층에서 사용되는 방어구를 기준으로 더 튼튼하게 만들어줘."

    "뭐? 4계층은 온통 물로 덮인 곳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장비가 필요한 건가?"

    "그거야. 뭐, 영업비밀이란 걸로."

    "과연. 모험에 나설 때마다 차례차례 신발견을 해대는 성자님다우시군. 알았어. 그런 거라면 더 이상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겠어."

    "땡큐. 그래서 파티원당 각각 두 개씩, 그러니까 12개를 만드는데 얼마나 걸릴까?"

    "그렇군. 일단 재료만 좋은 걸 쓰면 구조 자체는 간단하니까…모레, 아니. 내일 밤이면 끝나겠어."

    "좋아. 그럼 그 이후에 찾으러 올게. 부탁해."

    "그래."

    내가 한 번 도움을 준 이후로 점점 실력이 늘어나고 있는 한나는, 아이젠 제작을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게다가 만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라는 게 더욱 맘에 들었다.

    이번에는 던전에 며칠 안 있었던 만큼, 다음 던전행은 좀 더 빨리 가고 싶으니까 말이다.

    얼음 동굴을 빨리 답파하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도와줄 당시에는 짜증났지만, 이렇게 한 번 도와주고 나니까 이제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준 한나였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덕을 쌓고 살아야 된다니까.

    흡족한 마음으로 대장간을 나선 나는, 곧바로 무수히 많은 시선을 느끼게 됐다.

    이 시선은…거리의 남자들이 내게 도움을 구걸하던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선.

    솔직히 말해서 엄청 부담스럽다.

    아니. 실은 요한과 한나를 도와준 게 소문이 나기 전부터 날 향한 시선을 많았다.

    매력 수치가 올라감에 따라 나도 이제 절세 미남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까지 잘생겨졌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에는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조차도 부담스러운 시선이 사방에서 날아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처럼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까.

    아니. 다가오기는커녕 오히려 피하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특히 남자들 중심으로 내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자들은 그렇지만도 아닌 듯 눈을 빛내면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과연.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여자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 거고, 남자는 존경과 경외심이 들면서도 한 편으론 괜히 다가갔다가 비교되기 싫어서 피하는 거다.

    영상 찍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효과 죽이네.

    이러다가 영상의 소문이 더 퍼지면 나랑 한 번 자보겠다고 달려드는 여자마저 생기는 거 아냐?

    아니. 영상의 남성은 내가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아까 정한 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피곤하다."

    뭐, 결국 저택에 돌아올 때 즈음에는 완전히 피곤해져 버렸지만 말이다.

    아니. 지나갈 때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날 쳐다보더라고.

    자의식과잉이 되는 사춘기 때도 이정도로 남의 시선이 자신한테 몰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더러운 남정네들이 달라붙지 않으니 좋으신 거 아닙니까?"

    "다녀왔습니다. 넌 또 내가 그런 말 쓰는 건 누구한테 들었냐."

    아니. 그보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냐?

    사람 마음을 맘대로 읽지 말라고.

    피곤하단 한 마디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데?

    슈퍼 집사의 패시브 같은 거냐?

    "다녀오셨습니까."

    아니. 대답을 하라고. 인사는 내가 하기 전에 먼저 하고.

    대문 앞까지 마중 나와 있으면서 왜 인사는 뒷전인건데.

    바넷사 얘는 날 대하는 태도가 갈수록 삐딱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뭐, 그만큼 친해진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말이야.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타르백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누굴지? // 자세히 보시면 레벨이 아니라 직업 레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레벨은 성교를 통해 오르지만, 직업 레벨은 직업에 관한 행동을 해야 오르죠. 실비아나 마틸다는 레벨뿐 아니라 직업 레벨도 높다고 언젠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Demodex // 3계층이 맞습니다. 1.5계층은 1계층에 입구가 있었고, 2.5계층은 2계층에 입구가 있었죠. 일행들은 페이크 보스가 지키고 있는 다음 계층으로의 출구를 찾는 게 아닌, 이전 계층에서 연결된 입구를 찾고 있는 거였습니다. 3.5계층에는 정식 루트라고 볼 수 있는 3계층이 아니라 2.5계층에서 숨겨진 루트를 통해 들어왔고, 보스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서 보스를  잡고 4계층에 가는 것보다는 3계층이 훨씬 가깝고 빠를 테니까요. 그래서 성기로 통로를 여는 과정이 필요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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