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59화 (443/1,205)
  • 459====================

    기로

    "…아까 필요에 의한 행위만 허락하겠다고 이 몸이 말하지 않았나."

    "응. 그랬지."

    "…자네가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느낄 정도라면, 그 역시도 필요에 의한 행위라고 인정하겠네."

    조금 뜸을 들이던 디아나는, 정말 본의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뭐?"

    "하아…. 실비아양의 경우가 그런 게지?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네가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말일세."

    "하지만 그…정말로?"

    디아나의 대답은, 내가 원하던 가장 이상적인 대답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재차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저희도 사실 그런 상황이 오는 게 달갑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런 때가 온다면…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괴로워하는 구원씨를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허락해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 저희가 내린 결론이에요."

    그리고 레이아는 언젠가 한 번 들은 적 있었던 말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대답을 해줬다.

    "너희들…."

    그 답변을 듣고, 난 얘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다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낮져밤이 같은 문제 이전에, 이제 얘들을 평생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구원이 우는 거야. 울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바보야."

    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얼굴을 살며시 끌어안아줬다.

    "말해두지만, 허락받았다고 해서 이 여자도 좋고 저 여자도 좋다는 식으로 아무 여자한테나 막 손 뻗고 다니면 용서 안 할 거야. 구원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기 때문에 그런 조건으로 허락한 거니까. 우리의 믿음, 절대 배신하면 안 돼?"

    "그래.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식으로 허락을 받고 나니 오히려 다른 여자들에게 그런 감정이 생길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얘들을 두고 내가 미쳤다고 그런 생각을 하겠어?

    만약 이걸 노리고 허락해준 거라면 얘들은 진짜 엄청난 책사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어서 자네가 다른 아녀자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아까 자네가 말한 것처럼 다른 아녀자들의 위치는 첩일세. 본처 자리는 이 몸의 것일세.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하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디아나가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당연한 소리다. 애초에 그 첩이라는 자리도 실비아 이외에는 만들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 당연…."

    "잠깐만요. 디아나! 지금 은근슬쩍 본처는 자기 것이라고 했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고 했을 때, 사라가 갑자기 디아나의 말을 걸고 넘어졌다.

    "그, 그랬었나? 이 몸은 이 몸들이라고 했던 것 같네만…."

    "얼버무리려고 하지 마요! 확실히 이 몸이라고 말했어요!"

    일단 얼버무리려고 해봤던 디아나였지만, 당연히 사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에, 에잇!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자네는 조금 연장자를 우대하려는 마음은 없는 겐가!"

    그러자 디아나는 이번엔 정색하고 본처 자리를 주장하기로 노선을 변경한 모양이었다.

    디아나…너 평소엔 나이 얘기하는 걸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아니. 뭐, 내 본처가 되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그러는 건 참 고맙고 행복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야.

    "연장자 우대도 할 게 있고 안 할게 있죠!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 못해요!"

    결국, 여느 때처럼 또 다시 사라와 디아나간의 말싸움이 시작됐다.

    쟤들은 이럴 때마저…덕분에 방금 전까지 꼴사납게 흘러나오던 눈물은 들어갔지만 말이야.

    "두 분은 정말로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리고 사라와 디아나가 설전을 벌이는 사이에, 조용히 내게로 다가온 레이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이아는 둘이 싸울 때마다 항상 이렇게 얘기하더라.

    전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싸울수록 사이가 좋다는 거다.

    아니. 애초에 진심으로 싸우고 있기는 한 걸까?

    말로는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지만, 주먹질이 오가거나 할 일은 전혀 없어 보이고.

    어쩌면 내가 우는 걸 보고 진정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눈물이 그치기도 했고 말이다.

    "구원씨. 저 정말로 믿을 테니까요."

    조금 흐뭇한 심정으로 둘이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옆에서 레이아가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내 손을 양손으로 포개듯이 꼬옥 잡았다.

    여느 때와 다르게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레이아 역시도 이번 결정만큼은 쉽사리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던 모양이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니, 이런 식으로 재차 확인을 하는 거겠지.

    "그래. 하렘이다 뭐다 떠들어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믿음직스럽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믿어줘. 절대 너희가 슬퍼할 짓은 하지 않을게."

    "믿음직스럽지 않다니…아니에요. 전 언제나 구원씨를 믿어요."

    레이아는 내 손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꼬옥 주더니, 살며시 자신의 가슴골에 파묻듯 끌어안았다.

    평소에도 레이아가 습관처럼 자주하는 행동이지만, 나는 스스로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까 얘들의 마음씨에 감동받고 울기까지 해서 그런 걸까?

    새삼 레이아가 엄청나게 예뻐 보였다.

    아니. 원래도 엄청나게 예뻤지만 말이야.

    "하핫. 그런 것 치고는 아까 전 반응이 굉장했지만 말이야. 실비아 마틸다 말고도 다른 여자가 더 있는 거 아니냐니."

    그래서 나는 쿵쾅쿵쾅 시끄럽게 맥동치는 스스로의 고동소리를 숨기듯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아깐 진짜로 무서웠다.

    눈에 생기가 사라진 레이아라니.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그렇게 된 것도 나 때문이다. 내가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그, 그건…어쩔 수 없잖아요. 조금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는 걸요…."

    레이아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살포시 붉히면서도, 내게도 잘못이 있다는 듯 곱게 눈을 흘겼다.

    "뭐? 누구?"

    "그야 이제부터 관계를 지속해나가실 공주님도 계시고…."

    "펠리시아? 아냐아냐. 아무리 그래도 걘 아냐. 절대 그럴 일 없어."

    나 자신의 감정도 그렇고, 펠리시아 역시도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황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펠리시아랑 그런 관계가 될 리가.

    "거기에 레이첼씨도…."

    내가 웃으면서 부정하자, 레이아가 레이첼 누님의 이름을 언급했다.

    …응? 레이첼 누님? 아, 과연. 식당에서 그건가. 확실히 그때 일은 레이아만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레이첼 누님 역시 나랑 그런 관계가 될 리가 없잖아.

    일단 레이첼 누님은 지금 나한테 엄청 화가 난…어? 어라? 어? 아니. 잠깐만.

    레이첼 누님이 화를 냈던 게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였지?

    꽤나 시간이 흘러서 내 기억이 확실한지 어떤지 자신은 없었지만, 아마…아니. 그래도 그 레이첼 누님이 날? 난 한 번 차인 전적까지 있는데?

    뭔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만 계속하다보니까 사고가 계속 그쪽 관련으로 흘러가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레이첼 누님이 그런 건지.

    "…구원씨?"

    "어, 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슬슬 쟤들 말려야겠다."

    나는 스스로 생각해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듯 가볍게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서, 사라와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너희가 무슨 애도 아니고. 뭘 그런 걸로 싸우고 그러냐. 그냥 둘이 사이좋게 내…."

    "구원은 빠져있어. 자기야 말로 방금 전까지 애처럼 질질 짜고 있었으면서."

    아마 시작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말싸움을 하는 도중에 과열된 모양이다.

    사라는 조금 흥분한 모습으로 날 힐끔 보며 그렇게 내뱉었다.

    덕분에 중재를 위해 다가갔던 나는 본전도 못 찾고 다시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사라야. 넌 가끔 말이 너무 묵직하게 꽂히더라. 설마 그것도 용사의 힘이니?

    용사는 신체적인 싸움뿐만 아니라 말싸움도 잘 하는 직업이었어?

    저런 사라와 일일이 말싸움 상대를 하고 있는 디아나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과연. 대마법사. 말로는 안 진다 이건가.

    "그, 그러니까 이 몸도…! 이 몸도오…!"

    아, 지금 보니까 살짝 울려고 하네.

    역시 대마법사라도 안 되는구나. 응. 충분히 이해한다. 저 사라는 누구도 못 이겨.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디아나가 항상 가지고 놀아서 사라가 분해했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 이렇게 성장해서는…진짜 용사 레벨 올라서 말싸움도 세진 거 아냐?

    혹시 전에 노출 플레이를 폭로했던 것도 설마 지금처럼 궁지에 몰려서 그런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너무 심한 감이 없잖아 있는데?

    둘이 말싸움하는 모습은 꽤나 많이 봤던 나지만, 사라가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만 하라니까. 둘 다 내 본처야. 난 너희 둘이랑…아니 셋과 동시에 결혼할 거라고."

    아무튼 디아나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나는 계속 가만히 찌그러져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둘 사이에 파고들었다.

    "겨, 결, 결호…!"

    "자, 자네에에엥…!"

    내가 결혼이란 얘기까지 꺼내자, 완전히 전투 태세였던 사라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깐 그렇게 쏘아붙였던 사라였지만, 결국 디아나와 싸우는 이유도 조금이라도 내게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거였으니까 말이야.

    내 말이 효과가 없을 리가 없다.

    "그래. 그러니까 그만 싸워."

    나는 내 품에 달려들어서 옷에 얼굴을 문지르는 디아나의 등을 다독여주며 말했다.

    디아나 얘, 결혼이란 말에 감동해서 안긴 척 하고 있지만, 절대 그런 이유만으로 안긴 거 아니지?

    얼굴이 닿은 부분의 옷이 조금 축축해지고 있다고.

    "읏…디, 디아나. 미안해요. 그리고 구원도."

    그리고 완전히 쿨 다운한 사라는, 그제야 자기가 얼마나 날카롭게 말했었는지 깨달은 듯 사과를 해왔다.

    저 모습을 보니, 역시나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공격적이었던 게 맞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 원인은 분명 나 때문이겠지.

    "아니. 나한텐 사과할 거 없어. 애초에 나 때문에 열 받아서 그렇게 된 거지? 이해해."

    "이, 이 몸도 괜찮네. 연장자로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겠네. 흐, 흠! 그런 의미에서 역시 본처 자리는 이 몸이 제일 어울리는구므어어언!"

    내 옷에서 겨우 얼굴을 뗀 디아나는, 조금 빨개진 눈을 하고서도 가슴을 쭉 편 채 그렇게 말했다.

    얘는 그렇게 당하고도 끝까지 안 지려고 하네. 과연 대마법사님. 끈기만은 인정해주마.

    "그만하라니까."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말싸움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나는 디아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으아아! 그만, 그만하게에! 어지럽네에에!"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디아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흐뭇한 감상에 빠졌다.

    마지막엔 언제나처럼 이런 분위기로 끝나버렸지만, 오늘 얘들의 마음 씀씀이는 아마 난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잊어서도 안 되고 말이다.

    진짜로 앞으로 평생 극진히 모시고 살게.

    …밤에는 조금 장난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애교로 봐줘.

    다른 여자와의 관계도, 허락받았다고 해서 함부로 감정을 가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런 따뜻한 감상을,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와 함께 얘들에게 전했다.

    내 눈을 마주보는 사라나 레이아, 그리고 내 손에 머리를 잡혀있는 디아나에게도 이 마음은 분명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구원씨?"

    나와 따뜻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던 레이아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뭔가 주저하는 것같은 저 분위기. 새삼 다시 사랑한다는 말이라고 할 셈인 걸까?

    그렇다면 먼저 말하게 둘 순 없지.

    "응. 레이아. 정말로 사랑해."

    나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서 레이아에게 말했다.

    이 감정을 이런 짧은 말로밖에 전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네에…저도 정말 사랑해요. 하, 하지만 저기, 그게 아니라…."

    레이아는 살포시 얼굴을 붉히고 대답해줬지만, 곧바로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주저하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응? 뭔데? 주저하지 말고 말해봐."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아가 하는 말이라면…아니. 이 셋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

    내 그런 억지도 들어준 애들인데 무슨 말이라고 못 들어주겠어.

    "그…슬슬 놔주시지 않으면 디아나씨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