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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52화 (43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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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공주가 하는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니. 굳이 일반적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 애들을 생각하면 공주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나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과 섹스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고, 그 많은 사람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일이 전부 품고 가는 건 우리 애들한테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역시 현재 애인들을 제외한 사람과의 섹스는 특별한 감정을 안 가는 게 좋다고 생각됐다.

    논리적으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실비아는? 실비아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

    애인 관계가 아니라고 해서, 실비아와의 섹스에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게 가능할까?

    실비아가 날 좋아하는 건 명백하고, 나 역시 실비아에게 끌리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재 애인들을 제외한 사람과의 섹스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건, 실비아와의 행위조차 그래야 된다는 거다.

    그런 거, 이제 와서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실비아만 예외로 쳐?

    딱 실비아까지만 감정을 가지고, 그 외의 섹스는 감정을 가지지 않고 의무감으로만 해?

    백 보 양보해서 그렇게 한다고 치자.

    그럼 마틸다는?

    만약 저주가 풀리고 나서 그러고도 계속 마틸다가 날 좋아한다고 한다면, 과연 나는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을까?

    일이 이렇게 되자, 마틸다에 대한 감정 또한 막연히 얼버무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틸다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얘가 진심으로 날 좋아하는 건지 저주 때문에 날 좋아하는 건지 혼란스러워 하는 나다.

    만약 마틸다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면, 애초에 혼란스러워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마틸다가 진심이든 아니든, 내게 아무런 감정 없으면 그걸로 끝인 문제니까 말이다.

    즉, 난 마틸다에게도 어느 정도 감정이 있다는 거다.

    그럼 마틸다가 저주가 풀리고도 날 좋아하면, 그때도 마틸다는 예외로 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나하나 예외로 치다가는 끝도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딱 잘라서 현재 애인 셋 이외와 하는 섹스는 감정을 가지지 않거나, 아니면 전부 받아들여 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못 고르겠다.

    내가 이렇게 우유부단한 놈이었다니.

    난 스스로도 생각 없이 막 사는 타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니.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전자를 선택하는 게 맞지만 말이야.

    애초에 사랑이 없는 섹스라니.

    정말 그런 걸 하는 게 옳은 걸까?

    원래 있던 세계보다 섹스에 대해 훨씬 관대한 이 세계에도 역시 섹스는 사랑이 기반이 되는 행위다.

    신전도 되도록 사랑이 있는 섹스를 하도록 권장하고 있고 말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여신님이 사랑이 있는 섹스를 권장하는 건 분명했다.

    내겐 사도 임명이라는, 상대와의 사랑이 조건이 되는 스킬마저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사도 임명은…그래. 이제 와서 또 자신을 속이고 얼버무리려고 하는 건 그만두자.

    확실히 말해서, 나는 앞으로 우리 애들 셋 말고도 사도 임명을 해야 될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근거도 확실하다. 바로 여신님이 강림하셨던 그 날, 여신님은 사라와 레이아와의 관계를 칭찬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둘에게 사도 임명을 한 걸 칭찬했었다.

    그래. 사도 임명이라는 걸 확실히 콕 집어서 칭찬했던 거다.

    즉, 전쟁신 시대의 종족들과 섹스를 해야할 거라는 내 추측은 만약 맞더라도 반만 정답이라는 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신 시대의 종족들에게 사도 임명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여신님과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이 사도 임명을 너무 소중히 생각하다보니, 나 스스로도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즉, 나는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과 사랑이 있는 섹스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이라는 거다.

    뭐, 전쟁신 시대의 종족과 정말로 그런 짓을 해야 하는 지, 아니. 아직 사라나 레이아 외에 다른 전쟁신 시대의 종족이 더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럼 그게 확실해질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야 할까?

    그것도 뭔가 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똑똑.

    침대에 드러누워서 복잡하게 생각에 잠겨있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원님.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바로 바넷사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저녁시간.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설마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서 고민한 건가? 답지 않네.

    물론 그만큼 중요한 고민이기는 하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할까.

    우리 애들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건데, 정작 그 고민 때문에 우리 애들과 보내는 귀중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면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나는 스스로의 뺨을 찰싹 때려서 기합을 넣고, 방문을 열었다.

    "……."

    방 문 앞에는 바넷사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이대로 앞장서서 식당으로 안내하겠지만, 오늘은 어째선지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넷사는 뭔가 엄청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듯이 한동안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뭐야? 뭔데? 궁금하잖아. 말해봐. 아님 뭐야. 주인님한테 말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방금 전까지 고민하고 있었던 게 거짓말처럼, 아니.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숨기기위해서라도 나는 괜히 더 활기차게 행동하며 바넷사에게 달라붙었다.

    "…제 주인님은 디아나님이십니다. 그럼 말하겠습니다만."

    바넷사는 그런 날 보고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무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서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 표정 짓고 있지 마십시오. 디아나님께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으, 응? 나 뭔가 이상한 표정 짓고 있었어?"

    "…네.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답지 않다니! 나도 가끔 심각해지거든? 너 진짜 요즘 나한테 너무하지 않냐?!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

    "그럼 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바넷사는 빙글 몸을 돌려서는 식당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저거 요즘 진짜 날 너무 놀려먹으려고 드는 거 아냐?

    무표정이라 농담인지 아닌지도 알아먹기 힘든 태도로 말이야.

    아니. 뭐 이번만큼은 아마 선의로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계속 그런다는 게 문제라고! 평소에!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바넷사의 멋진 뒤태를 강하게 노려봤지만, 바넷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하아…. 그래. 뭐, 이번에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걱정해 준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주겠어. 다음은 없다고! 다음은!

    아, 그러고 보니 고민이라고 하면…바넷사 얘하고도 섹스를 했었지.

    지금하고 있는 고민에 아주 관련이 없는 애는 아니라는 거다.

    뭐, 얘가 날 사랑한다든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아니. 정말 그럴까?

    전에는 대충 떠보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바넷사가 그때 거기서 자위를 하고 있었던 이유가 확실히 밝혀진 건 아니다.

    정확히 내가 쟤 몸을 달래줬던 장소. 나와 관련이 없을 리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얘가 그냥 쾌감을 되새기며 그 장소를 자위하는 곳으로 택한 건지, 아니면 내게 진짜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지의 문제인데…으아아! 정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까닭에 괜히 바넷사까지 의식하게 되잖아!

    펠리시아가 날 설득하려고 했던 말이 완전히 역효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거.

    에잇! 모르겠다! 뭘 이런 것까지 고민하고 있는 거야?!

    남자잖아! 그런 건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야! 바넷사!"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바넷사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내가 그런 돌발행동을 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거지, 바넷사의 몸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가볍게 이끌려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서게 됐다.

    그 얼굴 옆에 손을 짚고, 나는 바넷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하핫. 어떠냐. 언젠가의 복수다.

    아니. 바넷사한테 벽꿍 당했던 걸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야. …정말이라고?

    "……뭡니까?"

    아무튼 그렇게 쉽게 벽꿍을 당한 바넷사였지만, 지근거리에서 바라본 그 표정은 의외로 무표정했다. 조금은 놀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도 그냥 무표정이 아니었다.

    얼굴은 무표정이지만, 온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뭔 말이라도 하면 바로 주먹이든 발이든 휘두를 것처럼 거대한 힘이 그 몸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의 프라이드가 있지. 이 정도로 물러설 순 없어.

    나는 각오를 다지고 바넷사에게 질문했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제 정신이십니까?"

    그리고 들려온 대답에, 나는 무릎부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 녀석.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어렸을 때 안 배운 건가?

    아니. 그 이전에 말이 너무 험한 거 아냐? 적어도 좀 더 순화할 수 없었냐?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라든가, "진심이십니까?"라든가. 그렇게만 말해줘도 충분히 대답이 된다고.

    하필 질문을 해도 제정신인지를 질문할 건 없잖아.

    아니. 디아나를 지극히 모시는 입장으로서, 디아나의 남자가 자기한테 그런 질문을 하면 화가 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말이야.

    명치를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까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건, 설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바넷사는 바닥에 허물어진 나를 내려다보면서, 화가 난 건지 평소보다 조금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냐?! 바보!"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바넷사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식당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젠장. 저 철벽 집사 같으니라고. 언젠간 반드시 울려주겠어.

    한 가지 인생의 목표가 더 생긴 나였다.

    "후아아…. 흠. 그래서, 공주에게 무슨 얘길 들은 겐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언제나처럼 방에서 기다리고 있자 씻고 온 디아나가 침대에 누우며 날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처음 내뱉은 말이 바로 저거였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영상을 찍은 다음부터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답지 않게 말일세. 공주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게지?"

    설마 디아나마저…설마 주종이 똑같은 말을 하다니.

    아니. 그런 것보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않은가. 이 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겐가. 아니. 이 몸뿐만 아니라 다들 알고 있었을 걸세."

    그런 건가. 그럼 걱정하면서도 내가 먼저 말을 해줄 때까지 기다렸다는 건가.

    뭔가 미안한 짓을 했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뭔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네만. 자, 이 몸에게 말해보게."

    디아나는 완전히 연상 모드가 돼서는 날 다독이듯 그렇게 말해줬다.

    펠리시아의 추론이 맞는다고 가정하면, 애초에 디아나는 훨씬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도 자기는 아무런 티를 안 냈으면서, 내 고민은 들어주려고 하다니.

    나는 감동을 느끼면서도, 디아나에게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아니. 확실히 디아나의 의견을 들어보는 건 중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아나의 의견을 듣고 나면, 나는 디아나의 의견에 그대로 마음이 기울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즉, 나 스스로 선택하는 걸 포기하고 디아나에게 선택을 맡겨버리는 꼴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 애들에게 중요한 일의 판단을 맡긴 경험은 꽤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실비아나 다른 애들에 대한 감정도 포함된 문제다.

    그런 식으로 결정하는 건 실례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우리 애들이라도 판단을 맡겨서는 안 되는 문제다. 스스로가 제대로 생각하고 결정해야할 문제다.

    "미안. 말하기 조금 힘드네."

    "흠. 그런가."

    내 그런 대답에, 디아나는 따듯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이 몸에게도 말하기 힘든 문제인가?’라든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미안. 이건 나 스스로 결정해야할 문제인 것 같아서."

    "후훗. 괜찮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디아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서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줬다.

    마치 성장한 손자를 보는 할머…아니! 우리 디아나는 파릇파릇하지만 말이야! 뭐니 뭐니 해도 신체연령은 최연소니까!

    "하지만 고민이란 건 가끔은 생각을 비워야지 해결 될 때도 있다네. 어떤가? 밤만큼은 머리를  비우고 이 몸만 생각하는 것이."

    "아, 응. 그야 물론이지! 디아나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을 고민 같은 걸로 헛되이 쓸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오늘은 뭘 할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우리 애들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건데 정작 그 고민 때문에 우리 애들과 보내는 귀중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면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나는 곧바로 분위기를 전환하고 생각해뒀던 플레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처음엔 따뜻하게 날 지켜보던 디아나의 표정이 점점 질렸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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