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31화 (415/1,205)
  • 431====================

    서큐버스의 사정

    머릿속은 엄청나게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면 의심을 받을 뿐이다.

    모처럼 디아나의 기억이 깨끗하게 날아간 상태라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이 기회를 스스로 차버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고.

    때문에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넷사가 부르러 올 때까지 디아나와 노닥거리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바넷사는 오지 않았다.

    아니. 평소 바넷사가 부르러 오는 시간에서 겨우 10분정도 더 지났을 뿐이긴 하지만 말이야.

    평소엔 거의 초단위로 정확하게 시간 맞춰서 부르러 오는 바넷사인 만큼, 10분이라는 시간은 무슨 일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뭐, 무슨 일이라고 해봐야 그 일밖에 더 있겠냐마는.

    아무튼 덕분에 난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아침에 바넷사가 찾아와서는 바로 디아나에게 보고부터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말이야.

    어제 일로 충격을 받았을 바넷사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한텐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시간이!"

    "응? 정말이구먼. 바넷사가 이 시간까지 안 오다니. 대체 무슨…."

    "그, 그런 것보다 일단 얼른 씻자. 다른 애들 기다리겠다."

    "너무 그렇게 조급해하지 말게나. 마법으로 씻으면 그만 아닌가."

    "아니. 제대로 씻는 편이 좋아."

    "으음?"

    "그게…왜. 그 있잖아."

    "자, 자네 대체 어제 무슨 짓을 한 겐가?!"

    솔직히 변명할 말이 생각이 안 나서 대충 얼버무린 건데, 우리 디아나는 또 내가 유도한 대로 행동을 해줬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걸까? 음부가 순간 꾸욱 조여 왔는데.

    "별 짓 안 했어. 별 짓 안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제대로 씻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그런데 눈은 왜 피하는 겐가?! 목소리는 왜 떨리는 겐가?!"

    "아, 아무튼 내가 정령으로 씻고 먼저 내려가서 얘기해 둘 테니까 말이야. 디아나는 느긋하게 씻고 와."

    나는 토닥토닥 공격을 날려대는 디아나를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면서, 물의 정령을 소환하여 몸을 씻고 방을 빠져나왔다.

    좋아. 이걸로 일단 미션 1단계는 완료했다.

    나는 방을 빠져나와서 곧장 근처에 보이는 메이드에게 향했다.

    시간이 별로 없다.

    디아나에게 느긋하게 씻고 오라고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아나가 정말로 느긋하게 씻을 리가 없다.

    우리 애들이라면 모를까, 마법사 협회 사람들 같은 경우는 디아나가 올 때까지 식사에 손도 안 대고 기다릴 테니까 말이다.

    "저기."

    "네. 무슨…무, 무슨 일이신지요?!"

    …왜 우리 메이드들은 아직도 나만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아니. 오히려 예전엔 좀 더 평범하게 대해줬던 것 같은데 말이야. 요즘 들어서 더 반응이 격렬해진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나 메이드들한테 뭔가 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애초에 나는 거의 바넷사가 밀착 마크해서 그런지 메이드랑 대화할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다고.

    "바넷사 못 봤어?"

    "네? 아. 넷! 바넷사님이라면 방에 계십니다! 오늘은 드물게도 컨디션 불량이라는 것 같아요!"

    "그래? 고마워."

    "아, 아뇨!"

    끝까지 어색한 메이드의 반응을 뒤로한 채, 나는 바넷사의 방으로 향했다.

    예전에 성역 선포에 혼자 걸렸던 걸로 알 수 있듯, 바넷사의 방은 내 방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넷사. 안에 있어?"

    방문 앞까지 도착한 나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문을 두드렸다.

    쿠당탕탕!

    그러자 안에서 요란법석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란스런 소리와 정반대로, 바넷사의 대답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이쯤 되니까 정말로 무서워지는데. 그 바넷사가 이런 반응이라니. 대체 얼마나 충격을 받은 거야.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살짝 돌리자, 아무런 저항 없이 스르르 돌아갔다.

    잠겨 있지는 않군. 좋아. 그럼 일단 들어가 볼까.

    내가 그렇게 다짐을 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무슨…으읏…!"

    당연한 얘기라고 할까, 문고리를 붙잡고 있었던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그대로 딸려 들어갔다.

    이대로 가면 바닥에 안면부터 다이빙할 것이 확실할 정도로 몸이 기울어진 나였지만, 의외로 내 얼굴을 물컹한 감촉에 감싸이면서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안면에 느껴지는 그 감촉은, 내겐 꽤나 익숙한 감촉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얘건 익숙하지 않지만 말이야.

    "…야. 말해두지만 일부러 그런 게…."

    바넷사의 가슴에 그대로 처박힌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자, 거기엔 미동도하지 않고 굳어있는 바넷사의 얼굴이 있었다.

    평소보다 미묘하게 퀭한 눈을 하고 있는 걸로 보아, 아마 한 숨도 못 잔 거 아닐까?

    "읏…떠, 떨어지십시오."

    "넵."

    극심한 분노에 휩싸여 부들부들 떠는 바넷사를 바라보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큭!"

    아, 아냐! 지금 건 아냐! 얼굴로 가슴 감촉을 만끽한 게 아냐! 그냥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뿐이라고!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빼냈지만, 바넷사의 우중충한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

    "……."

    아니. 그렇게 지그시 보고만 있으면 좀 무서운데요.

    보통은 어쩐 일로 왔냐고 물어보는 게 맞지 않니?

    우리 슈퍼 집사님은 다 좋은데 사교성이 너무 없다니까.

    어쩔 수 없지. 여기선 사교성 하난 누구한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이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어…음…그…잘 잤어?"

    나는 잽을 날리는 기분으로, 일단 가볍게 인사부터 나눠보기로 했다.

    "…그렇게 보입니까?"

    "아뇨. 죄송합니다."

    이건 틀렸다. 상대는 전혀 인사를 나눌 마음이 없어.

    철벽녀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에에잇! 하지만 난 그런 걸로 굴하지 않아! 눈앞에 철벽이 있다면 뚫고 가면 그만이야!

    "그게, 어젯밤 일말인데."

    인사를 거부당한 나는 곧장 원래 여기 온 목적을 말하기로 했다.

    "…읏!"

    "부탁이야! 디아나한텐 비밀로 해줘! 어차피 서로 사고 같은 거였잖아? 서로 잊고 지내는 게 좋다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디아나님께선 어제…."

    "걔 기억 못해! 너무 흥부…아, 아무튼! 기억 못 해! 그러니까 부탁해! 비밀로 해줘!"

    "…기억을 못해? 정말, 정말입니까?"

    "그래!"

    내 대답을 듣자, 바넷사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장담을 못한다고. 얘 표정은.

    "…하지만."

    "부탁이야. 네 충성심은 잘 알지만, 디아나를 위해서라도 비밀로 해줘! 디아나도 이대로 잊고 지내는 게 행복할 거야!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그 디아나가 기억에서 지워버렸겠어?!"

    나는 바넷사의 충성심을 오히려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뭐, 솔직히 충격보다는 너무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디아나도 잊고 있는 게 행복할 거란 건 사실이다. 어젯밤 일을 기억해내면 부끄러워 죽으려고 할 건 분명하니까.

    "…구원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하지만 내 부탁에, 바넷사는 의외의 질문을 던져왔다.

    조금 풀린 것 같다고는 하나 여전히 딱딱하게 긴장한 얼굴로.

    "그야 나도 솔직히 부끄럽지만, 뭐 서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거니까. 어제 일은 서로 넘어가자고."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만."

    "어? 응? 그런 뜻이 아니라니? 그럼 무슨 뜻인데?"

    "……서, 설마 모르는…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르시면 됐습니다."

    바넷사는 어째선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는, 살짝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왜? 뭔데 그래? 궁금하잖아?"

    "모르시면 됐다고 했습니다."

    "넵."

    얘 가끔 공손한 말투로 날 협박하려고 들더라.

    집사가 그래도 되는 거냐?

    뭐, 이번만큼은 나도 원하는 바가 있으니 물러나 주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비밀로 해줄 거야?"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대신, 구원님께서도 어제 제 모습은 디아나님께 반드시 비밀로 해주십시오."

    바넷사의 대답을 듣고, 나는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렇구나.

    나도 어제 일을 디아나에게 들키기 싫었지만, 바넷사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던 거구나.

    처음부터 바넷사가 디아나한테 말할 걱정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하긴. 그야 그렇지. 생각해보니까 그래. 그런데서 혼자 자위하고 있는 모습을 존경하는 주인님께 들킨 건데. 그야 부끄럽겠지.

    오늘 이렇게 방에 처박혀있었던 것도, 디아나한테 자위를 들킨 충격에 처박혀있었던 건가?

    난 또 어제 우리 모습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런 줄 알았네.

    휴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래. 그럴게."

    "…꼭입니다."

    "아, 알았다니까."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안다고.

    "서로 디아나에게 비밀을 공유하는 동지끼리 앞으로도 잘 해보자고."

    "구원님과 이런 비밀을 공유하는 건 제가 원하던 바가 아닙니다만…. 역시 사실을 밝히는 편이…."

    "그, 그만 두라고! 이것도 다 디아나를 위해서니까!"

    얘가 큰일 날 소릴 하네.

    누굴 잡으려고.

    "하지만 어젠 진짜 깜짝 놀라서 말도 안 나왔어. 설마 바넷사가 그런데서 자위를 하고 있을 줄이야."

    마음이 가벼워지자, 드디어 나도 다시 농담을 할 여유가 생겼다.

    "혹시 전에 했던 내 애무를 잊을 수 없어서?"

    "…읏!"

    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바넷사는 전혀 농담할 기분이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내가 그런 질문을 던진 순간, 바넷사는 불의의 일격을 맞은 듯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며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미안. 농담이었으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줄래?"

    우와. 사과해도 계속 노려보잖아. 대체 얼마나 싫었던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농담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도 그럴게, 정확히 내가 애무를 해줬던 그 장소라고? 우연히 방만 같은 거라면 모르겠는데, 정확히 욕조 안이라고? 혹시 얘가 나한테…그런 의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전 농담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바넷사의 살기를 보고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방금 그 살기는 진짜였어. 아마 내가 디아나의 남자만 아니었으면, 살인멸구라도 할 기세였다고.

    그래. 이 충성심 투철한 애가 나한테 감정이 있을 리가 없지.

    디아나에게 그렇게나 헌신하는 바넷사다.

    만약 나한테 그런 감정이 생기면 자신의 마음을 죽여서라도 억누를 성격인데, 그렇게 대놓고 날 생각하며 자위에 빠질 리가 없나.

    섹스 난이도만 놓고 보면 최하라고 할 수 있는 펠리시아랑 최근 엮인 것 때문에 또 자만에 빠진 거 아냐?

    조심하라고 구원. 그 펠리시아 조차도 나한테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고. 그냥 정액과 쾌감을 원할 뿐이지.

    아마 바넷사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젯밤에 욕조에서 자위를 한 건, 아마 최근 가장 쾌감을 느낀 장소가 거기라서 그런 거겠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으니, 아마 바넷사에겐 그 날이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만져진 날일 거다.

    그러니 나한테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쾌감을 기억해내서 자위의 효율을 높이려고 했을 뿐인 거다.

    "아니. 미안하다니까. 그렇게 자위할 정도로 욕구불만이면 내가 도와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아니. 진짜 미안."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바넷사를 떠볼 겸 그렇게 중얼거려 보기도 했지만, 돌아온 건 붉게 물든 바넷사의 분노한 시선뿐이었다.

    결국 바넷사는 내가 방에 나가고 문을 닫을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날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나저나 쟤. 오늘은 끝까지 방에 틀어박혀 있을 셈인 걸까?

    일단 방금 대화로 어젯밤 일은 해결 됐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아니. 뭐. 일단 해결은 됐다곤 하나, 그래도 역시 디아나 얼굴을 보기는 부끄러운 거겠지.

    나는 혼자 그렇게 납득하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또 뭘 하지. 공주랑 일이 완전히 해결 될 때 까지는 던전에 가기도 힘들 것 같고. 1계층 조사가 계속 미뤄지네."

    아무튼 그렇게 일이 일단락 된 후,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의자에 반쯤 드러눕듯 기대앉아서 중얼거렸다.

    아, 참고로 바넷사는 디아나가 식당에 내려오기 직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나와 대화를 마친 후 준비하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던 모양이다.

    오늘도 완벽하게 단정한 모습으로 집사 일을 하고 있었다.

    디아나나 나랑 대화할 때는 살짝 어색해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아마 내가 사정을 전부 알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묘한 수준이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감기약 먹고 그대로 잠들어서 늦었습니다.

    원래 안 이랬는데 요즘은 왠지 약만 먹으면 졸리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