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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의 사정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 바넷사가 날 향해 메이드 복을 든 손을 내밀었다.
저 옷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은 희고 검은 천 조각. 하지만 스스로 메이드 복이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듯이 군데군데 달려있는 프릴,
틀림없어. 그때 그 메이드 복이다.
드디어 내 손 안에 다시 들어오는 구나.
나는 살짝 감격하면서 옷가지에 손을 뻗었다.
"…야. 바넷사."
"네."
"그렇게 꽉 잡고 있으면 가져갈 수가 없는데."
아니. 힘으로 진다는 얘기가 아냐.
그냥 순수하게, 정말로 순수하게 힘주면 옷이 찢어질까봐 그러는 것뿐이야.
그렇게 주기 싫나?
하긴 내가 이걸 어떻게 쓸지 생각해보면 그 마음도 이해 못할 건 없지만…아니. 하지만 예전에 처음 줄 땐 이런 반응이 아니었는데.
그때도 분명 바넷사는 내가 이 옷을 어떻게 쓸지 예상이 간다는 태도였다.
그때와 지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야. 괜찮다니까. 애액은 제대로 빨았잖아?"
나는 나름 배려해준다고 말한 거였지만,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바넷사가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쫄지 않았다고.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노려보는 모습이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정말 괜찮다니까. 자, 봐. 냄새도…우왁! 너 지금 진짜로 때리려고 했지?!"
내가 메이드 복에 코를 가져다대면서 괜찮다는 걸 어필하려 하자, 바넷사가의 주먹이 나와 메이드복 사이의 허공을 갈랐다.
그대로 고개를 내밀었으면 확실히 맞았을 거야.
"…척만 한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주먹에서 부웅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까지 들렸다고!
"아무튼 됐으니까 슬슬 돌려달라고."
"……."
나는 다시 한 번 메이드 복을 당겨봤지만, 바넷사는 여전히 옷을 단단히 붙잡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야. 대체 안 주려는 이유가 뭔데. 말이라도 좀 해봐라. 너 뭐 이걸로 그 때 생각하면서 자위라도 하냐?"
매일같이 집구석에만 처박혀있는 바넷사니까 당연히 남자를 만날 기회도 없을 거고, 섹스 같은 걸 할 기회도 당연히 없을 거다. 그러니까 혼자서 자위 정도는 하겠지. 얘도 사람인 이상 성욕은 있을 테고.
라는 생각으로 반쯤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해봤던 거지만, 바넷사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안했습니다."
얘 지금 대답하기까지의 침묵이 눈에 띄게 길었지? 내 착각 아니지?
"진짜 하는 거냐."
"전 안 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아니. 아무리 그렇게 우겨봤자 설득력이 없거든.
너 아까보다 얼굴 더 빨개졌다.
그야 미묘한 수준이라 티가 잘 안 나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대로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메이드 복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도박이기는 하지만, 조금 위험한 수위의 발언을 해볼까.
"그, 뭐냐. 너도 한창 때 나이고. 집사 일 하느라 남자 만날 기회도 없을 거고. 휴가도 없는 것 같고. 다 이해한다. 그런 네게서 자위 도구마저 빼앗은 건 나로서도 매우 가슴이 아프지만, 나도 오늘은 꼭 좀 쓸 데가 있어서 말이야. 정 성욕이 폭발해서 못 참을 것 같으면 저번처럼 내가 또 한 번 해줄 테니까."
이런 말까지 듣고도 계속 메이드 복을 건네주지 않으면 그거야 말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정말로 아니라면, 바넷사도 이제 손을 놓겠지.
지금 이 말을 바넷사가 디아나한테 고자질이라도 하면 큰일이 나겠지만, 아마 고자질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넷사도 그 때 일은 디아나에게 말 하지 않고 있을 테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내 도박은 멋지게 성공해서, 드디어 바넷사가 메이드 복에서 손을 뗐다.
됐다! 드디어 내 품에 돌아왔구나! 이걸로 오늘 밤 사라랑…크큭.
나는 바넷사의 마음이 변할 새라 황급히 메이드 복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른 용무가 없으시면 전 이만."
그리고 내 손에 있던 메이드 복이 사라지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바넷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잠깐 기다려!"
"…또 뭡니까?"
바넷사야. 왠지 말투에 가시가 돋아있지 않냐?
"놀아줘. 심심해."
"……."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애들은 다들 모여서 토론이나 하고 있고, 여기선 혼자서 할 것도 없고!"
"……하아."
얘 지금 한숨 쉰 거야?!
뭐, 그러면서도 결국 바넷사는 나랑 놀아주게 됐지만 말이다.
후훗. 입으론 싫다고 하면서 몸은 정직하게…그거랑은 좀 다른가?
아무튼 그래서 나랑 바넷사는 포커를 하게 됐다.
그래. 이 세계도 포커가 있더라고.
과연 카드 모양이나 세세한 룰 같은 건 달랐지만 말이다.
그래도 큰 틀은 포커와 거의 똑같아서 배우기가 그리 힘들진 않았다.
그렇게 나와 바넷사가 카드 배틀을 펼치고 꽤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얘기를 마쳤는지 우리 애들이 단체로 내 방에 찾아왔다.
"구원! 일단 얘기 끝났…뭐하는 거야?"
"아. 다들 수고했어. 나야 뭐 보시다 시피 시간 때우기 겸 게임을. 그보다 얘긴 어떻게 됐어?"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네. 아무래도 공주랑 좀 더 얘기를 나눠보고 결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말일세. 그 서큐버스 종족에 대해서도 자세한 사정을 들어봐야 할 것 같으니 말일세."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제대로 했으면…."
"괜찮아요. 레이아 잘못이 아니에요."
음음. 아니고말고. 서로 다독이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하지만 의외네. 솔직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 특히 사라가."
"그야 나도 마음 같아서는 반대하고 싶지만…."
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레이아의 눈치를 봤다.
역시 그건가. 사정이 비슷한 처지의 레이아가 있으니 함부로 내치기 힘들다는 얘기인가.
실비아도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우리 파티에 들어왔었는데 말이야. 설마 펠리시아도 그렇게 되는 건가.
과연 절친. 전혀 안 닮은 것 같으면서 이상한 데서 공통점이 튀어나온단 말이야.
"그리고 여신님이 구원에게 내린 사명과도 관계있을 지도 모르고."
사라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 못 하는 거야? 전에 여신님이 나하고 레이아에게 사도 임명을 내린 걸 칭찬했었잖아. 게다가 우리 둘 다 전쟁신 시대의 종족. 하지만 과연 전쟁신 시대의 종족이 우리 둘 뿐일까? 혹시 그 서큐버스라는 종족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거 아냐?"
아, 그 얘긴가. 전쟁신 시대의 종족을 모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도 전에 한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이번에는 전혀 염두에 안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서큐버스는 여신님이 만든 종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도 그렇잖아? 일단 능력을 봐. 누가 봐도 여신님이…아니. 그건 구미호도 마찬가지인가.
게다가, 생각해보니 서큐버스는 악마잖아.
마신의 종속으로 엄청나게 어울리는 종족이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여신님이 만든 세계에서 왕을 해먹고 있기까지 하니, 그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전쟁신 시대의 종족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사도 임명을 하려고 들면 용서 안 할 거야."
"그야 물론이지.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니. 애초에 공주는 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하려고 해도 안 된다고.
"미, 미안. 의심하는 건 아냐."
내 의지가 느껴지는 말에 당황했는지, 사라가 얼굴을 붉히면서 사과해왔다.
아니. 용서 못 해. 역시 오늘 밤엔 메이드 복을 입혀서 교육 좀 시켜야겠어.
안 그래도 메이드 복을 입힐 생각 만만이었던 나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다짐했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지금은 식사나 하도록 하세."
"그래! 그러자!"
"후훗. 그렇게 시장하셨나요?"
아니. 미안. 레이아. 실은 식사보다 식사 후에 일어날 일이 더 기대돼서.
우리가 대화하는 와중에 혼자서 카드를 정리하고 있던 바넷사만이, 내가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안다는 듯 미묘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밤이 됐다.
나는 목욕을 마친 사라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강한 어조로 말했다.
"사라! 너 오늘…."
"구원!"
나보다 더 강한 어조로 말하는 사라 목소리에 씹혔지만.
"어, 응. 왜?"
어라? 나 또 뭔가 저질렀던가?
얘 표정이 왜 이러지?
"솔직히 말해. 오늘 그 여자랑 했지?"
"으헉! 어, 어떻…레이아가 말했어?!"
설마! 우리 천사님이 그러실 리가 없는데?!
펠리시아와 한 건 한 번 해버리고 연을 끊을 셈이었으니까 당당하게 있으면 그만인데, 사라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말을 꺼내는 바람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냐. 그 여자가 말 했다면서. 구원 물건으로 한 번 하게 되면 그 어떤 여자도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그게 왜?"
"전에 구원이 그 여자한테 억지로 당한 건 레벨이 낮을 때잖아? 그 때 기억으로 공주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으니까, 구원의 레벨이 올라간 후에 한 번 더 했다는 말밖에 안되잖아."
과연. 그런 건가.
천사님. 전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겨우 그 말로 여기까지 추리해내다니.
나 가끔 얘 통찰력이 무서워질 때가 있더라.
"아무튼 그래서 했단 말이지?"
"그래. 맞아. 했어. 말장난으로 내기를 무효로 돌리는 것도 힘들어 보였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남자. 구원이다.
나는 당당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꽤나 당당하네."
내가 이렇게 나올줄 몰랐는지, 사라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당당하지 못할 게 없으니까. 원한다면 어떻게 했는지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어. 아니.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좋을까?"
그리고 나는 그런 사라를 더 몰아붙이듯이, 사라의 성벽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해봐."
좋아. 좋아. 내 유도대로 낚이고 있어.
통찰력이 아무리 좋아도, 밤일에 관한 한 내 잔머리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걸?
게다가 사라 얘도 매번 아니라고 하면서 실은 즐기니까 말이야.
그렇게 나와 펠리시아가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궁금하단 말이지?
"좋아. 그럼 우선 이걸 입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오늘 바넷사에게 돌려받은 메이드 복을 내밀었다.
"뭐야 그…잠깐. 그게 지금 왜 필요한데?"
"펠리시아의 행위를 자세하게 재현하려면 이걸 입는 편이 더 효과적이야."
"그 여자한테 그런 것까지 입히고 한 거야?!"
"아, 아냐! 애초에 성에 갔을 땐 이거 가지고 있지도…아, 아무튼 아냐! 일단 입어 봐! 입으면 알아!"
계획과는 달리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억지로 사라에게 메이드 복을 강요했다.
"…만약 속이는 거면 용서 안 할 거야."
결국 사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뭔가 꼬인다는 얼굴로 메이드 복을 받아들였다.
후하핫. 펠리시아의 일을 지금 언급한 걸로 보아 그걸 통해 내게서 밤 일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그렇겐 안 되지.
이런 방면에서 내 머리를 따라올 생각을 하다니.
물러. 한참 무르다고 사라야!
좀 더 정진해라!
원래 계획대로 사라에게 메이드 복을 입히는 데까지 성공한 나는, 사라가 옷을 갈아입는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눈 안 돌리냐고? 왜 돌려? 사라도 아무 말 안 하잖아?
"…입었어. 그래서, 지금부터 어쩌겠다는 건데?"
다 갈아입은 사라는 여전히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모습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역시 잘 어울린다니까.
평소에는 긴 팔 티셔츠에 긴 바지로 피부를 꽁꽁 싸매고 있는 만큼, 이렇게 노출도가 높은 옷을 입었을 때의 모습이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좀 더 이렇게 노출을…아니. 이 모습은 나만 볼 수 있으면 충분한가.
굳이 평소에도 이러고 다녀서 딴 놈들 눈 호강 시켜줄 필요는 없지.
역시 평소대로 입는 게 제일이야.
"그럼 지금부터 펠리시아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 몸에 직접 알려주지. 그렇군. 우선 꿇어."
"뭐? 그게 무슨…."
"시키는 대로 해."
"읏…."
평소와 다르게 조금 강압적인 말투로 말하는 내 기세에 눌린 건지, 사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맘에 안든 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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