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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의 사정
"잘 아는 천정이다."
그야. 당연하지. 내 방이니까.
눈을 뜬 나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여전히 다들 무서운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레이아만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날 치료하고 있는 중이었다.
천사님…역시 내 삶의 오아시….
하지만 내가 눈을 뜬 걸 확인하자마자, 천사님이 고개를 홱 돌리면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난 모습도 가련하고 아름다우시지만, 지금 그건 멘탈에 타격이 좀, 아니 많이 컸다.
천사님이 저런 태도를 보여주시다니. 좋아. 죽자. 나 같은 건 살아갈 가치가 없어.
"그래서,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야?"
"으, 응?"
"공주말이야. 실비아가 저쪽에 가있는 이상, 계속 저대로 내버려두진 않을 거잖아?"
여전히 화를 내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내가 기절한 동안 어느 정도 쿨 다운이 된 걸까?
사라가 팔짱을 끼고 날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도, 도와주는 거야?"
"이 바보가 진짜! 그럼 안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
"응. 완전 미움 받은 줄…."
"이…! 좋아하니까 이렇게 화내는 거잖아! 이 바보야!"
"그래요. 구원씨. 구원씨를 미워하게 된다니. 있을 수 없어요."
화나서 소리치는 사라에, 그 말을 거드는 레이아.
레이아의 표정은 아까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있어서, 공주와의 일보다 레이아 자신이 날 미워하게 됐다고 오해받은 게 오히려 더 화난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디아나에게로 옮겨갔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디아나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아깐 무서워보였던 디아나의 표정도 저렇게 잠깐 몸이 떨린 걸 보니 갑자기 귀여워 보이는 게 신기했다.
"이, 이 몸, 이 몸도 애초에 자네가 아니면 화나서 마법을 쓰거나 하지 않네."
내가 계속 빤히 쳐다보자, 디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 하긴. 보기완 다르게 이성이 상당히 강한 디아나니까 말이야.
마법을 날린 것도 날 좋아하니까 그렇게까지 화를 냈다고 봐야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법으로 맞는 것도…아니. 그래도 아픈 건 싫으니까 역시 토닥토닥 공격이 좋지만 말이야.
앞으론 이성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적당히만 화나게 하자.
아까도 괜히 라마즈 호흡법 같은 말을 안 꺼냈으면 마법으로 맞진 않았을 거다.
결과적으론 잘 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마 마법을 맞고 기절하지 않았으면 사라한테 더 맞았을 것 같고, 내가 기절한 사이에 다들 조금 냉정을 되찾은 것 같기도 했다.
덤으로 난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레이아가 제대로 치료해줬는지 지금은 어디 아픈데도 없고.
"아무튼 그래서. 이제부터 어쩔 셈이야?"
훈훈해 지려는 분위기를 깨듯, 사라가 다시 한 번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랬지. 지금은 그게 우선이지.
"당연하지만 공주의 꼬드김에 넘어갈 셈은 없어. 나한텐 너희 셋만 있으면 충분해."
"아…."
이 중에서 유일하게 분노치가 조금 낮은 마틸다가 어딘지 안타깝게 들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 표정은 마치 우리를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저주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랑도 하지 못하는 마틸다니, 이런 말을 듣는 셋이 부러운 걸까?
그게 아니면 마틸다도 날…아니.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감정마저도 저주 때문일 수도 있으니 마찬가지인가.
"대안은 있는가?"
"미안. 원래는 정말로 공주가 딴 놈이랑 안 하더라도 생각만 해본다고 했으니 안 할거라고 하고 넘어가려고 했어.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쯧."
사, 사라야? 지금 혀 찬 거니?
"다른 것도 문제지만, 애초에 뭐야 그 내기 내용은. 구원. 설마 독점욕 같은 게 생겨서 그런 건 아니지?"
"아, 아냐! 내가 공주같이 아무하고나 자는 놈이랑 잘 생각은 없다고 하니까, 그쪽에서 그럼 딴 놈들이랑 안 잘 수 있다고 하기에…아, 아무튼."
이 이상 변명해봤자 괜히 기분만 더 나빠지게 만들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미안. 대책이 없어. 다들 지혜를 조금 빌려줄 수 없을까?"
"하아아아…. 지혜라고 해도 말일세. 정말로 실비아양이 여왕과 공주 사이를 중재하길 기대하는 수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구먼."
내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자,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디아나가 말했다.
"혹시 디아나씨가 중재를 맡을 수는 없나요?"
"개인 간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왕위 계승 문제까지 얽혀있으면 이 몸도 손을 댈 수가 없네. 이 몸은 정치에는 간섭하지 않는 방침이라네. 이 몸이 이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경계 받지 않고 편히 지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니 말일세. …유일하게 딱 한 번 쿠데타니 뭐니 소동을 부리기는 했지만 말일세."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겸연쩍은 듯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디아나가 안 되면 저희로서도 방법이 없네요. 아, 마틸다씨. 마틸다씨는 추기경이니…."
"저, 저도 불가능해요. 저희 교도 정치에는 간섭 안 하는 방침이거든요. 그리고 전 교황님께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변명하는 것만으로도…."
"아아아아아아!"
"꺄악! 뭐, 뭐에요!"
"아, 아니. 미안. 깜빡 잊고 있었어. 있어! 대책이! 딱 하나!"
아무리 기절했다고는 하지만 이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니.
솔직히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해볼 가치는 있는 아이디어인데!
"아까도 말했지만 말싸움의 발단은 여왕이 도움도 안 되는 나에게 집착하는 공주를 꾸짖으면서 생긴 일이야. 그럼 여왕한테 증명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공주가 그렇게 섹스를 참고 날 기다리면서 얻는 이득이 있다는 걸 말이야."
"뭐어?"
"아니. 결혼한다든가 그런 거 아니니까 무서운 얼굴 하지 말아줘. 들어봐. 지금도 거리에서 남자들이 나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정도로 구원을 갈망하고 있잖아? 그런데 만약 공주가 그들을 전부 구원해줄 수 있다면? 공주의 명성은 하늘 높이 치솟을 테고, 그럼 왕가도 충분히 이득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겠네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전부터 생각해봤어. 나 혼자서 어떻게 하면 모두를 구원할 수 있을지를. 그리고 나온 해답이, 교재를 만들자는 거였어. 물론 책으로 된 걸 만들어봤자 쓸모가 없겠지. 전달도 되지 않을 테고, 글을 못 읽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그래. 책의 또 다른 문제가 바로 문맹률이었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특히 우리나라가 이상할 정도로 문맹률이 낮았던 거지, 보통은 그렇지 않단 말이지.
특히 레벨이 낮은 서민들, 즉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쪽으로 갈수록 문맹률은 늘어날 거다.
때문에 역시 책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말이야. 영상이라면 어떨까?"
"……."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디아나가 내게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머리에 손을 뻗어왔다.
그래. 디아나.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의 아이디어가 기특하다.
딱콩!
"우으으읏!"
야. 자기가 때리고 아파하지 마라.
"호오. 호오. 그, 그 말은 공주랑 하는 영상을 찍겠다는 말 아닌가!"
디아나는 자기 주먹을 감싸 쥐고 호호 불면서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외쳤다.
"그, 그건 그렇지만…그, 왜, 어쩔 수 없는 경우잖아. 어차피 공주와의 내기는 피해갈 수 없으니 이왕이면 목적이 있는 편이 좋기도 하고, 공주와 여왕의 싸움도 멈출 수 있고, 덤으로 마을에 갈때마다 나한테 달라붙는 떨거지들도 떨어지고, 일석삼조잖아."
"이게 진짜 말이나 못하면…야. 너 진짜 공주랑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사라야. 야라니. 너라니. 오빠한테…아니야. 아직 아무 말 안했어.
"정말 아니야. 너희도 내가 공주의 유혹을 얼마나 이겨냈는지 알잖아. 걔 무슨 특수 기술이라도 익혔는지 눈 마주치면 매혹 같은 것까지 쓴단 말이야. 그것도 이겼다고. 그런 내가 이제 와서 하고 싶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난 너희만 있으면 충분해.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혼자 모두를 구하려면 교육 영상 촬영정도밖에 답이 없어. 아, 혹시 이런 영상 보는 것도 교단 측에선 금기거나 해?"
"그, 그건…원래부터 다른 사람의 정사를 보는 건 저희 성직자들 사이의 금기니까요. 물론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방탕한 생활은 옳지 않지만…하지만 교육용이라면…."
레이아는 이런 얘기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는 듯 마틸다에게 시선을 돌렸고, 마틸다 역시도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됐잖아. 교육용 영상을 찍는 걸로. 그거 한 번으로 저기 밖에서 귀찮…구원을 원하는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그런 거라면 굳이 공주가 아니더라도…."
"너흰 절대 안 돼! 너희 알몸을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다니! 죽어도 용납 못해! 아니. 본 놈은 내가 죽인다."
"지, 진정해.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게다가 교육용이니만큼 레벨도 필요해. 내가 살짝만 건드려도 젖어버리는 여자랑 찍어봤자 전혀 교육이 되지 않을 테니까. 나만큼, 아니 나 이상으로 레벨이 필요해. 그야말로 공주가 적임이잖아?"
"그,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나도 구원 몸을 남한테 보여주는 게 싫다고 말하는 거야, 이 바보야…."
"윽. 그, 그건…하지만 남자 쪽은 날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나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고. 크흠. 그래서, 어때 디아나. 내 계획. 말이 되는 것 같아?"
솔직히 나는 가능성만 믿고 말했을 뿐, 이 세계의 사회 정서라든가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이게 정말로 말이 되는 계획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최종 검토는 디아나에게 부탁하는 거다.
디아나라면 분명 완벽한 판단을 해주겠지.
"으으으으으음…. 자네 정말 뻔뻔하구먼. 아무리 이 몸들이 필요한 섹스는 해도 된다고 했지만…후우우. 그렇구먼. 한 가지 문제만 제외하면, 일단은 가능할 것 같네."
"문제? 뭔데?"
"뭐겠나. 당연히 공주 아니겠나. 아무리 공주라도 정말로 그런 걸 찍으려고 할지 모르겠구먼. 세상 모두에게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노출…하아…하게 되는 걸세…. 그, 그런…."
야. 이런 때까지 노출증이 자극될 필요는 없잖아.
왜. 나중에 너도 한 번 찍어줄까? 나만 보는 영구소장용으로.
"음…그거야 잘 말 해보면 가능할 것 같은데. 어차피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면 곤란한 건 공주기도 하고. 그보다 여왕 쪽은 어떨 것 같아? 공주가 그런 식으로 명성을 쌓는 걸 이득이 된 거라고 인정해줄까?"
그래. 내가 걱정하는 건 공주가 아니라 오히려 여왕이었다.
자기 딸이 아무리 명성이 높아진다고는 하지만, 알몸을 모두에게 드러내는 거니까.
"그, 그건 문제없을 걸세. 여왕은 조금의 창피보다는 큰 명성을 얻었다는 것에 주목할 걸세. 그런 성격이네."
디아나는 살짝 허벅지를 모으면서 말했다.
디아나야 장하다. 그래도 상상만으로 흥분한 건 그 정도로 억누를 수 있구나.
"영상 쪽은 어때? 만들 수 있어?"
"그것도 모르고 말을 꺼낸 겐가. 그야 당연히 만들 수 있네. 다만 모두에게 보급할 수 있을 가격이 나올지는 모르겠구먼. 간단한 영상 출력장치라고 해도 일단은 마법구이니 말일세. 게다가 재생할 때 일정 이상의 마나도 필요할 게고."
아차. 그게 문제인가.
그래선 문맹을 걱정해서 영상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 거잖아.
아니. 어차피 복사기도 없는 세상. 책도 만들려면 수고가 꽤나 들 테니, 그런 점까지 감안하면 역시 영상 쪽이 조금 더 낫긴 한가.
하지만 보급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기껏 영상을 만들어도 쓸모가 없는데.
그래! 신전과 협력하는 건 어떨까?
어차피 신전은 안 그래도 사람들에게 교육을 해주고 있는 거다.
거기에만 영상을 보급해서, 교육받으러 온 사람이 그 내용을 토대로 학습할 수 있게 만들면….
젠장. 성직자들은 보는 거 금기라고 했지.
대체 누가 만든 거야. 그런 금기. 여신님은 그런 말 안 하셨을 거라고.
실제로 난 사라와 디아나를 동시에 안은 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 안 하셨으니까.
역시 일이 쉽게 쉽게 풀리지를 않는구나.
아무튼 이러고 있어봐야 소용없다.
나는 일단 되든 안 되든 행동에 나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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