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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의 사정
실비아를 성으로 보내고 나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방금 실비아한테 들은 얘기를 과연 우리 애들한테 해도 좋은 걸까?
원래는 디아나한테 내기 얘길 고백하고 성까지 동행을 무효화시킬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이제 와서 그러기에는 얘기가 너무 커져버린 감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는데, 이제 와서 ‘미안. 생각만 해본다고 했지, 섹스해줄 거라곤 안 했잖아?’ 라고 말해봐라. 아마 화난 공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디아나건 뭐건 눈에 뵈는 거 없이 폭주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내기의 무효화가 불가능해지면, 우리 애들한테 들켰을 때 반응이 어떨지도 뻔했다.
우리 애들이 다른 여자와의 섹스를 허락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이 할 필요가 있을 땐 해도 좋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펠리시아와의 내기는 사실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걸 내가 도발한 거니, 들키면….
젠장. 펠리시아 녀석. 쓸데없이 일을 키워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애들한테는 들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비밀은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좋다는 교훈을 오늘 아침에 막 얻은 참이라는 거지.
으음…솔직히 내키지는 않지만, 역시 말 하는 게 좋은 걸까.
괜히 나중에 들키면 더 욕먹을 것 같고.
그래. 말하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 내 행동은 빨랐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얘기도 있잖아.
나는 곧바로 손뼉을 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바넷사!"
"……무슨 일이십니까?"
"어, 어라? 바넷사? 오늘은 왠지 기분 나빠 보이네. 무슨 일 있어?"
솔직히 바넷사 표정은 여전히 읽기 힘들지만, 평소보다도 말하기 전 ‘…’이 길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 찍어본 거였는데, 내 질문을 들은 바넷사가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강아지가 아니니까 손뼉을 치면서 이름을 부르는 건 그만둬주십시오."
기분이 안 좋은 건 나 때문이었다.
"미안. 미안. 그래도 좋지 않아? 강아지. 귀엽고."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은근슬쩍 귀엽다고 돌려 말하면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역시나 우리 슈퍼 집사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응. 미안. 장난 안칠게. 여기에 모두를 불러주지 않겠어? 사라, 디아나, 레이아, 마틸다를."
"알겠습니다. 다만, 레이아님은 방금 전에 외출하셨습니다."
"뭐? 벌써? 알았어. 그럼 나머지 애들이라도 불러줘. 레이아는 내가 데려올게."
아까 아침 먹을 때 신전에 갈 거라는 얘기는 듣긴 했지만, 설마 벌써 출발했을 줄이야.
나는 레이아를 따라잡기 위해 황급히 저택을 나섰다.
바넷사 말로는 방금 전에 나갔다고 하니, 내 다리로 따라잡으면 금방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재빨리 신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서, 성자님이다아아아!"
그리고 달려 나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누군가 날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차! 젠장! 서두르느라 로브 뒤집어쓰는 거 깜박했다!
그리고 대체 어디 이렇게 숨어있었던 건지, 순식간에 내 주변을 땀내 나는 남정네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서, 성자님! 대체 저희는 언제쯤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저주를 푼 이후라니! 저희는 구체적인 일정은 모르는 겁니까?!"
으아아아! 우리 천사님 쫓아가야 되는데 길 막지 마라! 귀찮아 죽겠네!
"다들 조용!"
나는 인파를 뚫고 가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 멈춰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더는 못 참아. 구원 같은 소리 하네. 엿이나 처먹으라고 해!
말해두지만 이건 스스로를 욕하는 게 아니다.
"제 몸이 하나인 이상, 모두를 구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 성자님! 그럼…!"
내 일갈에, 사람들 사이로 동요의 물결이 번져나갔다.
그래. 새끼들아. 세상에 공짜 구원 같은 건 없어. 개나 주라고 해.
하지만 만약 여기서 그런 말을 해버리면 아마 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겠지.
그야 물론 힘으로 헤치고 나갈 수는 있을 거다.
내 구원을 바라는 건 대부분 레벨 낮은 놈들일 테니까.
하지만 교황이 날 여신의 사자라고 인정까지 했다는데, 과연 그렇게 막나갈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선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천벌 받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서! 전 지금 저주를 푸는 와중에도 틈틈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 혼자서 모두를 구원할 수 있을까를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방책을 하나 생각해냈죠!"
거짓말이 아니기는 하다.
전에 성교육 비디오 촬영 같은 걸 생각해내기도 했었잖아.
"오, 오오오오! 과연 성자님! 그, 그렇다면!"
"하지만, 이 계책을 실행하기에는 아직 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준비할 것들이 너무도 많죠.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주로 여배우라든가, 여배우 같은 게 부족하지.
"그, 그런 거라면! 저희가 뭔가 도울 일은 없는 겁니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여자 하나도 제대로 만족 못시키는 놈들이 성교육 비디오에 출연할 여자를 무슨 수로 구하게?
게다가 아무 여자나 다 된다는 것도 아니라고. 조건이 꽤나 붙는단 말이다.
그리고 그 조건 중에는, 레벨이 높을 것이라는 조건도 있었다.
레벨이 높은 여자는 당연히 프라이드도 높다.
너희 같은 놈들이 그런 여자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언젠가는 반드시 구원이 찾아올 거라고 약속하죠. 하지만 지금은 절 믿고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절 가로막고 있으면 있을수록, 구원의 때는 더 늦어진다고 생각하십시오."
"으, 으윽! 죄, 죄송합니다!"
돌려 말해서 꺼지라고 말해주자, 사람들이 그제야 허겁지겁 길을 트기 시작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으면 좀 좋아.
몰려들 때보다 현격하게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이내 거리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만, 다들 날 향해 몰려오지만 않을 뿐, 다들 하나같이 두 손을 모으고 내 쪽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만 둬라. 산 사람한테 기도를 올리다니 뭐하는 짓이냐.
그런다고 너희가 구원받는 속도가 빨라지는 게 아니라고.
아니. 애초에 정말로 구원이 가능한 건지도 의심스럽ㄴ다.
그렇게 딱 맞는 조건의 여자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어? 잠깐만. 아니. 하지만….
"구원씨!"
내 머리에 뭔가가 번뜩였을 때, 갑자기 정면에서 레이아가 내게로 달려왔다.
아무래도 아까의 소동으로 내가 있는 걸 눈치 챘던 모양이다.
내게 달려온 레이아는 바로 내 팔에 달라붙어서 팔짱을 껴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말이지 할 얘기가 있는데 레이아가 집을 나섰다고 해서 말이야. 쫓아왔지."
"네? 할 얘기요?"
"응. 저택엔 다들 모여 있을 테니까, 돌아가서 얘기할게."
팔에 느껴지는 행복한 감촉을 음미하면서 얘기했다.
조금 후에 깨질 걸 생각하면 우울해지지만, 그래도 역시 행복한 건 행복한 거다.
잠깐의 행복을 누리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저택으로 돌아가니 역시나 다들 모여 있었다.
레이아도 내 팔에서 떨어져 나와 마주보는 위치에 서게 되자, 심장이 쿵쾅쿵쾅 울리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펠리시아랑 섹스를 걸고 내기했단 얘길 해야 한단 말이지.
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네가 다들 불렀다고 들었네만, 무슨 일인가?"
"응. 그게 말이지. 실비아한테 사정을 들었거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두의 지혜를 모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응? 실비아, 결국 구원한테는 얘기 한 거야? 우리가 물어볼 땐 그렇게 대답을 안 하더니…."
"그야 실비아는 날 너무 좋아…미안. 좀 기어올라봤어."
안 그래도 지금부터 깨져야 되는데, 벌써부터 이놈의 입이 방정맞게.
자, 그럼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까.
말을 하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이왕이면 역시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말하고 싶다.
"실비아씨는 다시 성으로 돌아가신 거죠? 그만큼 중요한 일이 생긴 건가요?"
"그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에 디아나가 했던 말이 거의 맞아 떨어졌어. 공주가 또 말썽을 부려서 여왕님이 화나셨다고 하네. 여왕님이 왕위 계승을 안 해주겠다는 언급까지 하면서 둘이 대판 싸우는 바람에 실비아가 중재하러 가게 된 거야."
"왕위 계승을 안 해주겠다니.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닐세. 대체 무슨 일로 화가 난 겐가? 그것에 관해서도 들은 게지?"
"그래. 디아나는 물론 알겠지만, 여왕은 공주한테 용사의 아이를 낳으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어. 하지만 공주가 요즘 용사와의 관계 자체를 아예 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서 말이야."
"호오.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지만 그 공주가 아무 이유 없이 여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되네만."
전에 공주가 나와 반강제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디아나의 안에서 공주의 평가는 꽤나 높은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스승역할도 한 적 있다고 했으니, 성욕은 둘째 치고 능력 자체는 인정하고 있는 걸까?
"저기…그게 말이죠…실은 말이죠…."
드디어 때가 왔나.
내가 어떻게 얘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말을 흐리고 있자, 사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구원. 또 뭔가 저질렀지? 말 해."
사라야. 넌 왜 그렇게 항상 감이 좋은 거니.
"화 안낸다고 약속해줄래?"
"우리가 화날 짓을 한 거야?!"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아니요. 죄송합니다.
"음…저기…그러니까…그게 말이지.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희가 미리 알아둘 건, 내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거야."
"빨리 말하게."
계속 뜸을 들이자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는지, 디아나도 날 재촉해왔다.
"…펠리시아가 너무 들이대기에 다음에 다시 내 얼굴 볼 때까지 아무하고도 섹스 안 하고 있으면 한 번 해주는 것도 생각해본다고 말했어."
"……."
내가 빠른 어조로 내뱉듯이 순식간에 말하자, 순간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폭풍전야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이, 이 바보야! 완전히 너 때문이잖아!"
"자네는! 바보인가아! 응? 바보인가! 아니! 바보일세! 바보!"
"구원씨…."
"당신 정말 바보 아니에요?!"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순서대로 사라 디아나 레이아 마틸다의 반응이었다.
사라야. 오빠한테 너라니.
디아나야. 낭군님을 바보라고 확정짓는 건 너무하지 않냐?
천사님. 기분은 알겠는데 그렇게 애절한 눈으로 쳐다보면 데미지가 너무 큰데요.
마틸다. 심지어 너까지 날 바보라고 하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그 말들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꾹 억눌렀다.
"하, 하지…."
"잠깐 기다리게. 그럼 여왕이 그렇게까지 화난 이유도 그냥 공주가 용사와 관계를 맺지 않은 것만이 이유가 아니라는 말 아닌가?!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네. 이 몸이 알고 있는 여왕이라면 고작 그런 걸로 왕위 계승 문제까지 언급할 리가 없네!"
내가 변명을 하려고 했을 때, 디아나가 뭔가 깨달은 듯 그렇게 외쳤다.
윽. 역시 디아나. 날카롭다.
"실은 공주가 명령도 무시하고 나 같은 놈과 관계 맺는 걸 우선하니까, 여왕이 그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그랬대. 공주가 도움 된다고 우겼고, 여왕은 꼬드기지도 못하는데 무슨 도움이냐고 하고, 공주가 꼬드길 수 있다고 우기고, 결국 못 꼬드기면 왕위 계승도 안 시켜 줄 거라는 얘기가…죄송합니다."
얘들아. 얼굴이 무섭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
심지어 레이아마저도 살짝 화난 얼굴이야.
뭐야 이거. 무서워.
"그러니까 뭐야. 지금 그 여자는 구원한테 꼬리 칠 생각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실비아가 그걸 막기 위해서 여왕과 공주 사이를 중재…."
"될 거라고 생각하나?"
"…아뇨."
"애초에! 자네가! 이상한 내기하자고 제안한 게 문제 아닌가!"
"아, 아니! 솔직히 생각해봐! 그 공주가 이렇게 오랫동안 남자랑 한 번도 안 할 줄 누가 알았…아니. 그보다 난 생각만 해본다고 했다고. 섹스 한다고 한 게 아니라, 생각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가아아!"
"지, 진정해. 심호흡하고. 힛! 힛! 후우! 디, 디아나?! 잠깐! 나 마법은 정말로 약한…크헉!"
복부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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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누굴지?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실비아는 여성 기준으로 체격은 가느리고, 키는 보통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커요.
gold24k // 머리에 손 얹었다는 문장 바로 아랫줄에 품에 안았다고 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