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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의 사정
아침부터 레이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려왔다.
레이아 한 명뿐이라고는 하지만, 거짓말을 들키고 나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라와 디아나는 모른다는 확답도 받았으니,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거기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있었다.
사라와 디아나와 마틸다. 그리고 실비아까지.
"구, 구원님! 다, 다녀왔습니다!"
실비아는 평소처럼 구석에 있는 게 아니라, 내게 다가와서는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를 해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실비아가 돌아오기로 했었지.
레이아와의 행위가 너무 불타올라서 그만 잊고 있었어.
"어, 응. 실비아. 잘 다녀왔어? 어땠어? 일은 잘 풀렸어?"
"아, 아뇨. 아니. 넵. 다녀온 건 잘 다녀왔습니다. 다만 일은…."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뭔가 머뭇머뭇 거렸다.
"응? 왜 그래?"
"그, 그게…."
하지만 실비아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길 꺼려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나는 사라와 디아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 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우리가 물어봤을 때도 계속 그랬어. 아무래도 말하기 힘든 일인가 봐."
"사라는 그렇다 치고, 디아나한테마저 말하기 힘든 얘기라고? 아, 사라야. 지금 이 말은 그냥 순수하게…."
"알아, 바보야."
사라는 딱히 기분 나쁜 것도 아니란 듯이 쿨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알고 있어도 충분히 기분 나빴을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난 쿨하게 넘어가준 사라에게 감사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실비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얘기면 말 안 해줘도 괜찮아. 단, 너한테 뭐 문제생기거나, 힘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거라면 꼭 말해줘야 한다."
"네, 네헷! 괜찮슙니다!"
겨우 하루 안 본 건데도, 그 오들오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대답하는 모습은 오랜만이라고 느껴졌다.
역시 얘가 시야에 없으면 허전하다니까.
"그리고 이렇게 돌아왔다는 건, 일이 다 끝났단 거잖아?"
"아, 그, 그게…."
"응? 아냐?"
"네. 실은 그…보고하러 왔습니다. 한동안 다시 성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런가. 대체 무슨 일이기에…아니. 오래 걸릴 것 같아?"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실비아는 뭔가 원하는 것 같은 눈동자로 날 쳐다보면서 말했다.
응? 뭐지? 며칠 못 만나게 될 것 같으니 쓰다듬어 달라는 건가?
"히야아앗!"
내가 실비아의 머리를 톡톡 두들겨주자, 실비아는 식탁의 반대편 끝자리로 쏜살같이 도망갔다.
저 모습을 보니, 적어도 어디 다친 데는 없는 모양이네.
"그래도 식사정도는 하고 갈 수 있지? 밥부터 먹자."
"그, 그 말은, 성에 가있는 걸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내게 멀어져서 조금 안정된 건지, 실비아가 호흡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응. 곤란한 친구를 내버려둘 수도 없잖아? 괜히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던전에서도 집중이 안 될 테고. 괜찮아. 정 오래 걸리면 1계층 근처에서만 놀고 있지 뭐."
그 연못이 어떤 비밀을 품고 있더라도, 1계층 근처인 이상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진 못할 거다.
실비아가 없더라도 충분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성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도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닌 모양이고.
어차피 그 공주 관련 일이다. 변변찮은 일일게 틀림없다.
내가 신경 쓸 필요 전혀 없는 일.
하지만 식사를 마친 후, 성에 가기 전에 나와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는 실비아의 발언으로 그 예상은 빗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방에서 단 둘이 되자 실비아가 제일 처음 꺼낸 말이, 이런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 실은…구원님과 아주 관련 없는 얘기는 아닙니다."
식당에서와는 다르게, 실비아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 말고 다른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실비아 모드다.
"응? 뭐가?"
"공주님 얘기 말입니다. 그게 실은, 공주님이 용사와 관계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왕님 귀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으, 응?!"
진짜 예상도 하지 못하고 있던 발언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주 관련 없는 얘기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완전 나 때문이잖아!
그래서 아까 실비아가 그렇게 얘기하길 주저한 거구나. 나랑 공주랑 한 내기를 아직 우리 애들은 모르니까!
실비아야! 장하다!
"그, 그래서?"
"당연히 여왕님께서 공주님을 추궁하신 모양입니다. 공주님은 일단 발뺌을 하신 모양이지만, 구원님 관련이란 것도 당연히 여왕님의 귀에 들어가게 됐고…."
젠장. 그야 그렇겠지.
펠리시아 걔 완전 대놓고 나랑 떡치려고 들었으니까.
성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마 소문이 쫙 퍼져 있었을 거다. 그야 안 들킬 리가 없지.
"하지만 안심해주십시오. 여왕님께서는 구원님께 아마 항의조차도 하지 않으실 겁니다."
"응? 왜?"
"교단에서 구원님을 여신님의 사자로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 교황님께서도 정식으로 인정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일이 그렇게 된 건데?!
설마 마틸다랑 전에 신전에 갔을 때?!
"여신님의 사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데, 거기에 더해 디아나님마저도 계시니까요. 지금의 구원님은 여왕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위치가 되셨습니다."
그런 건가. 솔직히 그런 쪽은 문외한이라 잘 실감이 안 나지만, 나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높으신 분이 됐다는 얘기인가.
여신교와 마법협회를 등에 업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다. 그야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그럼?"
"네. 여왕님은 철저하게 공주님만 추궁하기로 하셨습니다. 애초에 그 내기 자체도 더 기분 좋은 섹스를 하고 싶다는 공주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응…. 뭐, 그야 그렇지.
내기를 제안한 건 분명 내가 맞지만, 애초에 공주가 안 받아들였으면 끝날 얘기였다.
"그래서 참다 못 한 여왕님이 드디어 폭발하셨습니다. 일부러 모험가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행정이라도 배우라고 앉혀놨는데, 널리고 널린 모험가들을 놔두고 용사의 아이를 가지라는 명령까지 어기면서 그러고 있었으니까요."
"…응? 잠깐만. 일부러 모험가들이 많이 있는 곳에 앉혀놔? 그 말은 즉, 여왕도 공주의 그…그런 걸 인정하고 있다는 거?"
"…네. 실은 예전부터 왕가의 핏줄은 다들 그…남들보다 성욕이 강하신 분들이라…. 그 중에서도 공주님은 심하게 성욕이 강하신 편이긴 하지만…그래도 일단 여왕님도 이해는 해주고 계셨습니다."
그런 거냐.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
그러고 보니 전부터 계속 그랬다.
공주의 성욕이 그렇게 강하다는데 디아나도 뭔가 반응이 미적지근했었고, 성에 있는 사람들 반응도 그랬다.
아무리 이런 세계라도, 보통 공주가 그렇게까지 성에 문란하면 조금 반발이 있어야 정상인데 말이야.
왕가 사람들은 다들 그런 거냐.
진짜 종족이 서큐버스라든가 그런 거 아냐?
안 그래도 애널라이즈로 종족도 알 수 있게 됐는데, 다음에 보면 한 번 확인해봐야지.
아니. 이왕이면 안 만나는 게 제일이지만.
"원래는 유명한 모험가들을 데려다가 성욕을 풀던 공주님이, 용사의 아이를 가지라는 명령 이후론 그마저도 못하게 됐으니, 저로선 이해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여왕님은 아무래도 다르셨던 모양입니다. 공주님을 무척이나 꾸중하신 모양입니다."
뭐, 뭘로 성욕을 풀어?
난 이제 아무래도 좋단 심정으로 얘기를 듣게 됐다.
그거, 꼭 내가 들어야만 하는 얘기니?
그냥 결론은 꾸중 들어서 공주가 시무룩해있다는 얘기 같은데, 네가 가서 한동안 달래주고 오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거기에 또 공주님이 욱하셔서 반발하신 모양이라…."
진짜냐?!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아직 이어진다고?!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아니. 됐어! 이제 더 이상 남의 집 모녀간 싸움 내용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
"여왕님께서 그렇게까지 해서 공주님이 무슨 이득이 있냐고 꾸중하자, 공주님께서도 왜 이득이 없냐고 생각하나. 구원님은 지금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남자인데, 그걸 꼬드기는 게 왕가에 왜 이득이 안 되냐고 반발하셨고…."
"뭐어?! 걔, 걔가 진짜로 그걸 생각해서 날 유혹한 거였다고?!"
가끔 머리 잘 돌아가는 애라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 위험한 애였잖아!
"아뇨. 아마 싸우는 도중 욱해서 한 말이고, 본심은 그냥 기분 좋아지기 위해서 구원님을 유혹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런 내 질문을 딱 잘라 부정했다.
야. 펠리시아. 네 제일 친한 친구마저도 널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고. 조금은 반성해라.
"아무튼, 그래서 여왕님께서도 공주님이 대들자 더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아. 얼굴도 보지 못한 여왕님. 전 충분히 이해합니다.
"디아나님의 남자를 네가 무슨 수로 반하게 꼬드기냐고 비웃었고…."
아차….
"공주님은 할 수 있다고 우겼으며…."
…….
"결국 말싸움이 격화되어, 공주님이 구원님을 못 꼬드기면 왕위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발언까지 나오게 됐다고 합니다."
"…말해두는데, 나 공주랑 결혼할 생각 없다."
"무, 물론입니다! 저도 그런 부탁을 할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그럼 나한테 왜 말한 건데."
"그, 그냥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냐…. 실비아야…. 신경써준 건 고맙지만, 그냥 모른 채로 살고 싶었어….
"아니. 애초에 공주는 무슨 자신감으로 날 꼬드길 수 있다고 우겼대."
"…다음에 만나면 섹스를 할 수 있을 테니, 그때 테크닉으로 녹여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걔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내가 레벨 100도 안됐을 때 그렇게 느꼈으면서, 뭐?
필살 콤보까지 익힌 지금의 나라면, 맘만 먹으면 복상사도 시킬 수 있어.
아니. 힐링 섹스 때문에 죽진 않겠지만.
"그래서. 그런 일에 네가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어떻게든 여왕님과 공주님 사이를 중재하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여왕님께선 절 친딸처럼 예쁘게 여겨주시니, 노력하면 어떻게든…."
그게 그렇게 쉽게 풀릴 얘기일까.
잘은 모르지만 말이야, 왕위를 물려주지 않겠단 말까지 한 걸 보면 진짜 심하게 치고 박고 싸운 거 아냐?
"…아…응. 그래. 나도 일단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은 해볼게."
"그, 그래주시겠습니까?!"
"응. 나도 실비아가 계속 성에만 있으면 곤란하고."
"구, 구, 구, 구원니이임…."
얘 다시 진지 모드 풀렸네.
"그래. 그래."
진동하는 실비아의 머리에 손을 올려주자, 실비아의 진동이 더더욱 거세졌다.
나는 그런 실비아를 아예 품에 안아서 전신으로 진동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생각해본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른 애들이랑 상담해본다고 어쩔 수 있는 얘기도 아니고.
이런 쪽으론 사라나 레이아는 물론 도움이 될 수 없고, 게다가 이것만큼은 디아나도 어쩔 수 없다.
전에 디아나한테 들은 바로는, 디아나는 아무래도 그런 정치 쪽으로 아예 간섭을 안 한다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나라의 높으신 분들도 다들 디아나를 대우하고 깍듯이 대하지만, 그렇다고 디아나가 정치에 관여하는 건 아니다.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 취급이라고 할까.
디아나가 나서버리면 그걸 반대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야. 힘으로 눌러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디아나는 그런 쪽으론 전혀 관여를 안 한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마틸다 역시 높으신 분이긴 해도, 종교와 정치는 서로 간섭을 안 하는 모양이니까 말이지.
나도 일단 얘기를 들어보니 높으신 분이 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교단과 디아나의 힘을 뒤에 업었으니 그런 거다.
즉, 여왕과 공주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엔 실비아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손 쓸 방법 아예 없음인가.
굳이 말하자면 내가 펠리시아의 꼬드김에 넘어가버리면 되는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는 없다.
"어쩔 수 없네. 일단 실비아라도 가서…실비아. 실비아?!"
"아, 안 쥬겄슙니다아아…."
아니. 오늘은 아직 죽었다고 안 했어.
나는 품안에서 녹아내려가고 있는 실비아를 황급히 해방시켜줬다.
"아무튼 성에서 잘 하고 있어봐. 이쪽은 이쪽대로 대응을 생각해보고 있을게."
결국 그렇게 말하고, 실비아를 성으로 돌려보내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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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의외로 일찍 써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