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409화 (39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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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첼과의 식사

    물론 발소리가 멀어졌다고 해서 안심은 할 수 없다.

    쟤들은 지금 막 식당에 들어온 거니까 말이야.

    그저 다른 자리로 간 것뿐이다.

    게다가 방금 전 레이첼 누님의 말 때문에, 괜히 이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엿볼지도 모를 일이다.

    젠장. 그럼 난 대체 여기서 어떻게 나가면 좋단 말이야.

    어쨌든 지금의 난 이 테이블보 밖의 상황을 알 수도 없는 입장. 성급한 행동은 금물이다.

    나는 일단 여기서 얌전히 레이첼 누님의 신호를 기다리기로 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적절할 때 레이첼 누님이 알려주시겠지.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레이첼 누님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냥 내게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아예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이 누님 잠들거나 기절하신 건 아니겠지?

    내 쪽에서 불러봐야 하나.

    나는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다리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참고로 이제 속옷은 안 보인다.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로 다시 치마 가운데를 손으로 꾹 누르고 계시거든.

    그런 걸 보면 일단 내가 밑에 있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말이야.

    나는 최대한 오해받지 않도록 레이첼 누님의 다리를 노크하는 손등으로 톡톡 두드렸다.

    "꺄앗!"

    하지만 그것조차도 레이첼 누님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는지, 누님은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윽. 누님. 또 그런 소리를 내시면 주목을 받잖아요.

    "구, 구원씨?"

    누, 누님! 제 이름을 그렇게 부르시면 어떻게해요!

    사라 쟤가 보기보다 귀가 엄청나게 좋다고요.

    안 그래도 방금 비명으로 다시 주목하고 있을 텐데!

    "아, 그, 그런가…나, 나오셔도 돼요."

    하지만 그런 내 불안감과는 상관없이, 레이첼 누님은 목소리도 줄이지 않고 내게 그런 말을 해왔다.

    나, 나오라고? 뭐, 뭐지? 혹시 셋이서 다른 식당으로 간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그건가. 어차피 들켰으니 나오라는 건가.

    내가 테이블보를 나가면, 셋이서 날 노려보고 있는 전개인 건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 숨지 말 걸.

    차라리 내가 먼저 아는 척하고 레이첼 누님과 여기 있는 이유를 설명했으면, 그냥 구박 좀 받고 끝났을 텐데.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우리 애들을 보자마자 숨어버린 그 순간, 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거다.

    그래. 난 오늘 여기서 죽는 거다.

    훗.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다니. 죽을 거라면 그런 죽음도 괜찮지.

    좋아. 원하던 바다.

    자, 와라. 사라든, 디아나든, 레이아든!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테이블보에 나가자마자 양 팔을 쫙 벌린 채로 섰다.

    "구, 구원씨?"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는 레이첼 누님과, 갑자기 튀어나와서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 애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마, 마법으로 장막을 쳤어요. 남들에게는 저희 모습이 보이지도,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아요."

    그리고 당황하는 내게, 레이첼 누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쪽팔린다.

    나는 황급히 팔을 내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레, 레이첼 누님도 이런 마법을 쓸 줄 아셨군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진작 말씀 좀 해주시지.

    괜히 겁먹어서 테이블보 밑에 쭈그리고 앉아있었잖아.

    "아, 아뇨…. 여긴 그런 장치도 마련되어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첼 누님이 테이블 위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엔 조그만 장치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 그런가. 이거 그런 장치였구나. 그냥 장식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고급 레스토랑. 별게 다 있구나.

    하지만 이런 게 있었다면 그냥 처음부터 썼으면 좋았을 텐데.

    "와. 이런 것도 있었네요. 죄송해요. 저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라서 계속 숨어있었어요."

    "그, 그렇군요…."

    나는 조금 레이첼 누님을 원망스런 눈으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레이첼 누님은 제대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뭐지? 아, 그런가. 디아나를 존경하는 레이첼 누님이니 만큼, 디아나한테 들키니 갑자기 죄책감이 생긴 건가.

    "괜찮아요. 누님. 어차피 디아나 찾을 때 도와준 보답으로 하는 식사잖아요. 누님은 디아나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요."

    "네, 네?"

    레이첼 누님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날 쳐다봤다.

    절 위해서 안 그런척 하는 거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다 아니까요.

    "하지만 누님도 너무 당황하신 거 아니에요? 아무리 디아나를 보내기 위해서라지만 그런 변명을 하시다니. 그런 변명을 해버리시면 제가 들켰을 때 더 위험해지잖아요. 누님 의외로 위기에 엄청 약하시네요."

    "네, 네에?!"

    안 그래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첼 누님은, 이번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왜요?"

    그 격렬한 반응에는 과연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구원씨 지금 그 말 진심으로…구원씬 대체 얼마나…하아아아…."

    레이첼 누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어깨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 누님?"

    "아니. 아니에요. 네. 그냥 디아나님을 갑자기 만나니 너무 당황해서요. 쫓아내려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막 내뱉어버렸네요."

    누님은 엄청나게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확실하게 맘에도 없는 소리라고 들으면 조금 상처받는데 말이야.

    "죄송해요. 보답으로 식사 대접해드리는 자리인데 괜히 놀라게 해서."

    "아뇨. 다른 분들을 만난 건 우연인걸요. 식당 선정도 좋았고요. 구원씨가 사과할 건 아니죠. 그보다 구원씨는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이나 생각하시죠? 말해두지만 이 마법 장막, 테이블 근처밖에 효과 없어요. 나갈 땐 다른 분들께 보일 거예요."

    "그, 그런가! 어, 어떡하면…."

    "하아…세 분은 저쪽 테이블에 앉아서 저희처럼 마법 장막을 치신 모양이에요. 이쪽 기둥을 이용해서 사각으로 빠져나가면 아마 들키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첼 누님이 가리킨 곳은, 확실히 공간이 어색하게 텅 비어있는 곳이 있었다.

    과연. 마법 장막을 치면 저런 식으로 보이는 거구나.

    그래서 종업원들의 테이블 안내도 필요한 거고 말이야.

    "가, 감사합니다. 누님!"

    "아뇨. 그럼 슬슬 갈까요?"

    "네, 네? 하지만 음식이…."

    "전 충분히 배부르네요. 구원씨도 이런 상황해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요."

    "절 배려하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오늘은 보답차원에서 대접하는 자리니까…."

    "배부르다고요."

    "넵."

    나는 레이첼 누님의 호의를 감사히 받들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멋지게 계산까지 내가 마치고 같이 나가는 게 맞겠지만, 그래선 들킬 확률이 너무 높다.

    나는 누님께 식사비를 건네줘서 계산을 부탁하고, 일단 은신술부터 사용했다.

    레벨이 낮아서 이걸 쓴다고 안 보이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빨리 이동하면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게 만드는 정도의 효과는 있을 거다.

    그리고 레이첼 누님이 마법 장벽을 나가기 직전에, 엇박자로 먼저 식당 밖을 향해 내달렸다.

    성공이다! 해냈어!

    식당 밖에 나서서야, 나는 겨우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잘 됐네요. 아무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세분은 눈치 채지 못하신 모양이에요."

    그리고 내 뒤를 이어서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온 레이첼 누님이 그렇게 확인까지 해주셨다.

    하지만 내 기분 탓일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레이첼 누님의 말투가 미묘하게 차가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누님. 감사합니다!"

    "아뇨. 그럼 이만 헤어지죠."

    응. 역시 기분 탓이 아니다.

    "네, 네?!"

    "디아나님 찾기를 도와준 보답을 하겠다는 목적은 달성 하셨잖아요? 게다가 저랑 이 이상 오래 있을 수도 없는 거 아니에요?"

    "그, 그건 그렇지만…."

    아니. 긍정했는데 왜 더 기분이 나빠지시는 것 같지.

    "누, 누님?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아뇨. 구원씨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잘못한 게 있다면 저한테 있죠."

    "아뇨. 그러니까 아까 하신 말씀들은 충분히 이해한다니까요. 저도 테이블 밑에 숨을 정도로 당황했으니, 누님이 그렇게 당황하신 것도…."

    누님. 그 눈빛. 마치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케 하네요.

    그때도 그런 영업 스마일로 제가 헌팅하는 걸 거절하셨죠.

    "어머. 이해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오늘 제법 즐거웠어요. …중간까지는요."

    "아, 네, 넵! 안녕히 가세요!"

    레이첼 누님은 그렇게 영업 미소를 지은 채로 우아하게 인사를 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우아한 동작과는 다르게, 발걸음은 묵직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대체 뭐지. 나 중간에 말실수라도 했나?

    생각해보자. 레이첼 누님이 갑자기 저렇게 되신 건 분명 테이블 밑을 나와서…아니. 그보다 조금 더 나중인가?

    으음…. 모르겠다. 전혀 짐작 가는 게 없다.

    하지만 레이첼 누님이 아무 이유 없이 저러실 분도 아닌데?

    지금 따라가 봐야 되나?

    아니. 화난 이유도 모르는데 지금 따라가 봤자 화가 풀릴 리가 없다.

    그냥 나중에 화 좀 풀리셨을 때 만나서, 그때 사과하고 이유도 좀 물어보기로 하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택으로 터벅터벅 돌아갔다.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일단 씻기부터 했다.

    온몸을 벅벅. 몇 번이나.

    레이첼 누님이 그런 말을 해버리신 이상, 어떻게 해서든 레이첼 누님과 있었던 게 나라는 걸 들키면 안 된다.

    특히 제일 위험한 건 레이아의 후각이다.

    내 코엔 전혀 냄새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레이첼 누님의 체취를 지우기 위해서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벌써 몸을 씻기 시작한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괜찮겠지? 씻는 내내 물의 정령이나 바람의 정령까지 불러서 몸에 별 짓을 다 했는데, 아직도 냄새가 남아있을 리 없겠지?

    그걸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구원씨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난입해온 레이아가, 욕조에서 씻고 있는 나에게 달려들어 온 거다.

    "우왓! 레, 레이아!"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레이아는 그런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풍만한 가슴에 내 얼굴을 꼬옥 끌어안아왔다.

    그리고는 내 머리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뭐, 뭐야? 설마 벌써 들킨 거야?!

    "구원씨. 대체 어디 계셨어요."

    하지만 과연 두 시간 넘게 몸만 씻어댄 보람이 있었는지, 레이아는 레이첼 누님의 냄새를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자, 조금 이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어째선지 레이아는 현재 목욕 가운 차림.

    그리고 여전히 목욕가운 차림이 노출이 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앞도적인 볼륨감을 자랑하고 계셨다.

    덕분에 이렇게 껴안자 한껏 드러난 가슴골에 내 얼굴이 그대로 파묻혔고, 코 안 가득히 막 씻고 나온 레이아의 달콤한 향기가 퍼져갔다.

    거기에 더해 뺨에 닿은 물컹한 감촉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왜 그래? 레이아, 무슨 일 있어?"

    "구원씨도 참. 무슨 일 있어? 가 아니에요.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구원 씨를 못 보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으, 응? 어제"

    그러고 보니 어제 어쩐지 식사 때를 빼면 레이아를 본 기억이 없다.

    아니. 생각해보니 레이아 뿐만이 아니다. 사라나 디아나도 그랬다.

    "네. 사라씨도 디아나씨도 너무 한다니까요. 전 구원씨랑 있으면 무조건 상냥하게 대할 거라면서 억지로 붙잡아두고."

    응? 그게 무슨…아, 아아! 그러고 보니 어제 아침에 그런 말 했었지.

    오늘은 나한테 상냥하게 하는 거 금지라고.

    어쩐지 셋 다 안 보인다 싶었더니, 그러고 있었던 거였어?

    미안. 난 오늘 마틸다나 실비아랑 붙어있느라 전혀 몰랐어.

    그렇구나. 그럼 아침에 레이아의 기분이 좋았던 것도, 내가 친구 만나러 간다니까 시무룩해있었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였던 건가.

    식당에서 사라와 디아나가 레이아를 달래줬던 건, 자기들이 어제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으니 미안해서 그랬던 거고.

    그런 고급 레스토랑에 셋이 온 것도 분명 레이아를 달래주기 위해 왔던 거겠지.

    레이아는 의외로 먹는 걸 좋아하니까.

    그 영양분은 전부 특정 부위에 쏠리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이걸로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하지만, 드디어 구원씨하고 이렇게 있을 수 있어요."

    레이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 얼굴을 꽉 껴안고는, 마치 동물들이 자기 냄새를 마킹하는 것처럼 자신의 뺨을 내 정수리 부근에 마구 비벼왔다.

    안면 전체에 느껴지는 가슴의 감촉과 정수리에 느껴지는 레이아의 부드러운 뺨의 감촉.

    전신에 느껴지는 레이아의 행복한 감촉과, 레이첼 누님과의 식사를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휩싸여서 나는 온 몸에 힘이 쫙 풀려서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행복사할 수 있을 것 같아.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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