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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07화 (39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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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과의 식사

물론 이렇게 가는 척 하더라도, 내가 지금 갈 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점심시간 때까진 여기서 버텨야한단 말이지.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때문에 호인족 놈이 이렇게 달라붙어 와도 떼어놓을 방법이 없었다.

"넌 할 일도 없냐. 파티 찾느라 바쁜 거잖아. 좀 가라."

"하, 하루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보단 구원님과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뭐야 이거. 혹시 게이 아냐?

아니. 그래도 3계층에 갈 정도의 레벨이면 여자랑 하긴 한다는 건데.

여자랑 엉덩이로 해도 레벨이 안 오르는 판에 남자끼리 한다고 레벨이 오를 리 없으니까.

…뭐. 됐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난 그냥 놈을 떨어뜨리기 포기하고 시간이나 때울 겸 잡담이나 하기로 했다.

이 녀석은 조금 태도가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달려들지는 않는 만큼 다른 놈들보단 조금 더 낫다.

모험가 놈들은 기본적으로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놈들이니까 말이야.

이런 점에서 상대하기 편하단 말이지.

"흐응. 그러니까 던전에 계속 다니는 이유가, 던전의 비밀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노래를 만들고 싶어서라고?"

나는 별 흥미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아니. 실제로 별로 흥미 없다. 지금 이 대화도 완전히 시간 때우기고.

하지만 이 녀석. 좀 개성이란 걸 가져라.

그 이유, 판타지 세계에서 주인공의 동료가 되는 음유시인이라는 놈들이 매번 떠들어대는 소리잖아.

영웅의 일대기를 옆에서 보고 노래를 만들고 싶다든가. 너무 뻔하잖아.

그야 그런 일을 겪고도 모험가를 계속할 정도니, 본인에겐 소중한 꿈이겠지만 말이야.

아니. 잠깐만. 주인공의 동료?

"네! 그리고 구원님이야 말로, 던전의 비밀을 파헤쳐내실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인족은 그렇게 말하며 뜨거운 눈길을 내게 보내왔다.

역시나. 그러니까 사내새끼는 동료로 안 받는다고 새끼야.

다른 미인들이 파티 맺자는 것도 여차할 때 힐링 섹스를 발동하기 힘들어진단 이유로 거절했는데, 내가 사내새끼 같은 걸 파티로 받을 것 같아?

이 내 마음은 죽는 순간까지도 변치 않을 거야.

디아나 덕분에 수명이 무한이나 마찬가지지만.

"아, 시간 다 됐네. 그럼 난 간다."

대놓고 파티에 끼워달라는 놈을 철저히 무시하고, 나는 쿨하게 가기로 했다.

뒤에서 놈이 당황하며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한다.

미인과의 식사가 코앞까지 닥쳤는데, 저런 놈에게 계속 신경 쓰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아직 점심시간이라기엔 시간이 살짝 이르긴 하지만, 레이첼 누님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곳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그리고 늦는 것보단 조금 빨리 도착하는 게 낫지.

그래서 겨우 레이첼 누님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곳까지 도착했다는 얘기지만, 나는 벌써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길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드 직원용 기숙사라는 점도 있어서 길드와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여기가 기숙사라는 거다.

당연한 얘기지만, 레이첼 누님이 사는 건물은 여자만 사는 곳이었다.

그리고 물론 관리인도 존재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금남의 구역이라는 거다.

저길 어떻게 뚫고 들어가서 레이첼 누님을 불러오라는 거지?

다시 한 번 쪽지를 바라봤지만, 거기엔 확실히 방 번호까지 쓰여 있었다.

방 번호까지 쓰여 있는 걸 보면 분명 문 앞까지 마중 나오라는 얘기일 텐데.

아니. 이 세계는 여자 기숙사라도 내 상식과는 다르게 금남의 구역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

돌파해볼까.

"이봐! 당신 뭐야?! 여긴 남자 출입 금지야!"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돌파해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제지당했다.

"여기 사람한테 용무가 있어서 왔는데요. 약속도 돼있어요."

"약속? 누구하고?"

"안내원을 하고 있는 레이첼이란 분이요. 307호에 사는…."

"핫!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장! 꺼져! 이 스토커가! 대체 방 호수는 어떻게 안 거야?!"

관리인은 레이첼 누님의 이름을 듣자마자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치 나 같은 놈 지금까지 많이 봤다는 듯 익숙한 태도였다.

그 태도에 무심코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눌렀다.

여자로 태어난 걸 고맙게 생각해라.

"일단 방에 가서 확인이라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구원이라고 하면 알 텐데."

은근슬쩍 자신이 성자라는 어필을 해봐도, 관리인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모르는 거냐! 명백히 이방인 이름이잖아! 요즘 이방인도 없다면서! 대체 왜 눈치를 못 채는 건데?!

"이봐요. 저 몰라요? 성자 구원. 여신님이 보내주신…."

"성자 같은 소리 하네. 이방인은 전부 여신님이 보내잖아. 설마 이 세계에선 이방인이 상식이란 것도 모르는 건가?"

그딴 상식은 알면서 요즘 진짜 성자가 나타났단 상식은 왜 모르는 거냐.

기숙사만 지키면서 처박혀 살았나.

나는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냥 이대로 뚫고 갈까?

아니야. 겉보기엔 허술해보일지 몰라도, 분명 방비가 철저히 되어있겠지.

레이첼 누님을 따라다니는 놈들도 상당히 찾아왔던 모양인데, 그 중에는 분명 모험가들도 다수 있었을 테니까.

이 관리인의 태도를 보면, 그런 모험가들을 전부 격퇴해낼 수준은 된다는 얘기다.

그럼 암살자의 스킬을 살려 잠입을…아니. 내 암살자 레벨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나.

그렇다면 남은 건….

나는 하는 수 없이 스스로의 최고 장점을 살리기로 했다.

"이봐."

관리인을 부르면서, 로브의 후드를 뒤로 젖혀 얼굴을 드러낸다.

그리고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거 참 끈질…아…."

짜증난단 표정으로 내 쪽에 다시 시선을 돌리던 관리인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내 작전은 바로 이거다.

최고의 장점. 매력 수치가 엄청나게 높은 걸 이용한 미남계!

참고로 이런 짓을 하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기도 하다.

이거 은근히 긴장되네.

안 통하면 내 프라이드가 박살이 나버릴 거야.

"아아…아아아…."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천천히 관리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관리인 역시 떨리는 다리를 억누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등은 이내 벽에 부딪히게 됐고, 나는 그런 관리인의 머리 위로 팔꿈치를 대고 벽에 기댔다.

지금거리에서 바라보게 되자, 관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관리인의 턱에 손가락을 대서 살짝 그 고개를 위로 들게 했다.

그럼에도 역시나 관리인은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좋아. 먹혔어! 먹힌다고!

봤냐, 얘들아! 내가 이정도야!

하면 할 수 있는 놈이라고!

"아름다운 아가씨, 제…."

"……구원씨. 지금 거기서 뭐하시는 건가요?"

느끼한 목소리로 용건을 말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헉! 레이첼 누님?!"

거기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레이첼 누님이 계셨다.

복장은 평소의 안내원복이 아닌 사복.

전에도 잠깐 사복차림을 본적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 복장은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가씨 느낌 물씬 풍기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는 청순한 느낌을 주면서도, 그 매력적인 몸매는 확실히 섹시미도 더해주고 있었다.

노출은 심하지 않았지만, 치마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종아리나 소매가 없이 드러난 새하얀 어깨가 눈부셨다.

뭐, 한 마디로 말해서 예쁘다는 얘기다.

평소에도 예쁘셨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말이다.

"아, 누, 누님. 그게…예, 예쁘시네요."

"어머. 고마워요. 그래서 지금 거기서 뭐하시는 건가요?"

"자, 잠깐만요. 이건 말이죠. 그게, 이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들여보내주려고 하질 않아서 말이죠."

"어, 어머.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말 하는 걸 잊고 있었네요. 저 너무 들떠…정신이 없어서 그만."

내 말을 듣고 대충 상황을 짐작한 건지, 레이첼 누님이 바로 사과를 해왔다.

"아, 아뇨. 사과하실 것까지는."

의외로 레이첼 누님이 순순히 사과해줘서, 나도 조금 놀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레이첼 누님이 나한테 무슨 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애들처럼 질투를 할 리가 없다.

아까 말투가 차가웠던 건 말 그대로 황당해서 그랬던 거겠지.

식사 대접한다는 놈이 여자나 꼬드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애초에 여자를 꼬드긴다는 것 자체가 오해니까, 나도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다.

그야 레이첼 누님이 우리 애들한테 이런 모습을 고자질하면 조금 곤란해지지만…말 안하시겠지?

"그럼 구원씨. 갈까요."

레이첼 누님은 여전히 관리인과 가까이 서 있는 내 팔을 끌어안고는, 조금 힘을 줘서 끌어당겼다.

"아, 네, 넵."

갑자기 팔짱을 껴서 놀랐지만, 팔에 닿은 훌륭한 감촉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밖에 나와서, 딱히 어딜 가자는 말도 없이 우리는 천천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혹시 레이첼 누님도 생각해둔 식당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 이건 레이첼 누님의 주도하에 길은 간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정처 없이 걷는다는 느낌인데.

그럼 내가 은근슬쩍 식당 쪽으로 걸음을 유도해야 되나?

"하지만 기숙사에 잠입하려고 관리인을 꼬드길 생각을 하시다니…. 구원씨도 보기보다 손이 빠르시네요? 디아나님마저 계시는데 파티원은 점점 더 늘어나시고."

"아, 아니. 그게 실은 그런 식으로 여자를 꼬드기려고 해본 건 처음이에요. 도저히 들어갈 방법이 안 떠올라서 되든 안 되든 일단 뭐든 해보잔 생각에…."

"흐응? 정말일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첼 누님은 날 놀리듯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나는 겨우 긴장감이 조금 풀어지는 걸 느꼈다.

실은 이런 식으로 여성과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애들 상대로도 이런 데이트 같은 걸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한 건 서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 다음이다.

그 전에는 밖을 다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다 같이 몰려다니는 편이었고.

하지만 그렇구나. 그냥 친구 대하듯이 대하면 되는 거구나.

상대가 예쁜 누님이라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럼요. 애초에 제 주변엔 여자들은 레이첼 누님을 포함해서 미남계 같은 건 절대 안 통할 사람들밖에 없는걸요."

"후훗. 그럼 그런 걸로 해둘게요."

그렇게 미소 짓는 레이첼 누님 역시, 그냥 친구한테 장난치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뭐, 팔에 닿는 가슴의 감촉 때문에 마냥 친구라고 인식하기 힘들긴 했지만.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이것보다 더 대단한 감촉도 맛봤잖아.

우리 천사님의 감촉을 떠올려. 그렇다면 이 시련도…아, 이거 역효과다.

나는 물건이 커지려는 걸 마나를 돌려 황급히 억눌렀다.

"그럼 누님 혹시 알아두신 식당이라도 있으신가요?"

"어머? 오늘은 구원씨가 에스코트해주는 거 아니었나요?"

너무 신경쓸 거 없이 편하게 대하잔 생각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지만, 들여오는 대답은 역시나 부정이었다.

그럼 대체 우린 지금 어딜 향해 걷고 있는 거야.

이쪽으로 가면 상점가. 생각해뒀던 식당은 저쪽이라고.

"물론이죠. 맡겨두세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발걸음을 뒤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첼 누님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은 채, 여전히 정면을 향해 걸어갔다.

팔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때문에, 그다지 힘을 줄 수 없는 나는 그대로 레이첼 누님에게 끌려가는 처지가 됐다.

"누, 누님? 제가 생각해놨던 식당은 저쪽인데요?"

"네? 어머? 벌써 가시게요?"

벌써라니. 그야 식사 약속을 했으니까 만나자마자 가는 게 당연하잖아.

그야 아직 점심시간이라기엔 시간이 조금 이르긴 하지만 말이야.

"혹시 저랑 있는 게 싫으신가요? 빨리 약속했던 식사만 해버리고 헤어지고 싶어요?"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누님이랑 이러고 있는 거 엄청 기뻐요! 계속 이러고 있고 싶어요!"

레이첼 누님의 실망스러운 표정에, 나는 반사적으로 조금 수위가 위험한 발언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어머? 후훗. 고마워요. 혹시 아무 여자한테다 다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죠? 디아나님한테 이를 거예요?"

"누, 누니임…."

제발 그것만은…이번에야말로 진짜로 마법에 통구이가 돼버려.

"후훗. 장난이에요. 싫은 게 아니라면 조금만 어울려줄 수 있을까요? 전에도 말했지만, 휴가를 쓴 건 오랜만이거든요. 조금 이렇게 돌아다니고 싶은 기분이에요."

누님의 그 장난스런 미소에 이끌려서, 우리는 일단 상점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독자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고 보니 새해 인사를 안 썼다는 게 이제 기억났네요.

설날에 씬 고쳐쓰느라 멘탈이 터져서요.

다음 편은 아마 2시간 후 쯤에 올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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