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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374화 (35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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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용사

    "아, 맞다. 바넷사."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조용히 식당을 빠져나가려던 바넷사를 따라가 불러 세웠다.

    "네. 메이드 복이라면…."

    그러자 바넷사는 곧바로 그 얘기를 꺼냈다.

    반사적으로 이런 소리를 하다니. 설마 얘 눈에는 내가 매일 메이드 복 타령만 하는 놈으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주 정확히 봤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니. 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그야 메이드 복은 빨리 돌려줬으면 좋겠지만. 애초에 이미 빨아 놓은 거잖아? 왜 안 가져오는데?"

    "…구원님이 항상 다른 분과 함께 계셔서 그랬습니다."

    그, 그거야…그럴 지도 모르지만.

    "크, 크흠. 아무튼!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냐. 오늘은 손님이 올 거다. 미리 알아두라고."

    "손님…말입니까?"

    "뭐냐? 그 시선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녀석. 분명 방금 변변치도 않은 생각을 했을 게 틀림없어.

    ‘구원님이 집에 초대할 친구도 있었습니까?’ 같은 생각 말이야.

    "크흠. 아무튼 오늘은 그 용사가 올 거야."

    "…무슨 일로 그자가 오는 것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아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자기랑 결투해서 이기면 알려준다고 하기에 그러자고 했어."

    "…별 일 아닌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분들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신 겁니까? 그리고 디아나님의 말씀은 기억하고 있지 않으신 겁니까? 가시기 전에 사고는 치지 말라고 그렇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바넷사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고 지적을 해왔다.

    그 얘길 꺼내면 조금 약해지는데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얘기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예상에 불과하지만, 디아나가 지금 저택에 없다는 것도 그 쓰레기가 그렇게 당당히 결투를 신청한 이유 중 하나일 테니까.

    디아나가 던전에 갈 때에 마차를 타고 전혀 숨기지도 않은 채 당당히 갔으니까 말이야.

    명색이 귀족이니 지금 디아나가 부재중이란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겠지.

    "괜찮다니까. 정말 순식간에 끝날 거야. 내 스킬은 매력에 비례하거든. 너같이 예쁜 애도 내 스킬 한 방 맞고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렸는데, 그 용사가 버틸 수나 있을 것 같아?"

    "…읏!"

    저번에 있었던 얘기를 꺼내자, 바넷사가 침음성을 흘리고는 황급히 주변에 누가 없는지 살폈다.

    자세히 보면 얼굴도 살짝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역시 아무리 무뚝뚝한 척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여도 그날 일이 부끄럽기는 한 모양이다.

    괜찮아. 여기 누가 있을 거라고. 만약 있다면 항상 날 스토킹하는 실비아 정도지만, 실비아는 내가 방금 식사하다가 충분히 괴롭힌 덕분에 지금 식당의 의자 위에 녹아내려있는 상태다.

    어제 그렇게 욕구를 해소시켜준 덕분에 내가 괴롭혀도 다시 느끼지는 않게 된 모양이지만, 여전히 조금만 만져도 진동하는 건 변하지 않았단 말이지.

    특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말이야.

    "게다가 여차할 땐 바넷사도 있잖아. 혹시라도 결투 도중 내 목숨이 위험할 것 같다 싶으면 난입해서 막아달라고.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잘 부탁해."

    바넷사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바넷사는 그날 밤 얘기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당황했던 건지, 날 잡을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내가 벗어나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도망가지 않고 제대로 나오다니! 그 용기만큼은 칭찬해주지! …자기 저택이라고 뭔가 치사한 짓을 해놓은 건 아니겠지? 지고의 대마법사님의 힘을 빌리거나…."

    그리고 쓰레기는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날 처리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 거린다는 표정으로 와서는, 또 다시 그렇게 없어 보이는 발언을 했다.

    "안했다니까 그러네. 너도 지금 디아나가 여기 없는 것 정도는 알 것 아니야. 게다가, 디아나가 그럴 애로 보이냐? 너도 디아나의 공명정대함은 믿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결투를 신청한 거잖아? 정당한 결투로 인해 날 다치게 한 거면, 디아나도 아무 말 안 할 거라고 믿고 말이야."

    "으으윽…. 그, 그건…!"

    내가 말에 쓰레기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찌그러졌다.

    역시 그런 거였냐. 하긴. 어쩐지 내가 궁금한 게 있단 걸 알자마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결투 얘기를 꺼내더라.

    "저게 용사…."

    사라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쓰레기를 바라봤다.

    그 마음 잘 안다. 저런 놈이 자신과 같은 특수직에 같은 종족. 일단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혈연관계마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야 복잡한 심경이겠지.

    "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개성적인 분이시네요."

    게다가 레이아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천사님. 어쩜 말도 저렇게 예쁘게 하실까.

    그냥 솔직하게 생각보다 훨씬 못생기고 찌질한 놈이라고 해줘도 되는데.

    "하지만 구원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분, 강하신 거죠?"

    그리고 레이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일단 바넷사와 이야기 후, 레이아에게도 용사와 결투를 할 거라고 얘기는 해둔 상태였다.

    아직도 사라가 용사란 걸 밝히지 않은 만큼, 용사운운 얘기는 빼고 그냥 마인이란 종족에 관해 알아볼 게 있다는 식으로만 얘기했지만 말이다.

    "그럼. 걱정 마.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회복 마법은 준비해주고 있을래?"

    "그거야 물론이지만요…. 그래도 되도록 다치시면 안돼요? 저 슬퍼할 거예요."

    "그거 큰일이네. 우리 천사님이 슬퍼한다니. 절대 다치면 안 되겠어."

    "정말로…농담이 아니니까요?"

    "응. 알았어."

    "이이이익! 네 녀석!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냐?! 빨리 준비를 하지 못해?! 애초에 뭐냐 그 미인들은!"

    레이아와 그런 대화를 하고 있자 놈이 성을 내면서 말했다.

    짜식. 부러워하기는. 뭐, 남자라면 부러워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내 주위에는 지금 사라와 레이아, 실비아에 마틸다, 덤으로 바넷사까지 있으니까 말이다.

    "내 여자들인데."

    "크으으으으윽!"

    놈은 눈이 새빨개져서는 당장이라도 날 죽이고 싶다는 듯이 몸을 들썩였다.

    그러면서도 마틸다한테 쫄아서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는 게 묘하게 웃겼다.

    "사내새끼가 질투는. 추하다. 인마."

    "다, 닥쳐라!"

    그래도 질투 안 했다고는 안 하는구나.

    이 녀석, 찌질하기는 하지만 의외로 솔직한 놈이란 말이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대놓고 무서워하는 것도 그렇고, 자기감정을 바로 겉으로 표현하는 놈이다.

    아무튼 나는 놈을 데리고 지하에 있는 넓은 방으로 향했다.

    여기는 디아나가 새로운 마법 같은 걸 익히고 시험해보는 장소라고 한다.

    때문에 디아나가 전성기 때 모든 마법을 퍼부어 엄청나게 튼튼하게 만들어놨다든가.

    나와 저 쓰레기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벽에 상처 하나 나지 않을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지.

    "좋아. 그럼 해볼까. 결투. 룰은 어떻게 할까? 먼저 항복을 외치거나 전투불능 상태가 되면 끝. 어때?"

    "…문제없다. 내가 이기면 뭐든 원하는 걸 들어준다는 말,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지?"

    그런 말 했던가? 제대로 기억 안 나는데. 뭐, 어차피 이길 거니까 상관없지만.

    "그래. 너야 말로 내가 이기면 질문에 대답하겠단 말 잊지 말라고."

    "아직까지도 날 이길 생각을 하고 있다니. 용사의 위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방인의 무지함에서 오는 오만인가. 주위 여자들도 크게 경고를 안 해줬나 보지? 그걸 보면 네 여자라는 그 여자들도 생각보다 널 좋아하는 건…."

    "야. 전부터 생각했는데 말이야."

    "뭐냐?"

    "너 레벨은 전투로 올렸을 거 아냐. 그럼 던전에 다닌 거 아냐?"

    "훗 잘 아는군. 그러고 보니 네놈도 던전에 다녔다고 하더군. 혼자 어디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혼자서 5계층까지 간 강자다. 어때? 이제 좀 겁이 드나? 무릎 꿇고 울면서 빌면 그냥 내가 이긴 걸로 치고 용서해줄 수도…."

    "너 최근에 길드에 간 게 언제야?"

    "이이이익! 2년 전이다! 뭐냐?!"

    내가 계속 말을 끊자 화났는지, 놈은 이를 갈면서 대답했다.

    2년 전인가. 이거 그럼 진짜로 내가 던전에서 뭘 하고 다닌 건지 모르는 건가?

    "아냐. 그럼 시작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인벤토리에서 실비아의 검을 뽑아들었다.

    "바벳가의 검…. 설마하니 그런 장비를 믿고 날 이겨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좋다."

    내 검을 보고 중얼거리더니, 허리춤에 찬 두 개 의 검 중 하나를 뽑아들었다.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 그 검은,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명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용사의 검이라는 게 어울릴만한 물건이다.

    하지만 놈은 그 검을 역수로 쥐더니, 곧장 바닥에 내리 꽂아 넣으려고….

    "이익! 으으윽!"

    저 녀석 바보 아냐.

    디아나가 자기 마법에도 안 부서질 정도로 튼튼하게 만든 방이라니까.

    고작 너 따위가 용 써본다고 바닥에 그게 꽂아지겠냐?

    "후훗."

    녀석은 결국 포기하고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더니, 이번에는 다른 쪽 검을 꺼내들었다.

    그 검은 방금 전 검과는 다르게, 아무런 특징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철검이었다.

    "봤다시피 나도 명검을 휘둘러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봐주도록 하지. 난 정정당당한 용사니까. 이 철검으로 널 상대해주도록 하겠다."

    이제 와서 똥폼 잡아봤자 늦었다 새끼야.

    게다가 말이야.

    "애초에 자기보다 레벨 한참 낮은 상대한테 결투를 신청하는 것부터 정정당당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에, 에이이이잇! 시끄럽다! 간다아!"

    놈은 말로 날 이길 수 없다고 겨우 깨달은 건지, 그대로 돌진해왔다.

    빠르다. 솔직히 저 찌질한 태도 때문에 그 능력까지 얕보고 있었던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용사는 용사.

    놈은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든 속도로 내게 돌진해왔다.

    아마 아라크네의 클랜장 미리엘조차 한 수 접어준다고 했던 게 마냥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분명 미리엘보다 레벨이 낮을 텐데도, 놈의 움직임은 5계층에서 봤던 미리엘보다도 한층 더 빠르게 느껴졌다.

    그나마 내가 반응할 수 있었던 건, 놈이 방심하고 내게 일직선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당황한 나는 곧장 성자의 파동을 놈에게 날렸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아차, 힘 조절 안했다! 저 새끼 복상사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놀랍게도 놈이 검으로 내 성자의 파동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그나마 놈도 성자의 파동에 당황한 건지, 훌쩍 뒤로 뛰어서 일단 한 번 물러났다.

    "뭐, 뭐냐. 이 이상한 기운은. 그런가. 지고의 대마법사님에게 한 수 배웠다는 건가. 자신만만해할만하군. 하지만 난 용사! 전투로 나보다 레벨도 낮은 놈에게 질 생각은 전혀 없다!"

    아무래도 놈은 그게 그냥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놀랍기 그지없었다.

    설마 성자의 파동을 읽어 내다니.

    디아나조차도 마나를 느끼지 않으면 날아오는지도 몰랐을 거라면서 감탄했던 기술인데.

    뭐, 디아나한테 보여줬을 때는 행위중이어서 완전히 집중을 못하고 있었다는 점도 있었고, 디아나가 나보다 레벨이 낮아서 그런 점도 있었기는 하지만.

    아무튼 눈앞의 쓰레기가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라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은 전투만으로 레벨을 올린 거다.

    내가 섹스로 레벨을 올릴 때마다 성자 레벨도 똑같이 올라가는 것처럼, 놈도 용사레벨과 그냥 레벨이 같을 거라는 말이다.

    게다가 풍부한 전투 경험까지.

    이거 생각보다 전투가 힘들어 질 수도 있겠는데.

    뭐, 다행히 대책은 세워놓았다.

    "당황하고 있군. 방금 그 은밀한 마법이 비밀병기였나 보지? 한 번 들킨 이상 더는 통하지 않는다. 이걸로 끝이다!"

    놈은 그렇게 외치면서 다시 한 번 내게 달려왔다.

    빠르다.

    다시 한 번 성자의 파동을 날렸지만, 놈은 가볍게 피해내고는 그대로 내게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나도 검을 들어서 어떻게든 놈의 공격을 한 번은 쳐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쥔 팔이 뒤로 쭉 밀려나자,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을 난도질해왔다.

    그나마 5계층의 재료들로 강화한 갑옷과 레벨보다 훨씬 튼튼한 내 내구 덕분에 치명상은 피했지만, 내 온 몸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검을 들지 않은 손에 성자의 손길을 두르고 휘둘러봤지만, 놈은 그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내더니 다시 뒤로 훌쩍 물러났다.

    "구워어어언!"

    "꺄아아악! 구원씨이!"

    "큭!"

    멀리서 날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특히 내가 위험해지면 난입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바넷사는 당장이라도 난입해올 것 같은 자세를 취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서 바넷사를 제지했다.

    "자비를 베풀어 급소는 피해줬다. 지금이라도 울면서 빌면 용서해줄 생각은 있는데?"

    놈은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심 쓴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자비 좋아하고 있네. 천천히 괴롭히면서 가지고 놀려고 하는 게 뻔히 보인다.

    "너야말로 지금이라도 빌면 용서해줄 생각은 있는데."

    "크큭. 아직 입은 살아있다 이건가. 그럼 이번에는 그 입을 찢어줄까."

    "아무리 네가 못생겼고 내가 잘생겼다고 하더라도, 얼굴에 상처를 입히려고 하다니. 그런 식의 질투는 꼴불견으로 보일 뿐이라고."

    "이, 이 녀석이 아직도!"

    놈이 도발에 걸려들어 다시 내게 달려들려고 했을 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던졌다.

    "…그건 무슨 짓이냐? 이제 와서 꼴사납게 항복하겠다는 거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냥 단순하게, 너 따위를 상대하는 데는 검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크크큭. 오냐. 그렇단 말이지."

    놈은 웃음소리를 내면서도 얼굴을 귀신처럼 찌푸리고는, 정말로 화났다는 듯이 자신도 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렇다면 똑같이 상대해주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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