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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용사
나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 녀석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녀석이니까 말이다.
정보를 캐내려면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게 낫겠지.
그래서 나는 일단 전에 생각해뒀던 말부터 하기로 했다.
"후하핫. 그럼 각오…."
"잠깐. 그 전에 나부터 먼저 할 말이 있다."
"뭐냐? 이제 와서 겁먹은 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난 너랑 1 대 1로 대화해주겠다고 한 거지, 뭐 결투 같은 걸 해주겠다고 한 게 아닌데.
왜 자꾸 저딴 발언을 하는 거지? 뭐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나한테 적대적인데 말이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아무래도 공주 관련 문제인 것 같단 말이지. 용사라고 들었는데, 설마 그 용사가 그냥 별 이유 없이 질투심만으로 그렇게 적대하는 찌질한 놈은 아닐 거고."
"다, 당연하다!"
…이 녀석 반응이 수상한데.
설마 진짜로 그냥 질투 때문에 시비 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말인데. 그런 거라면 날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말이야."
"이,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
"그도 그럴게. 나 공주한테 관심 없거든. 너도 눈이 있으면 봐서 알겠지만, 애초에 난 공주한테 억지로 당한 거라고. 앞으로 난 성에 갈 일도 없고, 공주랑 관련될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 공주랑 둘이 잘 해보라고."
나는 생각해놨던 말을 그대로 놈에게 털어놨다.
그 조그만 물건으로 서큐버스 같은 공주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운운까진 말하지 않아줬지만 말이다. 나란 녀석은 왜 이렇게 상냥한 걸까.
"네, 네, 네, 네 녀서어어어억!"
하지만 나의 그런 상냥함에도 쓰레기는 더 얼굴을 구기고 새빨개져서는 되어서 고함을 질렀다.
"날 능멸하는 거냐아아아!"
"뭐, 뭐야. 갑자기."
"공주한테, 펠리시아 공주한테 네 놈이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와도 자지 않으면 안아주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이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아아아!"
……응?
놈의 분노에 찬 외침에, 나는 잠깐 사고가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네, 네, 네놈 때문에 나는…나느으으으은!"
녀석은 정말로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목소리까지 덜덜 떨면서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이렇게 보니까 아주 살짝 미안해질 것 같기도….
아니. 이건 미안해해야 하는 게 맞나.
미안. 네가 말해줄 때까지, 공주랑 그런 얘기 했던 거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이거 말하면 분명 도발밖에 안 되겠지?
아니. 잠깐 기다려봐. 지금 여기서 이 녀석이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는 말은….
"잠깐. 공주가 그걸 너한테 말했단 말이야? 아니, 그보다 공주가 그걸 진짜로 지키고 있다고?"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분노에 찬 눈으로 날 노려보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그 갈 때마다 섹스나 하고 있는, 섹스에 미친 공주가 섹스를 참고 있다고?
내가 걔 만난 지 대체 얼마나 오래 됐는데!
펠리시아 공주. 대체 얼마나 나랑 하고 싶어서 벼르고 있는 거야.
나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네 녀석이 사라지면 공주도 더 이상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지…."
그리고 녀석은 스산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보니 눈이 분노로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나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저 눈은 섹스를 못해서 굶주린 수컷의 눈이야.
아니. 그렇게 굶주렸으면 시종이라도 따먹으라고. 귀족이니까 집에 메이드 정도는 있을 거 아냐?
공주하고 밖에 섹스를 못한 다든가 그런 건 아닐 거…아니. 그러고 보니 이상하기는 했다.
이 녀석은 외모로 보나 성기 크기로 보나 절대로 섹스를 잘 할 타입은 아니다.
그런데 그 쾌락주의자인 공주가 이 녀석과 섹스를 해주고 있는 거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건가?
아무튼 난 일단 이 녀석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가만히 놔두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으니까.
"야. 진정해. 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디아나가 낭군님 낭군님 하면서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라고. 너도 성에서 소문정도는 들었을 거 아냐? 그런데도 날 공격하겠다고? 디아나의 마차도 다칠까봐 제대로 공격을 못한 녀석이? 과연 그러면 디아나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으으윽…! 여자 뒤에 숨다니 이 비열한 녀석…!"
역시나. 아무리 화가 났어도 디아나가 무서운 건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 의미로는 한결 같은 녀석이었다.
"아니. 비열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해준 거라고. 그리고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여신님의 사자로 교단에도 반쯤 인정을 받은 몸이라고. 그것도 교황님과 직접 얘기까지 해서 말이야. 왜 추기경이 나한테 붙어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 나 건드렸다간 교단에서도 가만 안 있을 걸?"
"크으으윽…."
녀석은 이를 악물고 마치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날 노려봤다.
나는 녀석의 호의를 끌어올리는 건 포기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상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옆에 있는 실비아라면 사정을 알 가능성이 높지만, 그걸 또 본인 앞에서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힘으로 해결하기로 할까.
"아무튼 나도 너한테 볼 일이 있었다. 여신님의 사자로서, 세계의 운명과도 관련된 중요한 얘기다. 성자로서 용사 네놈의 협조를 부탁하도록 하지."
"…뭐? 협조?"
"그래. 조금 묻고 싶은 게…."
"크흐흐하하하핫!"
이 녀석 드디어 완전히 정신이 나갔나.
"좋군! 좋아! 내가 알려줬으면 하는 게 있다 이거지?!"
"그래. 여신님의 사자로서…."
"그딴 거 아무래도…좋진 않지만, 여신님의 사자라는 사람이 설마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들지는 않겠지? 설마 교단에서 외압을 가한다든가, 그런 난폭한 짓은 안 할 거라고 믿는다."
차라리 그냥 아무래도 좋다고 말해라. 이 찌질한 놈아.
아니, 뭐. 이런 세계에서 여신님 관련 일이 아무래도 좋단 말을 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불보 듯 뻔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용사라는 놈이 너무 구차하지 않냐?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결투다!"
"…뭐?"
"네 녀석이 나한테 이기면 그 정보란 녀석을 알려주기로 하지! 하지만 내가 이기면…!"
"아. 그래. 그래라.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그래서 언제 할래? 당장 할까?"
"…어? 잠깐. 진짜로? 넌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난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용사. 그 최강의 모험가라는 그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장도 전투에 관해서는 한 수 접어주는…."
"알았으니까 하자고. 언제 할 건데?"
놈은 내가 곧바로 승낙하자 눈에 띄게 당황해서 자신의 프로필을 늘어놓았다.
미리엘의 레벨은 250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고작 198레벨의 이 녀석이 이긴 다는 건 조금 놀랍기는 했지만. 아니, 사라를 생각해보면 납득 가는 수준인 건가.
아무튼 난 이 녀석에게 전혀 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이봐! 실비아 바벳! 아, 안 말려도 되는 거냐?!"
"후야앙? 핫. 크흠. 전 구원님을 믿습니다아아아아…."
실비아는 놈의 외침에 순간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무표정으로 바꿨지만, 내가 그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자 다시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 그래. 실비아는 귀엽구나.
"뭐야. 네가 하자고 했잖아. 설마 이제 와서 겁먹었냐?"
"누, 누가…! 말해두지만, 내가 제안한 건 정정당당한 1 대 1 결투다. 중간에 그 누구의 난입도 없이, 순수하게 너와 나만의 능력으로 대결을 하는 거야."
"거 참 말 많네. 야. 아무리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지만 그 정도는 안다. 알았으니까 언제 할 거냐고? 지금 당장…아니. 잠깐. 지금은 안 되겠다. 데이트해야 돼. 내일 하자, 내일. 어차피 너도 별로 할 일 없지?"
"나, 난 이래 봬도 바쁜 몸이다! 하지만 좋다. 내일이라고 했겠다. 장소는?"
"내일 아무 때나 우리 집으로 와라. 어딘지 알지?"
"핫!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네 녀석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와라 이 말이겠다?!"
놈은 마치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그냥 나가기 귀찮아서 그런 건데.
"아. 그럼 장소는 네가 정하든가. 어디가 좋은데?"
"…으음…성…아니, 거긴 공주와…으으으으음…그, 그럼 내 저택에서 하는 걸로…."
"너도 결국 똑같잖아. 난 너희 저택 어딘지 몰라. 역시 그냥 네가 와라. 아님 뭐냐. 설마 우리 디아나가 저택에 함정을 파놓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우리 디아나를 모욕하는 거야?"
"크윽! 조, 좋다. 지고의 대마법사님이 그런 비열한 수단을 쓸 리가 없지. 내일이라고 했겠다. 그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난 너랑 다르게 여자랑 할 일이 많아서 항상 청결하니까 걱정 마라. 너같이 여자랑 할 일 없는 놈이나 그렇게 몸가짐에 신경 안 쓰고 다니지."
대결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한 이상, 이제 이놈을 얼마든지 도발해도 문제없다.
나는 그동안 꾹 참고 있었던 말들을 해주기로 했다.
"나, 나도 제대로 씻고 다닌다!"
"아, 그게 씻은 거였어? 미안. 너무 꾀죄죄해서 안 씻은 건줄 알았어. 그냥 원래 그렇게 생긴 거였구나."
"네, 네 녀석! 그렇게 입을 놀릴 수 있는 것도 오늘까지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좀 가라. 난 우리 실비아랑 데이트를 해야 돼서."
"우, 우리 실비…아, 아우…."
"크으으으으윽! 주, 죽여 버리…."
"알았으니까. 내일 하고 가라고. 넌 뭐 할 일도 없냐?"
이 이상 상대하고 있어봤자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쯤 해두고 실비아와 함께 다시 상점가를 향하기로 했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결투 약속을 잡은 이상 뒤를 공격 할 생각은 없는지, 놈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아무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일이 잘 풀렸네.
이제 내일이면 마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나한테는 무척 잘 된 일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었다.
저 놈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결투를 신청한 걸까?
내 예상이 정확하면, 저 놈도 아마 던전에 다니고 있을 거다.
저 외모나 물건을 봐선 섹스로 레벨을 올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으니, 아마 용사 특유의 전투로도 레벨 업이 빠르다는 걸 이용해 레벨을 올렸겠지.
그리고 이 도시에서 전투를 통해 레벨을 올리려면 뭐니 뭐니 해도 던전에 다니는 게 최고다.
즉, 놈은 확실히 던전에 다니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내 소문도 분명 들어봤을 텐데 말이야.
근래 길드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화제가 바로 성기를 통한 비밀통로 발견이니까 말이다.
내 소문을 아예 못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최근 던전에 아예 다니지 않은 게 아닌 이상 말이다.
뭔가 대책이 있다는 건가?
아니. 그것도 생각하기 힘든데.
그 디아나조차도 아직까지 내 스킬의 작동 원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저 놈이 내 스킬의 대책을 가지고 있다고?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그렇다면 뭘까?
저 외모로 내 스킬에 당하면 그냥 싸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솔직히 난 내일 결투에서 다른 것보다 제일 걱정되는 게, 바로 놈을 복상사시키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는 거였다.
아무리 레벨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놈의 매력은 잘 해야 10대. 아니지. 저 외모가 레벨 보정까지 들어간 외모라는 걸 생각해보면 한 자리 수일 가능성도 있었다.
레벨 업을 할 때마다 모든 스탯이 오르는 용사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실수로 성자의 손길. 아니, 어쩌면 위력이 가장 약한 성역 선포만으로도 위험해질 수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까진 아닌가. 일단은 공주랑 하고도 복상사는 당하지 않았던 녀석이다.
분명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저런 쓰레기를 어떻게 살려둘지 생각하는 게 아니다.
"우으으으으응!"
"…실비아. 설마하니 느낀 건 아니지?"
"아, 하앗, 하우…아, 아임니다!"
혀랑 다리가 풀렸다 이것다.
정말이냐. 딱히 야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정신적 쾌감 때문에 나랑 단둘이 거리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절정을 느끼는 거냐.
이래선 앞으로 갈 일이 멀어보였다.
데이트,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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