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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용사
"좋은 아침…실비아야."
레이아와 행복한 밤을 보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식당에 내려간 나는, 구석에 처박혀있는 실비아를 보고 할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무려 구석에 처박혀있는 것도 모라자서, 이제는 의자 하나를 구석까지 끌고 가서 등받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상태로도 고개는 빼꼼 내밀어서 날 엿보고 있으니, 바로 실비아가 있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뭐 굳이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구석에 의자가 떡하니 놓여있으면 실비아구나 싶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번 꿈이야 사건 이후로 가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실비아였다.
"네, 네힛?!"
"이리 온."
"우…!"
내 명령에도 실비아는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좀처럼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허. 어서!"
나는 말 안 듣는 강아지를 타이르는 심정이 돼서,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으으읏…."
하지만 실비아는 끙끙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끙끙거릴 거면 그냥 오라고.
진짜 중증이네. 그게 그렇게 부끄러웠나?
그냥 날 구원씨라고 부르고, 키스하려고 한 게 전부잖아.
애초에 실비아가 나한테 홀딱 반한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는 별로 창피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잖아.
내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당사자인 실비아는 쥐구멍에 들어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식당에는 꼬박꼬박 와서 내 얼굴을 엿보니, 쟤도 참 고생이 많다.
"셋 셀 때까지 안 오면 내가 간다. 하나…둘…."
"구원씨. 너무 실비아씨한테 그러시지 않는 게…."
보다못한 레이아가 날 말리려고 했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아니. 너무 응석부리게 만들어선 안 돼.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키워야지."
나는 레이아와 마치 철없는 아이를 키우는 부부 같은 대화를 하고는 다시 실비아를 쳐다봤다.
"실비아. 지금 둘까지 셌다. 내가 셋 세고 너한테 가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우으으읏!"
그리고 그렇게 별 위협적이지도 않은 협박을 했지만, 그게 또 실비아한테는 먹혀들었다.
실비아는 눈을 꼭 감고는 각오를 다졌다는 듯 내게 돌진해왔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온 실비아는 내게 부딪히기 직전에 급격히 속도를 줄이더니, 깃털이라도 닿은 것처럼 살포시 내 품에 안겨 들어서는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잘했어."
나는 상으로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지만, 그건 실비아의 진동을 더욱 거세게 만들 뿐이었다.
실비아는 내 몸에 팔을 두른 채로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실비아 반응이 평소보다 더 심한 것 같은데. 구원 또 실비아한테 뭔가 했어?"
"아냐! 대체 날 어떻게 보고! 내가 그런 짓을 할 놈으로 보여?!"
"그래. 보여. 이 바보에 변태야."
큭…저 녀석…. 오늘 밤에 두고 보자.
그 바보에 변태가 변태 짓에 진심을 다하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지.
"구, 우우우…구원님은, 아아, 아무 것도, 안 하셔씀미다아…."
그리고 의심하는 사라에게 내 변호를 해준 게, 바로 품에 있는 실비아였다.
실비아는 내 품에 안긴 채 흐물흐물 녹아내린 상태로, 사라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변론을 해줬다.
실비아야. 옹호해줘서 고맙다. 근데 대체 뭘 했다고 벌써 혀가 풀렸냐.
"그럼 그럼. 다 실비아가 날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지. 그지?"
"네헤에에…."
"읏! 흐, 흥! 나도 구원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거든!"
사라야. 보통 그 대사는 ‘흥! 너 같은 거 안 좋아하거든!’ 이라고 써야 되는 거 아니냐?
아니 뭐 좋아해준다고 말해주니 고맙긴 하다만.
"그럼 사라도 언제 한 번 나한테 안겨서 이렇게 녹아내려볼래?"
"여, 여기선 안할 거야, 바보야!"
여기선 말이지. 그 말 똑똑히 기억해 놨다.
나중에 사라의 귀여운 얼굴이 보고 싶어졌을 때 써먹어야지.
"아무튼 실비아. 넌 요즘 너무 심해졌어. 예전부터 했던 특훈의 성과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잖아. 오늘은 벌로 내 무릎 위에서 밥을 먹는 형에 처한다."
"우으으…그, 그러어언…!"
실비아는 절망에 빠진 얼굴이 됐지만, 이거 결코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니까.
"아우으으…우아아아아…."
"실비아. 흘리지 마라."
"노, 노려하게씀니…."
그리고 식사하는 내내, 실비아는 내 위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이아와 그렇게 즐기고 왔는데도, 위에서 실비아가 덜덜 떨어지자 내 지칠 줄 모르는 물건은 또 반응을 해왔다.
그리고 내 딱딱해진 물건이 엉덩이에 닿는 걸 느낀 실비아는 더더욱 몸을 진동시킨다는, 부의 스파이럴이 계속됐다.
그것만으로도 큰일인데, 심지어 요즘에는 그냥 너무 좋아서 이렇게 떠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자신이 꿈으로 착각하고 한 말과 행동이 부끄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사라와 레이아에게는 면목 없다는 듯 시선도 못 마주치고 있는 상태다.
실비아는 지금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상황이겠지.
이거 이대로 자연 치유를 기다려도 될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실비아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한 번 상담이 필요함을 느꼈다.
"실비아. 밥 먹고 나랑 얘기 좀 하자."
"우읏…네, 네에…."
내 말에 실비아는 풀이 확 죽어서는, 힘없이 대답했다.
얘 또 뭐 착각한 거 아냐?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나는 실비아와 함께 방으로 왔다.
실비아는 마치 지금부터 꾸중을 들을 아이처럼 풀이 죽어서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또 나와 단 둘이 있는 게 기쁘기는 한 듯, 입 꼬리가 야무지지 못하게 흐물 거리는 게 보였다.
"실비아."
"네, 넵!"
"전에 꿈으로 착각한 걸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인데."
"우읏!"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니, 오히려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잖아. 좋아하는 사람 이름도 불러보고, 키스도 하고 싶고 그런 거지 뭐. 당연한 거야. 신경 쓰지 마."
"우아아아…! 우아아아…!"
나는 분명 다독일 셈으로 말한 거였는데, 실비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뭐, 뭐야 이 반응? 마치 치부라도 지적당한 듯한…아 그런가.
실비아 입장에선 망상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 자신의 망상을 들키고, 그걸 또 고스란히 말해준 상황이 돼버리는 건가.
그건…조금 부끄럽긴 하겠네.
"미안."
"아, 아닙니다아아…. 감사합니다아아!"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면서 감사 인사를 하고 있어.
혹시 그런 취향이니? 라고 평소 같았으면 농담을 던졌겠지만, 과연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지 할 순 없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뭣하면 앞으로 그냥 구원씨라고 불러. 뭐 어때."
"……! 그, 그럴 수는…!"
그럴 수 없으면 앞에 그 경직은 뭐였냐.
"넌 여기 온지 대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나한테 너무 딱딱하단 말이야. 좀 더 편하게 지내자고."
"우으으…하지만…."
실비아는 우리 파티에 합류하게 될 때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던 만큼, 그렇게 쉽게 태도를 바꾸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좋아. 도저히 못하겠다면, 나한테도 생각이 있지."
"네, 넷?!"
내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실비아의 몸이 두려움에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 눈빛에 미약하게나마 희망의 빛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던 건, 내 기분 탓일까?
역시 얘도 내가 가지고 놀아주는 거 은근히 즐기는 게 아닐까?
근데 이거 기대를 배신해서 어쩌나. 오늘은 데리고 장난치려는 거 아닌데.
"지금부터 특훈이다. 따라와."
나는 실비아를 데리고 그래도 저택을 빠져나갔다.
"구, 구원님? 대체 어디로…?"
실비아는 내게 잡힌 팔을 덜덜 떨면서, 불안과 기대가 반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뭐?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네, 네에…."
"남녀가 둘이서 거리에 나왔어. 이제부터 뭘 할 것 같아?"
"……서, 설마…."
"그래. 데이트야."
"아, 아, 아, 안댐…아읏! 니다! 저, 저택에 사라님과 레이아님도 계시는데, 두 분을 놔두고 어찌 제가…!"
실비아는 패닉 상태에 빠져서 눈을 이리저리 사방으로 돌리고 혀까지 씹으면서 외쳤다.
"그런 말하면서 입 꼬리는 웃고 있는데."
"핫…! 크읏, 주, 죽여주십시오…."
"농담이야. 아무튼 따라와 네가 싫어도 억지로 데이트는 해야겠어. 아니. 솔직히 말해봐. 싫어? 참고로 싫다고 하면 상처받을 거다. 알아서 잘 대답해."
"아, 아으…그, 그건…다, 당연히…싫지…않습니다…."
실비아는 조금 죄책감에 빠진 얼굴을 지으면서도, 그렇게 실토했다.
고작 이런 걸로 죄책감이라니. 아마 사라나 디아나, 레이아한테 느끼는 거겠지만. 너무 성실하잖아.
뭐, 그러니까 우리 애들도 실비아는 아껴주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야.
"싫지 않은 것 뿐?"
"우으으…조, 좋습니다…!"
"누가?"
"구원님이 좋습…핫! 아우으으으…."
실비아는 결국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쭈그리고 앉아버렸다.
하핫. 실비아야. 너무 쉽게 낚이는 거 아니냐?
"왜 하던 말 계속하지? 아님 뭐야? 아냐?"
"우으으…구원님이 좋습니다!"
말장난에 낚인 건데도 그걸 또 제대로 대답해주는 실비아였다.
"좋아. 그럼 맘을 다잡고 당장 데이트를…."
"찾았다! 구워어어어언!"
그때 저 멀리서 내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사내새끼 목소리였다.
이럴 때 대체 누구야?
아니. 정체 따윈 상관없어. 어차피 사내새끼니까. 내 데이트를 방해하려 하다니. 일단 죽인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웬 평범남 하나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 얼굴은…저 놈 어제 그렇게 당하고도 또 날 찾아왔단 말이야? 진짜 뇌라는 신체기관이 없는 건가?
"하핫! 이번에는 지고의 대마법사님도, 저주받은 추기경님도 동행하지 않은 모양이군! 방심 했구나, 구원!"
이놈은 나랑 언제 통성명했다고 이름까지 맘대로 부르고 있어. 난 너 같은 놈 이름도 모르거든? 뭐, 마음 속에선 맘대로 쓰레기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서 또 그런 가녀린 여자 하나를 꼬셔…시, 실비아 바벳?!"
쓰레기는 내 옆에 있는 여성의 정체를 확인하더니, 뭔가 급격하게 겁먹은 얼굴이 되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뭐야? 우리 귀여운 실비아를 보고 저런 반응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실비아를 쳐다봤다.
……응. 그래. 이해한다.
실비아 얘도 화낼 때가 있구나. 그야 뭐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처음 봤는데 의외로 박력 있다.
가녀린 몸매에 얼굴도 청순한 계열이니까 화나도 그다지 무섭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표정으로 쓰레기를 노려보는 그 눈빛은 거의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고, 공주의 특별 임무를 수행 중이었던 게…?"
"수행 중입니다만."
"그, 그러십니까."
실비아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쓰레기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네, 저 목소리.
처음에 날 반란 의심으로 끌고 간다면서 왔을 때도 저런 목소리였는데.
"에, 에이이잇! 네, 네 녀석! 항상 여자 뒤에 숨고! 부끄럽지도 않냐?!"
아니. 딱히 숨은 적 없다만.
자기 혼자 겁먹고 폭발하는 주제에 말은.
"부끄러울 게 뭐 있어. 이것도 다 능력인데. 실은 너도 부럽지?"
"크윽! 시끄럽다! 이 비열한 녀석!"
그래도 부럽지 않다는 말은 안하는 쓰레기였다.
의외로 저 쓰레기는 솔직한 쓰레기일지도 모르겠다.
"남자라면 남자 대 남자로서 정정당당하게 상대해라!"
아니, 그러니까 이 세계는 애초에 여성들이 우위에 있잖아.
남녀 차별이 없는 세계이기는 한데, 레벨 업 시스템 상 요직들은 대부분 여자가 차지하고 있는 세계다.
그런데도 여기 남자들은 꼭 내가 살던 세계의 남자 같은 발언을 종종한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앨리시아한테도 여성스럽게 행동하라는 말이 그대로 먹혔고.
의미를 모르겠다.
뭐, 아무튼 잘 됐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이 쓰레기한테는 볼일이 있다.
"좋아. 뭘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데?"
"구, 구원님!"
"괜찮아."
나는 걱정의 눈빛을 보내는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데이트를 시작부터 망칠 값까지 톡톡히 받아낼게.
"후야아아아…."
그러자 실비아는 바로 얼굴이 풀어져서는 다시 흐물대기 시작했다.
"뭐, 뭐…말도 안 돼…그 실비아 바벳양이…크, 크흠! 아무튼 네 녀석! 나와 1 대 1로 대면하겠다 이거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모양이지만, 일단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한다고 해주지!"
뭐라는 거야 이 쓰레기가. 애초에 배짱 같은 거 없어도 넌 안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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